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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76화 (76/150)
  • 076화.

    기다릴 수 있어

    쉼 없이 길게 이어지는 전투에 민주혁과 얘기할 기회를 잡을 틈이 없었다.

    조금 거리가 있는 이곳에서도 검은색의 안개가 솟구치는 모습과 공격 마법의 빛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끼를 자처한 송하견의 주위를 민주혁이 방어막으로 감쌌다. 골짜기 쪽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기는 송하견에게 새까만 안개가 쏟아지듯 몰려들었다. 그 안에서 송하견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침착하게 마법을 외우자 안개 속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마기가 스며든 안개의 움직임이 둔해졌을 때 박율과 라엔이 골짜기 중심부로 길을 뚫고 들어갔다. 라엔은 허공에서 몸을 약간 띄운 채로 접근해 오는 마물에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박율이 골짜기 사방에 퍼져 있는 마물의 핵에 검을 찔러 넣을 때마다 비산하는 회색 재 사이로 붉은빛이 점점이 떠올라 검 안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날이 어둑해져 시야가 가려질 때쯤에야 다들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앉아 있던 나무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박율이 마법을 써서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박율의 팔뚝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고 치료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송하견과 라엔도 치료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래. 걱정하지 마.”

    라엔이 상황을 설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마물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서요.”

    “쉽지 않은 상황인 건가요?”

    “방어막을 공격해 오는 형태에 맞춰서 강화해야 하니까.”

    “그래도 적응할수록 부상이 줄 거예요.”

    부상이 아예 없을 수는 없구나. 조금의 착잡함을 안고 있을 때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한아, 지금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지?”

    “절대 아니에요.”

    치료하기 게이지가 얼마나 채워지는지 눈을 살짝 굴려 봤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게서 조금 떨어져서 서 있던 민주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내 손이 아예 닿지 않는 곳으로 슬쩍 물러났다.

    “형은 잘 곳 정리하고 금방 올 거야. 나중에라도 힘들면 말해.”

    “나도 같이 갈게요, 리더 형.”

    박율과 라엔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 잠깐 고민하던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주변 살펴보고 올게.”

    “잠깐, 형님…!”

    민주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두 떠나고 이곳에 남은 사람은 두 명이 됐다.

    “너도 갈 거야?”

    “……. 아니.”

    말을 한 박자 쉬고서 민주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덧붙였다.

    “너 혼자 두고 어딜 가.”

    이럴 때 보면 또 평소 같은데. 민주혁은 고통스럽지만 차마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내 어깻죽지를 집요하게 훑었다.

    “그때 일 생각해? 다 지나간 건데.”

    “알아.”

    “그러면 다른 것 때문이야?”

    “…미안.”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사실 알겠는데, 그럴 만한 일 아니야.”

    민주혁의 손을 재빨리 잡고 아까 해 주지 못한 치료를 하자, 민주혁이 몸을 경직시키더니 손을 순식간에 빼냈다. 그리고 복잡해 보이는 시선으로 따가울 정도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치료하는 것도 이렇게 기회를 노려서 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마터면 한숨을 내쉴 뻔했으나 가까스로 넘기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안 괜찮으면 기다릴 수 있어.”

    “야, 너….”

    민주혁이 말을 마치기 전에 옆에서 바람이 살랑 불어오며 박율과 라엔이 돌아왔다.

    “다 정리됐는데. 지금 자러 갈래요?”

    “선이한, 너는 자러 가.”

    내 등을 쭈욱 미는 손길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었으니 잘 때가 된 건 맞았다. 박율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높은 데 무서워해?”

    “아니요, 괜찮아요.”

    “그럴 것 같았어. 높은 데도 겁 없이 올라가고 그랬잖아.”

    웃음기 스민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시스템에 의해서 가게 된 것이든, 내가 혼자서 가게 된 것이든 박율의 말이 사실이기는 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이제 올라갈 거거든.”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아래로 아무것도 없는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박율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박율은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내 어깨를 다독였다.

    “어, 지금 텐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거죠?”

    한 사람이 들어가기 적당한 크기의 텐트가 커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박율이 나를 그 텐트 안으로 들여보내더니 자기도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텐트 안에는 더 이상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박율의 온기와 작은 움직임까지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박율이 손을 뻗어서 텐트의 중앙 천장에 매달린 작은 등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연한 빛이 뿜어져 나와 텐트 안을 밝혔다.

    “여기서 자요?”

    “맞아. 포탈렛지, 간이 허공 침대 같은 거야. 아래는 구름이 있으니까. 이쪽은 안전하긴 한데 혹시 몰라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이 아래로 떨어지는 거 아닌가요?”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천 하나만 두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밑으로 쏙 빠질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마법을 걸어 놓았나요?”

    “맞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박율을 바라보며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자다가 굴러떨어지면요…?”

    “걱정돼?”

    “음, 조금요.”

    “다칠까 봐?”

    “그건 아닌데….”

    내가 엉망으로 자다가 저 아래 바닥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조금 민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대강 얼버무리니 박율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형이 같이 있어 줄까?”

    “어,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재빨리 고개를 젓자 박율이 잠깐 공백을 두고 그래, 하고 대답하며 나를 자리에 눕혀 줬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라는 것처럼 내 눈 위로 손을 천천히 덮었다.

    “이한이는 잠버릇 없이 가만히 자는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자는지 알아요?”

    “당연히 알지.”

    하긴 내가 그동안 툭하면 잠들어 댔으니까, 방을 같이 썼던 송하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편하게 자.”

    연한 웃음기 스민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선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서 눈을 번쩍 떴다. 몽롱한 시야에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퀘스트 창이 보였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Ⅲ 실패!

    페널티 ‘메스꺼움’이 지속 시간 ‘2일’ 동안 유지됩니다.

    곧이어 새로운 퀘스트 창이 생겨났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Ⅳ

    성공 시: ‘민주혁의 확신’ 획득

    실패 시: ‘간헐적 코피 2주’ 페널티

    제한 시간: 2주

    “아, 진짜….”

    방금 잠에서 깨어나서 잠긴 목소리로 불만이 새어 나왔다. 페널티가 시작됐다는 걸 이렇게 요란하게 알려 주다니.

    당연하게도 옆에 박율은 이미 자기 텐트로 가 있는 채였다.

    “으….”

    속이 조금 뒤집히는 듯해 명치께로 손을 가지런히 모아 올렸다. 날이 더우니까 울렁임이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가만히 누워 낮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매달려 있는 등을 손끝으로 건드리자 연한 불빛이 조그맣게 번져 나왔다.

    탁 트인 바람을 맞으면 속이 좀 가라앉을까 싶어서 텐트 입구의 천을 걷어 냈다. 베고 있던 푹신한 베개를 품에 안은 채 다리를 반 정도 바깥으로 빼고 걸터앉아 보랏빛으로 들어찬 새벽하늘을 바라봤다.

    더운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여름의 풀 냄새가 났다. 고개를 숙여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지만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송하견의 방에 있을 때는 늘 연한 약초 향이 났었는데, 어쩐지 그 향기가 그리웠다.

    ‘이틀만 참자.’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거니까,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건 조금 힘든 일인 것 같다. 요즘 그걸 실감하고 있….

    “이한아.”

    갑자기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자고 뭐 하고 있어.”

    박율이 허공에 둥실 떠오른 채 내 앞에 있었다.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밝은 금발이 선명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해 보면 다들 불쑥 나타날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율이 형은….”

    목소리를 내니까 속이 더 메스꺼운 것 같아서 급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말을 마쳤다.

    “…형은요?”

    “형은 불이 켜지는 걸 봐서.”

    “아.”

    밝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서둘러 몸을 돌려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상자를 가볍게 건드리자 한순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혹시 나 때문에 자다가 깬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몸을 돌렸는데 박율이 어느새 내 코앞에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한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왜요…?”

    박율이 내게로 손을 천천히 뻗었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서 나도 모르게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러나 조그만 텐트였기에 물러난다고 해서 거리가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내 이마에 손바닥이 닿는 느낌이 났다.

    “열이 나는 건 아닌데. 어지러워?”

    밤중에 갑자기 와서 이게 무슨 말인가 하여 눈을 다시 뜨고 가만히 박율을 바라봤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식은땀 좀 봐. 더워서 그런가? 잠깐만 고개 들어서 형 보자.”

    고개를 들어 보자는 건 권유형의 말이었으나, 박율은 내 양 뺨을 손으로 감싸서 얼굴을 직접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더워서 그런 게 아니구나. 어디 아파?”

    아픈 건 아니었고 그냥 페널티 때문에 좀 억울할 뿐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박율이 내게 몸을 더 붙이며 내 등을 찬찬히 쓸었다.

    “속이 좀 안 좋아? 말로 안 해도 괜찮아.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자.”

    아까부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의사소통이 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내 등을 느릿하게 흝어 내는 박율의 손길 덕에 메스꺼움을 조금은 가라앉혀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나는 나름 진심이었으나 박율은 내 얼굴을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표정을 조금 굳혔다. 그러고는 차갑게 식은 내 손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체했나?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아니면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와서 그런가?”

    전부 아니었지만 변명할 말도 없고 목소리를 뱉을 기력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얘기하긴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의지를 다잡고 있을 때 박율이 나를 조심히 안아 들고 텐트 입구의 천을 걷어 냈다.

    “일단 마을 숙소로 돌아가 있자.”

    “네…?”

    내게 설명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에 멍한 대답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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