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미안해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Ⅱ 실패!
페널티 ‘고열’이 지속 시간 ‘2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곧바로 열이 오르고 몸이 뜨거워졌다. 머리가 무겁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흔들리는 시야에 또 다른 퀘스트 창 하나가 생겨났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Ⅲ
성공 시: ‘민주혁의 확신’ 획득
실패 시: ‘메스꺼움 2일’ 페널티
제한 시간: 2일
후회. 그 두 글자가 눈에 박혔다. 짧은 단어였음에도 묵직했다. 민주혁은 무엇을 그렇게나 후회하고 있는 걸까.
파랗게 빛나는 퀘스트 창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창살 너머에서 나를 마주하는 마을 대표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잔주름이 진 얼굴이 눈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마주하기가 조금 벅찼다.
“갑자기 열이 올랐네.”
박율의 목소리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박율이 내 등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추고는 내 이마를 짚었다. 앞머리가 쓸려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박율의 시원한 손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안 되겠다. 열이 높아. 하견아, 라엔아, 돌아가자.”
내 몸이 조심히 들렸다. 축 늘어지는 몸을 박율의 가슴팍에 힘없이 기댔다. 열이 오르는 건 이래서 싫다. 생각도 몸도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올 겁니다, 하는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율은 마을 대표를 심란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중년의 남자에게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후욱.
텔레포트로 들어온 숙소의 방 안에는 보랏빛 새벽하늘이 창을 통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박율이 나를 침대에 앉히고, 송하견은 달콤한 맛이 나는 시럽을 내 입에 흘려 넣었다. 라엔도 내게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시게 한 다음에 몸을 눕혔다.
“…바로 졸릴 거야. 자.”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은 푹 쉬어, 이한아.”
“일은 우리가 마무리 지을게요. 걱정하지 마요.”
지금 머리가 멍한 게 약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까까지의 상황을 감당하기가 벅차서인지 알 수 없었다.
“…고마워요.”
느릿하게 대답하자 내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 눈 위로 시원한 손바닥이 부드럽게 덮이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옆에서 바람이 살짝 불었다. 조용해진 걸 보니 다들 텔레포트로 이동한 듯했다. 노곤한 정신이 잠에 거의 빠져들 무렵, 방문이 끼익하고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미안해, 선이한.”
시원한 향기가 났다. 사그라들 듯이 흐릿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어제는 몸도 마음도 힘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모든 게 괜찮아져 있었다. 고열 페널티도 끝났고 마음도 차분했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막막할 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은 어쩌면 빨리 잠이나 자라는 몸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몸이 이렇게 가벼워진 걸 보면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헤집은 흙탕물을 그대로 내버려 둬서 흙모래가 모두 가라앉은 것처럼, 해결되지 않은 의문과 혼란이 저 깊숙이로 꺼져 있었다. 언젠가는 그걸 끄집어내서 나름대로 정답을 달아 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일단은 좀 쉬고 싶었다.
이마에서 시원한 느낌이 나길래 만져 보니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떼어 보니 연한 보랏빛의 네모난 종이였다. 이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한 바퀴 굴리자 이불이 바스락대며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일어났네.”
송하견이 이쪽으로 다가와서 침대에 사뿐히 앉아 내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용사님과 함께 보내는 밤 퀘스트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걸 보니 아쉽게도 송하견이 나와 같이 잔 건 아닌 것 같다.
상황이 어떻게 정리됐는지 물으려 했는데 먼저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아이들 외에 마기에 잠식된 사람은 없고, 현재는 두 아이 모두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고 마을 대표에게도 전했다고 한다. 마을 대표는 법에 따라서 처벌받을 거라고 했다.
다행히 일을 물밑에서 처리했기에 내가 아이들을 치료한 일이나 자세한 상황은 마을에 다 알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알려 줘서 고마워요, 형.”
“아무것도 담아 두지 말고.”
송하견이 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어느새 손에 죽이 담긴 작은 그릇과 수저가 들린 채였다.
“내려가서 같이 먹어요. 형도 점심 먹을 거잖아요.”
송하견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1층에 내려와서 탁자 앞에 앉았는데 송하견은 음식 없이 달랑 유리컵 하나만 자기 앞에 놓았다. 투명한 물에 초록 이파리가 몇 개 가라앉아 있었다.
“하견 형은 아침…이 아니라 점심 먹었어요?”
“…먹었어.”
“뭐 먹었는데요?”
“……. 그냥.”
안 먹었구나. 송하견은 거짓말을 못하는 편인 것 같았다.
“그거면 돼요?”
“…응.”
“나랑 한 입씩 바꿔 먹을래요?”
“응. …아니. 이건 맛없어.”
송하견이 재빨리 대답을 바꿨다. 같이 먹을까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정말 저걸로 점심이 되나? 맛도 없다면서 자기는 그걸 왜 마시는 건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송하견이 유리컵을 내게 건넸다. 그걸 한 모금 마셨는데.
“…!”
충격적인 맛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리고 입 안에 있는 액체를 간신히 마저 삼켰다.
송하견이 내 손에 들려 있는 유리컵을 다시 가져가서 자기 입에 댔다. 그리고 내게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홀짝 마셨다. 어쩐지 아주 잠깐 웃었던 것 같다. 내 표정이 그렇게 웃겼나?
“잠 깨지?”
“형, 괜찮은 거 맞아요? 너무 쓴데, 마실 수 있는 거 맞아요?”
이건 음료가 아니라 약이었다.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마실 수가 있지. 내 앞에 놓인 죽을 한 스푼 떠서 입에 서둘러 넣었다. 그러자 송하견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지? 아, 설마.
“형도 먹어 볼래요? 내가 벌써 먹긴 했는데.”
“응.”
대답이 바로 들려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았나 보다. 내가 입을 대기 전에 송하견에게 먼저 줬어야 했는데. 그러나 송하견은 딱히 새로운 스푼을 소환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죽을 크게 떠서 송하견의 앞으로 가져다 댔다. 송하견은 내 손목을 감싸 쥐더니 천천히 끌어당겨서 그걸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짧게 고마워, 한 마디를 하고 다시 쓴 음료를 마셨다.
내가 은근슬쩍 한 스푼을 더 떠서 주자 송하견은 못 이기는 척 다시 한번 받아먹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받지 않았다.
“너 많이 먹어, 선이한. …모자라면 말하고.”
그렇게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식사를 마치자 송하견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네.”
“아이는 어떻게 치료했어? 용사만 치료할 수 있다면서.”
송하견의 신중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대답 준비하는 건 잊고 있었지만 나도 그동안 나름 성장했다. 이전과 달리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변명을 만들어 냈다.
“내가 몰랐는데 방법이 있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앞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왜? 대가를 치러야 해서?”
“네? 아니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부정부터 했지만 생각해 보니 꽤 그럴싸한 이유였다. 지금은 송하견의 말에 그냥 맞장구쳐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급하게 말을 돌렸다.
“어, 사실 맞아요. 나는 용사만을 위해서 신의 힘을 받은 거니까, 용사가 아닌 사람에게 신의 힘을 썼을 때는 대가가 있는 것 같아요.”
“대가가 뭐였는데?”
“별거 아니었어요. 이제 괜찮고요. 근데 두 번은 안 될 것 같아서요.”
이 정도로만 말해도 되겠지? 분위기를 보니 송하견도 슬슬 넘어가 주려는 듯했다.
“…아이한테 들었어. 피를 심하게 토했다고.”
넘어가 주는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아이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용사 동료들이고 이쪽에서 먼저 물어봤을 테니 의심 없이 얘기한 것 같았다. 피를 토한 건 반드시 비밀로 해 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평소에 피를 뱉었던 거랑은, 다른 거야?”
“네. 평소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다 했으니 송하견이 말을 더 잇기 전에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하견 형, 그런데 다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송하견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바로 답을 내어 주었다.
“마을 대표 일을 처리하러. 오늘 마무리하고 내일은 골짜기로 갈 거야.”
송하견에게 내일 나도 같이 데려가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좀 흐르니 박율과 라엔도 돌아왔다. 둘에게도 내가 아이를 치료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율이 형, 민주혁은요?”
“음, 주혁이는 조금 늦을 거야.”
“잠깐도 안 들어온대요?”
“오늘은 못 보지 않을까 싶은데.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이한아.”
민주혁의 상처를 꼭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마음이 자꾸 쓰였다. 심지어 민주혁은 내 어깨에 박힌 칼을 뽑다가 다친 거였다. 그때 흘러내리던 피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도 어두워질 무렵에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민주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옷 아래로 흉이 져 있을 내 어깨를 퀭한 안색으로 흘끗 보는 눈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골짜기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피하는 걸까.’
민주혁은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저만치로 멀찍이 떨어졌다. 그래도 꿋꿋하게 다가갔으나, 텔레포트로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오기까지 하는 걸 보고 그냥 포기했다.
평소와 다른 민주혁의 모습은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마물을 상대하고 난 다음에는 치료를 받으러 와 주겠지.
굵직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다들 저 멀리서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나무의 거칠한 표면을 손으로 쓸다가, 손끝에 묘한 감각이 느껴져서 손을 들어 올려 봤다. 조그만 가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톱으로 집어서 가시를 완전히 빼냈으나 그 자리에서 여전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민주혁이 내 흉터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프지도 않고 이제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신경 쓰이는 감정. 이 감정을 잊으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거나, 혹은 잊힐 때까지 괜찮다는 걸 거듭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둘 중에서라면 후자가 낫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