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원망해야 할 건
라엔이 놀란 듯이 곧바로 손을 떼어 냈다.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뭔가를 참아 내는 듯 꾹 눌린 것처럼 들렸다. 딱히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내 흉터를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이렇게 살펴 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라엔이 손가락을 튕겨서 주위로 구체의 빛을 만들어 냈다. 빛이 흰색이었음에도 어쩐지 라엔의 얼굴이 조금 붉어 보였다. 라엔은 이제 내가 바르라는 듯이 말없이 내 손에 연고 통을 쥐여 줬다.
“형이 해 줬으면 좋겠어요.”
“…….”
이 끈적한 연고를 닦아 내려면 클린 마법을 써야 할 텐데, 굳이 나까지 연고를 손에 묻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라엔이 해 주는 것도 싫지 않았다.
라엔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조금 떨리는 듯한 손을 다시 내 어깨에 가져다 댔다. 벌써 손길이 조금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간지러움을 참을 만했다. 라엔은 연고가 모두 흡수될 때까지 덧그리듯 살갗을 매만지고는 다시 내 옷깃을 올려 주었다.
“이한, 바로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출혈이 심했다고 들었어요.”
“네, 괜찮아요. 지하 감옥으로 가요.”
사실 곧 괜찮지 않을 예정이긴 했다. 민주혁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건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라엔이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후욱.
텔레포트해서 작은 건물 앞으로 이동했다. 라엔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꽂힌 나무 막대기 끝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건물 내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라엔의 뒤를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내려갈수록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뒤엉켜 들렸다.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두 명의 아이가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자백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그걸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질문. 다른 아이의 집은 어디야.”
“마을 중앙에서 우측 길 세 번째 집입니다. …하, 간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합니까? 괜히 들쑤셔서 소문내지 말고 얌전히 나가십시오. 이 마을에 용사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숨길 게 아니라 마을에 알리셨어야죠. 그리고 용사님들을 해하려고 하다니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좁은 공간이었다. 천장에 거미줄이 길게 늘어진 걸 보니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 대표는 푸른빛으로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나무 창살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박율과 송하견과 민주혁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도 한 명 보였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우리를 안내했던 그 중년의 남자였다.
“선이한, 너….”
인기척을 느꼈는지 민주혁이 이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나와 시선이 잠깐 맞았다.
민주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내 상태를 확인하듯 위아래로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텔레포트 마법으로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주혁, 정말 그대로 가 버렸네.’
방금 보니까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심지어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나한테 시간을 잠깐만 주면 치료할 수 있었는데. 마음이 썼다. 이 상황이 해결되면 바로 찾아가야지.
박율과 송하견에게 나는 이제 완전히 괜찮다는 얘기를 잘 전달한 후에 마을 대표의 앞으로 가서 섰다. 깊은 증오를 담은 형형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마을 대표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뭐야, 신관도 멀쩡하네. 결국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
“연서아.”
마을 대표가 내게로 고개를 휙 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맞죠, 그 아이.”
“어떻게….”
마을 대표가 눈을 크게 떴다. 곧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눈에 핏발이 섰다. 마을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며 몸을 들썩였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 당장 말해.”
마을 대표의 숨이 거칠었다. 그 아이가 맞았구나. 정성 들여서 곱게 빗겨져 있던 머리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얼굴에 섬뜩하게 퍼져 있던 검은 면적도.
이 사람이 분노하는 건 정당하다. 그러나 그 분노의 방향이 용사들에게 향하는 건 정당하지 않았다. 나는 정당한 것과 정당하지 않은 것 그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입 열어. 우리 딸을 어떻게 알….”
“아이는 괜찮아요.”
“…뭐?”
양손으로 나무 창살을 감싸 쥐고 마을 대표를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딱딱하고 서늘한 재질이 닿아 왔다.
내가 가진 힘으로 치료한 거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제 용사 외의 사람은 치료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내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신께서, 축복을 내리셨어요.”
마을 대표의 모든 행동이 뚝 멈췄다. 그는 움직이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조용히 나를 올려다봤다. 옆에서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타닥타닥 울렸다.
박율과 송하견과 라엔은 내 말이 변명이라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내가 마을 대표와 대화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기다려 주려는 듯 보여서 고마웠다.
나중에 모두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도 잘 생각해 둬야지. 퀘스트의 보상이었다는 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까.
“축복이라는 게… 무슨….”
“두 아이 모두 치유되었다는 뜻이에요. 이제 다 나았어요.”
“내가…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신력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제대로 설명….”
“나중에 아이를 보면 다 알게 될 텐데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건….”
“믿기 싫으면 믿지 마요.”
마을 대표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달싹이더니 곧 허리를 천천히 숙여서 이마를 땅에 가져다 댔다. 꼭 엎드려 사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축복을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맞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용사들도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이 사람은 왜 그건 모르지?
“당신은 내게 용서를 빌 자격이 없어요. 나도 당신을 용서할 자격이 없고요. 당신이 공격하려고 했던 건 용사들이잖아요.”
“용사님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떤 벌이든 받겠습니다. 아이가 점점 마기에 잠식당하고 있어서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잠깐 눈이 멀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을 대표가 바로 간절한 목소리를 쏟아 냈다. 어쩐지 그걸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신께서는 이미 내린 축복을 거두어 가지 않아요.”
나는 이 사람이 그냥 조용히 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민주혁은, 살이 꿰뚫려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심장이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듯했다. 주먹을 쥐고 나무 창살을 세게 치자 턱, 하는 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용서를 빌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말이에요. 왜 용사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셨나요.”
그런데 잠깐. 말을 뱉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골짜기의 균열이 오래 방치돼서 마물을 처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사람을 원망했다. 이 사람이 연락을 빨리 취하지 않은 탓이었으니까.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게 마음이 아파서 이 사람이 싫었다.
‘내 원망의 방향은 정당했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서 원망의 대상을 찾았다.
그러면 나도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나는 미워하기만 했고, 당신은 직접 칼날을 빼 들었다는 것뿐. 차이는 그거 하나였다. 물론 아주 큰 차이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도, 나도, 정말 원망해야 할 건 서로가 아니었잖아요.”
본질적인 문제는 그거였다. 처음부터 세상에 균열이라는 게 없었더라면, 마물이라는 게 없었더라면. 그러면 용사들이 희생할 필요도 없다. 아이가 고통받을 필요도 없었다.
“잘못된 건 세상이잖아요. 원망해야 할 건, 이런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말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건 너무 편리한 말이 아닌가? 나는 지금 단순히 모든 책임을 세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일 뿐인가?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고여 있던 생각을 말로 뱉으니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저 모순으로 얼기설기 뭉쳐진 덩어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창살에 몸을 기대듯이 지탱했다. 생각을 마구 헤집어 둔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또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지럽게 흘러가는 생각 사이에도 한 가지 분명하게 보이는 사실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당신이 잘못했어요. 민주혁을… 사람을 죽이려고 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신관님. 부디 용서를….”
“누구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당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거니까. 내가 아니라 민주혁이 다쳤더라면, 혹시라도 민주혁을 잃었더라면 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는, 당신이 원망스러워요.”
이런 격한 감정을 토해 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풀썩 꺾였다. 다시 일어설 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악착같이 꼿꼿하게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푹 꺼지듯이 앉아서 양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내 바로 앞에 마을 대표가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이가 고통받았다는 건… 너무 괴로워요. 나조차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당신은 오죽했을까요.”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딱딱한 돌바닥의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서늘한 냉기가 올라왔다.
“아이에게는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눈가가 뜨거웠다. 투명한 물방울이 조그맣게 떨어져서 돌바닥을 적셨다.
내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과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사과한다고 아이가 고통받았던 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이한아.”
바로 옆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율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박율이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차분한 손길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한아, 형 잠깐만 보자.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아. 그런데….”
박율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띠링 하는 소리가 겹쳐 울렸다.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리자 눈앞에 파란 퀘스트 창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