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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73화 (73/150)

073화.

알고 있나요

한밤중에 눈을 뜬 선이한이 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나타나 있는 퀘스트 창을 가만히 바라봤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Ⅱ

제한 시간: 47분 16초

이게 2시간짜리 퀘스트였으니까 내가 기절한 지 한 시간 반 조금 덜 되게 지났구나. 퀘스트를 통해서 의식을 잃었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지경까지 왔다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등 뒤로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손은 이불 바깥으로 꺼내 배 위로 가지런히 포개어 놓은 채로 누워 있었다.

‘좋아. 일단 숙소로는 잘 돌아왔다.’

민주혁이 나를 잘 데려와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기절한 나를 깨워 주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절하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으니 안심이었다. 내가 일어난 것을 알면 민주혁도 걱정을 좀 덜겠지. 몸을 일으키려는데 내 이마를 짚어 오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일어났네요.”

라엔이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엔의 옆쪽으로 난 창에서 밤의 어두운 기운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열린 창문 안으로 여름밤의 더운 공기가 불어왔다.

책상 위에 등불이 켜져 있긴 했지만 빛을 연하게 조절해 둔 건지 얼굴이 보일 만큼 밝지는 않았다. 음영이 진 라엔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씩 휘날렸다.

라엔이 말없이 내 이마를 찬찬히 다독였다. 한참 동안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이제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요?”

울음기 스민 라엔의 목소리가 멍한 생각 사이로 느릿하게 파고들어 왔다.

“들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놀라지는 않았나요? 몸은 어때요? 지금 불편한 데는요?”

“다 괜찮아요. 라엔 형, 그런데 민주혁은 괜찮대요?”

내 말을 들은 라엔이 내 손을 꾹 쥐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라엔은 내 가슴 쪽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왜… 이한이 괜찮다는 말이 이렇게 아플까요.”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탓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말해 달라고 하기도 전에 라엔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혁은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시간이요?”

생각해 보니 민주혁이 내 어깨에 꽂힌 칼을 뽑을 때 손에 상처도 났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지금 민주혁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이한에게 미안해서 옆에 있을 수가 없대요. 깨어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푹 쉬라는 말도요.”

“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왜….”

민주혁의 얼굴을 보고 얘기를 좀 해 봐야 했다. 당장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는데 라엔이 누워 있는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쓸며 말을 이었다.

“이한. 마을 대표가 사실을 다 털어놨어요.”

막 깨어나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처음에 다들 위험한 장소에 있을까 봐 간 거였는데.

“형들은 괜찮아요?”

“그 장소가 위험한 건 맞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없었어요. 그리고 마을 대표도 그걸 알고 있었고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 처음부터 목표가 나랑 민주혁이었을 테니까요. 이유가 뭔데요?”

“그전에 하나만 말할게요. 이한이 다친 일에 대해 어떠한 것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어요.”

“그래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말에 이한이 마음 쓸 필요 없어요.”

당연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민주혁이 다칠 뻔했으니 나는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마을 대표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라엔이 내 몸을 천천히 일으켜서 등을 받쳐 줬다. 그리고 내 입가에 직접 유리잔을 가져다 대고 기울였다. 약초 향이 나는 미지근한 차를 조금씩 삼키며 라엔의 말을 들었다.

“마을 대표의 딸아이가 마물에게 당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대요.”

“읏…. 콜록.”

순간 찻물을 잘못 삼켜서 사레가 들렸다. 라엔이 유리잔을 재빨리 떼어 내고는 차분한 손길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너무 뜨거웠나요? 혹시 내가 너무 급했나요?”

“아니…, 아니요.”

“알았어요. 고개 젓지 말고요. 어지러워요.”

라엔이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는 턱으로 흘러내린 찻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어 냈다.

라엔이 말하는 딸아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치료했던 연서아라는 아이가 틀림없었다. 그러면 늦었다고 했던 건 그런 뜻이었나. 숨을 가다듬었음에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복수한 건가요? 우리가 늦었으니까요?”

“네, 맞아요.”

라엔이 가뿐하게 대답하며 내 뺨을 살짝 쓸었다.

“우리도 똑같이 당해 봐야 한다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기분을 느껴 봐야 한다고요.”

라엔의 손길이 소중한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어딘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건 성공했네요. 내게 너무 소중한…. 나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해서 눈앞이 캄캄했어요. 일어나 줘서 고마워요.”

음영 때문에 여전히 표정이 어떤지는 볼 수 없었지만 뺨을 타고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조명 빛에 반사되어 선명하게 반짝였다.

목소리에 스민 자그만 웃음 안에 묵직한 죄책감이 자리해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라엔을 덥석 끌어안았다. 라엔의 몸이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울림이 느껴졌다. 벅찰 만큼 깊게 들이켠 공기에는 달콤한 향이 담겨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서 라엔에게 매달리듯이 더 세게 껴안았다.

“라엔 형. 울지 마요.”

“울지 않아요. 이한이 무사히 깨어나 줬잖아요.”

“왜 라엔 형이 그렇게 마음 아파해요? 형 잘못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이한.”

“알잖아요, 형. 마을 대표가 복수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에요. 아이가 고통받았다는 건 슬프지만, 그래도….”

“이한. 숨 쉬어요. 다 괜찮아요. 천천히, 숨 깊게 들이켜 봐요.”

차분하게 나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기대어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라엔의 품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자기 몸 상태보다 다른 일에 생각이 더 복잡해 보이네요. 내가 지금 가장 마음 아파하는 건 이한이 다쳤다는 건데.”

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라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이한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봤어요.”

“…네.”

“고통받고 있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픈 건 당연해요. 그건 부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만 죄책감까지 감당하지는 말아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떨쳐 내요. 죄책감은 이한의 몫이 아니에요. 그걸 감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아무도 구해 내지 못한 용사라든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서 나도 모르게 밀치듯이 라엔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에요, 형.”

라엔은 내가 말을 더 잇기 전에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내 얼굴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서 나와 이마를 맞댔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내 뺨으로 톡 떨어져서 흘러내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있나요? 나의 가장 큰 죄책감은… 이한이 또 그렇게 자기를 내던졌다는 건데요.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한을 보는 게 견디기 어려웠어요.”

그렇게 말한 라엔이 쓰게 웃으며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제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희생하려고 하지 말아요. 약속해 줄래요?”

고통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고 시스템이 말했을 텐데 조금 힘들었다. 나는 몸을 내던진 적도 없고 희생 같은 걸 한 적도 없다. 아까 상황도 내가 본 미래에 따르면 원래는 민주혁이 다칠 일이었다.

그러니까 희생하고 있는 것도 몸을 던지고 있는 것도 당신들이었다. 나는 옆에서 그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가끔 손을 뻗는 것뿐이었다.

“내가 항상 하고 싶었던 얘기예요, 형.”

내가 힐러면 뭐 해. 당신들이 이렇게나 아파하는데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신들은 세상을 구하고 있는데, 나는 고작 당신들 네 명조차 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이 상태는 확인했어요?”

“아니요. 마을 대표에게 자백제를 마시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직 더 알아볼 게 있어서, 아이에게는 그다음에 바로 가 볼 거예요.”

“그러면 마을 대표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지하 감옥에요. 다들 거기 있어요.”

이렇게 작은 마을에도 감옥이라는 게 있구나. 하긴 사람이 사는 곳인데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죄짓는 사람이 없을 리가.

“마을 대표를 만나고 싶어요. 나도 갈래요.”

일단 연서아라는 아이가 마을 대표의 딸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정황상 확실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잠깐 망설이던 라엔이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이한도 묻고 싶은 게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 전에….”

라엔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천천히 걷어 내렸다. 어, 여름이어서 안에 아무것도 안 받쳐 입었는데.

“형, 왜요?”

옅은 어둠 속에서 선명한 금안에 내 모습을 또렷하게 담은 채 라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라엔이 내 어깨 쪽 옷을 완전히 걷어 내렸다. 쇄골까지 다 드러나서 조금 민망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이 손을 살짝 튕겨서 자그마하고 납작한 통을 만들어 냈다.

라엔은 그 안에서 반투명하고 하얀 연고를 손가락으로 살짝 덜어 내서 내 어깨로 바로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 살갗 위로 끈적한 연고를 문질렀다.

과일 향이 약간 섞인 듯한 진하고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살갗에 차갑고 미끈한 것이 닿는 느낌이 간지러워서 몸이 긴장됐다.

“흣…. 간, 지러워요, 형.”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자 라엔이 숨을 짧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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