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후회하지 말아요
민주혁의 표정을 살피려고 하는데 갑자기 상황에 맞지 않는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명한 퀘스트 창이 눈앞을 가렸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Ⅰ
성공 시: ‘민주혁의 확신’ 획득
실패 시: ‘기절 2분’ 페널티
제한 시간: 2분
뭐? 이게 뭐야. 잠깐, 정신 차릴 시간은 좀 주자.
「제한 시간: 1분 59초」
그러나 늘 그랬듯이 나에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 같은 게 주어질 리가 없었다. 제한 시간이 똑딱 흘러갔다. 사방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는 가운데서 내 눈앞만은 새파랬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상황이 정리되는 줄 알았더니 새롭게 헤쳐 나가야 할 상황이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시스템이 나에게 이래서는 안 됐다.
“선이한. 그거 건드리지 마.”
민주혁의 굳은 목소리가 생각을 깨웠다. 칼날을 뽑으려고 가져다 대던 내 왼쪽 손이 위로 휙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손목에 푸른빛이 칭칭 감긴 채 허공에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칼을 뽑아야 상처가 제대로 아물걸…?’
흔들리는 시선이 민주혁에게로 향했다가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민주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화난 것 같기도 한 일그러진 얼굴이 눈물 한 방울 없이도 우는 것처럼 보였다.
“어…. 이것만 금방 빼내면 되는데.”
“막 뽑으면 안 돼.”
“음, 지금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
“너 지금 목소리도 떨리고, 안색도….”
민주혁은 착잡하다는 것처럼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원래 상황은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법이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으니 안 괜찮아 보이는 것뿐이지 나는 괜찮았다.
민주혁이 이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내가 말을 이을수록 대답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점점 힘겨워지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달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괜찮을 거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잠깐 생각하던 민주혁은 내가 불안해할까 봐 걱정됐는지 말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고는 글자마다 짓씹는 듯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쪼그려 앉은 나를 바르게 자리에 앉혔다.
「제한 시간: 1분 27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 시간 안에 퀘스트를 성공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성공하지 못했던 라엔 퀘스트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꼼짝없이 기절이었다.
저쪽에서 마을 대표가 악을 쓰며 내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원망과 증오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민주혁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옆으로 손을 휙 내저었다. 순식간에 마을 대표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고요한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제한 시간: 54초」
일단 곧 기절할 테니까 민주혁에게 미리 말해 둬야 했다. 딱 2분, 아니 넉넉하게 5분 정도만 있다가 꼭 깨워 달라고.
“민주혁, 나….”
여기까지 말하는 순간 민주혁이 내 턱을 쥐고 다급하다고 말할 정도로 억센 손길로 입을 벌렸다.
“잠깐… 읍.”
민주혁은 어느새 허공에 조그만 유리병을 만들어 낸 상태였다. 민주혁이 그 안에 들어 있던 끈적한 액체를 내 입 안에 흘려 보냈다.
미처 입에 담지 못한 것이 턱을 타고 질척하게 흐르는 느낌이 났다. 칼에 찔린 오른쪽 어깨는 아프지는 않았지만 움직여지지 않아서 액체를 닦아 낼 수조차 없었다.
“진통제야. 삼켜.”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였다.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쓴맛이 나는 약도, 아직도 피가 흐르는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옷도 신경이 쓰여서 인상이 조금 찡그려졌다.
나를 바라보는 민주혁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혁은 어디 다친 건 아니었지만 고통이 묻어 나오는 표정을 보면 진통제는 꼭 민주혁에게 필요한 것 같았다.
「제한 시간: 38초」
퀘스트 창 위로 촉박하게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정하자. 내가 지금 이러면 안 됐다.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어쩌면 민주혁이 후회하고 있는 건 나를 이 자리에 데려온 일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걸 후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민주혁이 다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다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애써 눈을 부릅뜨고 민주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실 민주혁이 걱정할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민주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잊은 듯하지만 이렇게 큰 상처라면 저절로 치료될 것이다. 그걸 말하면 민주혁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지 않을까.
“야, 진정하… 으읍.”
아니, 나 말 좀 하자. 민주혁이 내 입에 하얗고 두꺼운 천을 물렸다. 천에서 보송하고 시원한 바람 향기가 나는 듯했다.
좋은 향이었지만 지금은 이걸 문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빼낼 손이 없었다. 천이 너무 두껍기도 하고 민주혁이 깊숙이 물려 놓아서 뱉어 낼 수도 없었다. 그저 읍, 하는 소리만 나왔다.
「제한 시간: 21초」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민주혁.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곧 기절할 건데 몇 분 후에 꼭 깨워 줄래? 눈빛으로 그런 마음을 보내며 간절하게 민주혁을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다.
내가 기절한 다음에 시스템이 깨워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또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을지 몰랐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선이한. 미안해. 미안….”
민주혁은 아까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서 민주혁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잠깐, 민주혁, 뭐 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지금 민주혁의 손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스며든 붉은 피가 선명하게 빛났다. 민주혁은 내 어깨에 박힌 칼날을 손에 꾹 말아 쥐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거지?
손잡이가 없어서 칼날에 손바닥이 베이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손등에 핏줄이 솟아 있었다. 민주혁은 나처럼 고통 면역도 아닐 텐데.
민주혁이 가쁘게 호흡했다. 흔들리는 숨소리 사이로 미안하다는 말이 쉴 새 없이 뱉어졌다. 민주혁이 미안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는데도.
입에 물린 천만 좀 빼 주면 나는 멀쩡하다고 바로 말할 수 있었다. 제발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지만 민주혁은 천을 빼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제한 시간: 7초」
당장이라도 민주혁을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에 손끝에 힘을 주어 봤으나 당연하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 기절하면 너 치료도 못 해 줘. 입이 틀어막혀 말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민주혁이 기도문을 외듯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것처럼 나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미안해. 금방 끝낼게.”
그 말과 동시에 어깨에 박혀 있던 칼날이 쑥 빠지는 느낌이 났다.
「제한 시간: 0초」
그리고 제한 시간도 끝났다. 새로운 퀘스트 창이 눈앞에 떴다.
<필수! 퀘스트> ‘민주혁-후회하지 말아요!’Ⅱ
성공 시: ‘민주혁의 확신’ 획득
실패 시: ‘고열 2시간’ 페널티
제한 시간: 2시간
숫자가 줄어들며 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한 시간: 1시간 59분 59초」
눈이 감겼다. 힘이 빠져서 민주혁에게로 몸을 풀썩 기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곧 기절할 거라는 말만은 꼭 전했어야 했는데.
나는 괜찮으니까, 민주혁이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
푸욱!
살이 꿰뚫리는 선명한 소리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민주혁의 귓가에 깊숙하게 꽂혔다.
‘뭐야, 지금 왜…?’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사방을 조여 오던 덫 마법을 해제했고, 뭔가가 날아왔고, 선이한이 나를 밀쳤다. 저편에서 느껴지는 마을 대표의 기척에 반사적으로 포획 마법을 썼다. 그리고….
‘내가 늦었다.’
내 눈앞에, 땅바닥에, 피가 흘러 고이고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두려움에 굳어 버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선이한의 뒤쪽으로 태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쏟아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선이한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새하얀 옷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노을빛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에.
선이한의 오른쪽 어깨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다. 선이한은 입술을 짓씹은 채 손을 그쪽으로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칼날을 뽑으려는 것처럼.
이명이 들리듯 귀가 먹먹했다. 속이 뜨거워서 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입을 비집고 나왔다.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곧 선이한이 내 앞에서 무너지며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선이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선이한의 시선이 어딘가 비껴간 듯이 보였다. 출혈이 너무 커서 초점이 맞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칼날을 쥐려는 손을 서둘러 막고, 저편에서 악을 쓰는 마을 대표의 입을 침묵 마법으로 틀어막았다. 선이한이 먼저였다. 저 인간을 보는 건 그다음이다.
급하게 진통제를 소환했다. 이걸로 될까? 아니, 안 되겠지. 그래도 이거라도 먹여 둬야 했다. 칼을 뽑아야 했으니까.
‘선이한이 버틸 수 있을까?’
벌써 입술에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재빨리 약을 입에 흘려 넣었다. 선이한이 많이 고통스러운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애써 약을 삼켰다.
선이한의 이런 모습을 보니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 기분으로 선이한의 입에 천을 물리고 어깨에 단단하게 박힌 칼을 쥐었다.
손에 그대로 와 닿는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나를 베어 내는 건 눈앞에 보이는 식은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칼이 내 몸에 그대로 박혔더라도 이 정도로 괴롭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이한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애원하듯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물빛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겼다. 아까보다 초점이 흐려 보이는 걸 보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읍, 으읍!”
선이한이 뭐라고 다급하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 나는 그런 말밖에 못 했다. 무서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칼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늦어질수록 힘들어지는 건 선이한이다.
“미안해. 금방 끝낼게.”
선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흔들리는 시선을 나에게로 맞췄다.
그리고 칼날을 빼내는 순간, 선이한의 눈이 한순간에 크게 뜨였다. 선이한은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채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아. 깊은 절망은, 숨 쉬는 법을 잊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