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쉽지 않겠네
“출발합시다. 지도를 한 번만 더 보여 주십시오.”
민주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앞으로 흰색 지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창 안으로 들어온 붉은 노을이 민주혁의 등 뒤로 어른거렸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 위로 손을 말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섣불리 민주혁을 막을 수는 없어.’
지금 민주혁이 안 가면 나머지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미래시에서 본 민주혁의 옆에 누군가 있었던 거라면 민주혁이 가지 않을 경우 그 누군가가 다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지금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나아.’
나는 흐릿하게라도 상황을 알고 있으니 민주혁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면 됐다. 푸른빛이 반짝일 때 민주혁을 안전한 곳으로 밀치면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다치는 일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재빨리 민주혁의 팔을 감싸서 잡았다. 단단한 팔뚝이 손안에 감겨 왔다. 민주혁은 지도의 좌표를 확인하고 막 출발하려는 듯하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과 시선을 맞추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
“안 돼.”
그러나 민주혁도 나 못지않게 확고했다. 내 손을 매정할 만큼이나 망설임 없이 곧바로 떼어 낸 민주혁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민주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강조하듯 한 번 더 말했다.
“내가 지금 마나가 부족해서 안 돼. 여기에 있어. 혹시 형님들이 나보다 일찍 오면 바로 말 전해 주고.”
아까 다 회복됐다고 한 건 그냥 한 말이었나? 그렇다면 지금 민주혁이 가는 걸 말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세차게 돌아가는 어지러운 생각 사이로 마을 대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관님이시군요. 마법을 아예 못 쓰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 생각하던 마을 대표가 말을 이으며 내 쪽으로 손을 천천히 뻗었다.
“신관님께는 제가 텔레포트 마법을 써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아, 감사합….”
“아닙니다. 이 친구는 여기 있을 겁니다.”
민주혁이 내게로 향하는 마을 대표의 손을 쳐 내고는 내 어깨를 저만치로 밀었다. 내게로 흔들림 없이 시선을 맞춰 오는 민주혁의 갈색 눈동자가 쏟아지는 노을빛에 날카롭게 빛났다.
“민주혁. 지금 내가 억지 부리는 게 아니잖아. 위험한 지역이라면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나아.”
“네 생각은 안 해? 위험한 지역이니까 안 된다는 거야.”
“용사님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마을 대표님.”
내가 마을 대표 쪽으로 걸음을 옮겨서 그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자, 민주혁이 내 뒤쪽 옷깃을 잡아채며 자기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갑자기 당겨진 탓에 중심을 잃고 민주혁에게 안기듯이 기대자 단단한 몸이 등 뒤로 닿아 왔다. 내 어깨를 강하게 말아 쥐는 뜨거운 손길이 느껴졌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아니, 너 마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주혁이 숨을 깊게 내쉬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 여기 있으라고 한 말이었어. 같이 갈 거면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선이한. 형님들 연락 닿으면 바로 올 거니까.”
“알았어.”
데려가 준다니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민주혁이 내게로 고개를 숙여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내 귓가를 뜨겁게 스치고 지나갔다.
“텔레포트는 아무에게나 맡기는 거 아니야, 바보야.”
아, 그렇구나.
곧 민주혁과 마을 대표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하기 전에 신호를 주고받았다.
후욱.
센 바람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사방이 온통 안개로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골짜기와 가까운 장소인 듯했다. 옅은 노을이 나뭇잎 위로 덮여서 파릇한 본연의 색을 죽이고 있었다.
민주혁과 마을 대표는 잠깐의 쉼도 없이 곧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옆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 숨이 차서 폐가 터질 것 같기는 했지만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만했다.
“어느 정도까지 접근하면 위험한 겁니까.”
“아직 조금 더 가야 합니다.”
둘 다 목소리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벅찬 호흡을 이어 나가느라고 정신이 없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끼어들 말이 없기도 했고.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했었다. 그렇지만 당장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뜀박질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산소가 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머리가 멍한 것 같았다.
옆에서 민주혁이 손을 가볍게 튕기자 흰빛이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펑 터졌다. 지난번에 박율이 이걸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급할 때 사용하는 신호였다. 그렇지만 골짜기가 워낙 넓고 안개가 가득 차 있어서 잘 보일까 의문이었다.
민주혁이 이를 꾹 깨무는지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손을 한 번 더 하늘로 뻗어 올리자 곧 푸른색 빛이 두어 번 터졌다.
“돌아오는 신호가 없어. 멀리 있는 거면 다행이고.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민주혁. 허억, 정신 차려. 일단, 헉, 가자. 가서 생각하자.”
숨을 최대한 고르며 말하는데, 순간 달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두 명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어?”
뒤쪽에서 들리는 우웅, 하는 소리가 내 목소리와 겹쳐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니 뒤로 푸른 막이 생겨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민주혁은 이미 몸을 틀어 막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파직.
민주혁이 쏘아 낸 빛이 일렁이는 푸른 장막에 튕겼다. 그 막 바깥에 마을 대표가 서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민주혁이 오른팔로 나를 끌어당겨 안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막이 우리 주위를 넓은 범위로 둘러싼 채 일렁이고 있었다. 퍼져 있던 뿌연 안개가 푸른 막에 가로막혀 슬금슬금 안쪽으로 모이며 시야를 가렸다. 연한 노을만이 막을 통과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식은땀이 턱을 타고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너무 다급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생각이 멈춘 듯 이어지지가 않았다. 손을 뻗어서 푸른 막 위로 가져다 댔지만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차단 마법인가?’
송하견이 말했던 게 기억났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통과할 수 없는 마법.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마을 대표는 차단막 뒤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일렁이는 막 때문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단막에 막혀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용사님들.”
뭐가 늦어? 옆에서 민주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입니까. 당장 푸십시오.”
그러나 마을 대표는 이미 눈앞에서 보이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마을로 돌아간 듯했다.
민주혁이 두리번거리며 막의 범위를 가늠했다. 방해되지 않도록 민주혁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옆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민주혁, 이거 차단 마법이야?”
“…비슷한 거야.”
“텔레포트로는 못 나가?”
“어. 일단 이걸 풀어야 돼.”
민주혁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자기도 긴장하고 있으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푸른 막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민주혁은 막에 손바닥을 댄 채 눈을 감고 집중했다. 민주혁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막의 경계 쪽으로 점점 안개가 몰려들었다. 바깥쪽에서도 안쪽에서도 우리 주위를 동그랗게 감싸며 차곡차곡 쌓여서 시야를 서서히 가렸다.
‘잠깐만.’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민주혁이 공격당하는 건 마물을 상대하는 중이 아니라….
내 생각이 채 이어지기 전에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아, 이제 됐다.”
민주혁의 앞으로 푸른빛이 반짝 빛나는 것과 동시에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푸른 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막 주위로 몰렸던 안개가 한 번에 흩어지면서 주변이 선명하게 보였다. 민주혁의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노을이 그 위로 낮게 내려앉았다.
더 생각할 것 없이 민주혁이 있는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민주혁이 나보다 체격이 크기에 온 힘을 다했다. 민주혁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푸욱.
살갗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몸을 피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조금 늦었다. 뚫린 부분에서 심장이 맥동하는 것처럼 진동이 쿵쿵 울렸다. 오른쪽 어깨에서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려 옷을 빠르게 적셔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자 마을 대표가 파란빛으로 이어진 밧줄 같은 것으로 꽁꽁 묶여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민주혁이 묶어 놓은 듯 보였다. 행동이 재빨랐다. 그러나 민주혁은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로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갈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혁은 넘어져서 놀란 것 말고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여서 안심이었다.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적어도 막 안에 갇혔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건 내 실책이었다.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워서 깨닫는 게 늦었다. 설마 사람에게 공격당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내가 그를 조금만 더 늦게 밀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후….”
숨을 깊게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우리를 감싸던 막도 해제됐고 마을 대표도 붙잡아 뒀으니 이제 텔레포트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야, 이제 가자. 민주혁에게 그렇게 말하려다가 고개를 돌려서 내 오른쪽 어깨를 슬쩍 봤다.
단도처럼 생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목 바로 아래 어깨선을 뚫고 박혀 있었다. 미처 다 꽂히지 못한 매끈한 날이 노을에 비쳐서 날카롭게 빛났다.
손잡이도 없이 양쪽 모두가 칼날이었다. 이런, 빼내기도 쉽지 않겠네.
‘그래도 칼날을 빼긴 해야겠지?’
큰 상처는 저절로 치료되는 듯했지만 칼날이 박혀 있는 상태로 아문다면 조금 문제가 있었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내려서인지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입술을 꾹 깨물어 멍한 정신을 깨우고 손을 칼날 쪽으로 가져다 댔다.
그때 주저앉아 있는 민주혁에게서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씨발, 왜 항상….”
떨리는 목소리였다. 울음기가 스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민주혁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민주혁, 잠깐만.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민주혁의 앞으로 급하게 쪼그려 앉았다. 이제야 알았다. 나는 민주혁을 완전히 구해 내지 못했다. 내가 다친 이상 민주혁은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자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미안한 마음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근데 나는 지금 정말 아무렇지도 않거든. 그러니까… 민주혁? 내 말 듣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