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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69화 (69/150)

069화.

당분간만

상태 창의 글자에 동의하자 연서아의 주위로 푸른빛이 넓게 퍼졌다. 연서아의 살갗에 물든 새까만 면적이 점차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푸른빛이 내게로 훅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말끔해졌다.

허리를 숙여서 연서아의 얼굴로 귀를 가져다 대자 고른 호흡 소리가 들렸다. 혈색도 돌아온 걸 보니 다 치료된 것 같았다. 문제가 없다면 곧 깨어날 것이다.

몸을 틀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아이의 작은 발목을 감싸 쥐고 다른 보상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했다.

“형아? 왜요?”

아이의 목소리 앞으로 상태 창이 떠올랐다.

「‘용사 외 가져오기(1회)’ 사용하시겠습니까?」

아이의 발목에 퍼졌던 빛무리가 내게로 들어오면서 검은 면적이 흔적도 없이 말끔해졌다. 나는 어디가 불편하다거나 하지 않은데, 아무런 이상도 없는 건가? 내 발목 쪽의 옷을 걷어 보려고 할 때.

“…읏, 콜록.”

소매로 입을 막았다. 비릿한 맛이 났다. 바닥까지 더럽히지는 않았지만 클린 마법을 쓴 지 얼마나 됐다고 소매가 또 붉게 물들어 갔다.

그런데 가져오기인데 피를 토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 거지? 그런 내 의문에 응답하듯 눈앞에 곧바로 상태 창이 떠올랐다.

「‘간헐적 각혈’ 페널티 적용 중입니다.」

아니… 뭐라고? 웃기지 마. 애가 놀라잖아. 피 토하는 걸 두 번이나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의 동그란 눈에 벌써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스템이 정말 신의 힘인 거라면 신은 무척이나 무정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아이 앞에서 이런 페널티를 줄 수가 있어. 정말 페널티 때문인 건 맞겠지? 하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좀 찜찜하긴 했다.

“혀, 형아.”

“괜찮아. …잠깐만.”

내 옷을 슬쩍 걷어서 확인해 보니 발목 부근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서 새하얀 빛이 둥그렇게 바깥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점차 검은 면적이 줄어 가다가 곧 완전히 사라졌다. 발목을 돌려 보니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이건 내가 죽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저절로 치료됐다. 게다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흰색 빛이었다. 내 몸에 직접적으로 마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에 반응이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페널티가 언제 멈출지 모르는데 아이의 앞에서 하염없이 피를 뱉고 있을 수는 없으니 간신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형이, 했다는 건. 비밀로, 해 줄 거지?”

“네, 흐윽, 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아, 믿을 만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품에 뭔가 딱딱한 것이 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맞다, 아까 받은 사탕이 있었지. 아이의 얼굴만 한 막대 사탕을 조그만 손에 쥐여 주고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이제 눈앞에서 피를 토하는 사람도 사라졌으니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여전히 세상은 평화로웠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노랗게 내리쬐는 햇살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멍하니 걸어서 샛길로 들어섰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벌레 우는 소리가 찌르르, 하고 들렸다. 바싹 마른 흙바닥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보상이 남아 있지 않아.’

마음이 복잡했다. 이제 나는 용사 외의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었다.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어떻게 하지?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지?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흙바닥에 작은 점 같은 개미가 줄을 지어서 기어가고 있었다. 그 주위로 내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 뚝 떨어졌다.

그걸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새로운 상황에서는 또 새로운 해결책이 생길 터였다. 이제 페널티가 거의 멈췄으니 클린 마법으로 옷과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서 모두에게 이걸 얘기해야 해.’

아이는 이 마을에 마기에 물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더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이가 모르는 상황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싱숭생숭한 마음처럼 어쩐지 발걸음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목조 건물 앞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써 이 장소가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익숙한 공간에 들어오니 방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모두 한순간의 꿈결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민주혁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들어오라는 말없이 방문이 바로 열렸다. 민주혁의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나 보다.

민주혁은 머리에 팔을 베고 침대에 누워서 허공에 손짓하며 뭔가를 쓱쓱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오자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야, 오래 걸렸네. 마을은 잘 둘러보고 왔…어…?”

민주혁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지금 여기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말을 잇던 민주혁의 표정이 굳었다. 민주혁이 침대에서 일어서서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내 얼굴이 뭐? 더워서 조금 빨개진 것 말고는 아무 이상 없다.

“더워서. 아무튼, 여기 마을에 신께 기도드릴 건물은 없대.”

“어…. 건물은 없을 것 같았어.”

민주혁이 손을 살짝 튕겼다. 시원한 바람이 내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몸을 감쌌다.

“너 이제 마법 써도 괜찮은 거야?”

“지금은 괜찮아. 근데 진짜 무슨 일이었는데, 선이한.”

“아무 일도 없었어.”

민주혁의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몸이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피곤한 걸 보니 나는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따가 형들도 다 오면 할 얘기가 있어.”

천장을 바라본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얘기하는 편이 나았다. 나도 말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민주혁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힘들 테니까.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누군가 피해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마물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아파했다는 말을 꺼냈을 때, 당신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잖아.’

그럼에도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용사들은 끊임없이 위험에 뛰어들고 있고, 그럼에도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갑자기 세상이 무척이나 버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침대가 풀썩 꺼졌다. 민주혁이 내 옆에 앉아서 내 머리칼을 살살 쓸어 올렸다. 그리고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미리 해 봐. 들어 줄게.”

눈동자만 굴려서 민주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 주위를 감싼 시원한 바람 때문인지 나와 가까이 앉은 민주혁의 갈색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미래시로 봤던 민주혁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마음이 애틋한 것 같기도 했고,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민주혁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박율도, 송하견도, 라엔도. 당신들을 생각하다 보면 가끔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었다. 당신들을 구하고 싶었다.

이건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는 그런 차원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마음인 것 같았다. 명확히 어떤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주혁.”

“어.”

“나랑 같이 있어 줘. 당분간만.”

“왜 당분간만?”

민주혁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같이 있을게.”

“약속이야. 어디 갈 때 나한테 꼭 얘기해 줘.”

“…무슨 일 있었지, 너.”

민주혁이 내 안색을 살피려는 것처럼 서서히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나무 계단을 세차게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형님들이 벌써 올 리가 없는데.”

민주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쾅쾅.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혁이 손을 흔들자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중년의 남자가 옷이 잔뜩 흐트러진 채로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더니 한순간 눈을 크게 떴다.

“한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민주혁이 어느새 그의 앞에 서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마을 대표입니다. 용사님이십니까?”

“맞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오셨습니까.”

마을 대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숨을 고르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동료 용사님들께서 골짜기로 가신 것 아니십니까? 알아 둬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위험한 장소예요. 그쪽 부근으로 가시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을 대표는 손을 살짝 흔들어서 허공에 지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한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여기, 당장 출발하셔야 합니다. 이미 그쪽으로 가신 거라면 지원이 필요할 겁니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가시죠.”

“일단 진정하십시오. 가더라도 왜 위험하다는 건지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민주혁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당황한 듯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대표는 숨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말을 쏟아 내듯이 급박하게 이었다.

“마물이 뭉쳐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라요. 멀리서 보면 평범한 흰 구름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면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어서 사람을 공격합니다. 알아차렸을 때는 늦습니다.”

민주혁이 긴장하는 것처럼 몸을 굳혔다. 마을 대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가 갔을 때가 한참 전이었으니 지금은 시간이 흘러 상황이 더 심각해졌을 겁니다. 용사님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이제야 전해 들어서 급하게 왔습니다.”

민주혁이 주먹을 꾹 말아 쥐는 것이 보이자 나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일단은 그 장소 근처에 용사님들이 계신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안 계시다면 그 장소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을 꼭 전해야 해요.”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져서 마을 대표가 가만히 서 있는데도 꼭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서요, 용사님. 소중한 동료분들인데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체될수록 위험하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목에서 녹슨 것처럼 끼긱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동그랗고 선명한 태양이 보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이었다. 노을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방 안이 연한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망할. 설마, 미래시에서 봤던 순간이 바로 지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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