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제대로 말해
송하견이 나무 창문을 살짝 밀어서 열었다. 열린 창으로 더운 밤공기가 훅 불어왔다. 풀벌레 소리가 조그맣게 들리고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다.
“…먼저 누워.”
“하견 형은요?”
“…나중에.”
어, 그러면 좀 곤란한데. 한 침대에서 자야 퀘스트를 깰 수 있었다.
“같이 자면 안 돼요?”
송하견이 창밖을 향하던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방 안의 정적 사이로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조용하게 덮였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해야 하나?
“형이랑 자고 싶어요.”
송하견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송하견의 긴 머리칼이 여름 바람에 휘날렸다.
그리고 내가 눈을 잠깐 감았다 뜬 사이에 송하견은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송하견을 올려다봤다. 이곳이 낯선 장소여서 그런지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곧 내 몸이 번쩍 들렸다. 마법을 쓴 건지 송하견이 직접 들어 올린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어느새 침대 위로 옮겨져서 등을 대고 누운 채였다.
삐걱,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내 위로 올라온 송하견이 나와 눈을 맞췄다. 내 얼굴 바로 옆으로 단단한 팔이 박혔다. 짙은 보랏빛의 머리칼이 아래로 흘러내려 내 볼을 간질였다.
방금 소리를 들어 보니까 침대가 좀 허술한 것 같은데, 여기서 정말 두 명이 자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송하견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대로 말해.”
“뭐를요?”
“무슨 뜻인지.”
내가 말을 좀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나? 그렇지만 송하견보다는 자세하게 말하는 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뭐, 그래도 퀘스트를 빨리 성공해 두는 편이 나으니까 한 번 더 말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는 송하견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무슨 뜻인지 제대로 풀어서 다시 말했다.
“하견 형이 안 잘까 봐요. 같이 잤으면 좋겠어요.”
송하견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말없이 내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삐걱,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의미를 잘 전달한 것 같은데 송하견은 왜 몸을 일으킨 걸까.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송하견은 침대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채였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송하견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평소처럼 느릿한 어투였다. 아니, 말은 그렇다고 하면서 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지?
“형, 지금 안 자요?”
“자, 선이한.”
“아예 안 잘 건 아니죠?”
“…응.”
멍한 목소리였지만 일단은 확답을 얻었으니 안심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퀘스트가 완료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송하견이 내 앞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닿아 오는 시원하고 편안한 손길에 눈을 잠깐 감은 순간 송하견은 내 옆에서 멀어졌다. 의자가 탁 밀리는 소리가 들린 걸 보니 책상 앞에 앉은 듯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몸을 굴려서 벽 쪽에 밀착했다. 눅진한 나무 냄새가 났다. 이따가 송하견도 자러 올 테니까 자리를 만들어 둬야 했다.
‘베개도 하나네.’
송하견이 어련히 소환 마법을 쓸까 했지만 혹시 몰랐다. 옆쪽으로 베개를 빼 두고 고개를 뉘었다. 머리만 대면 금방 잠드니까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
천장에 주황색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보습이 보였다. 움직일 때마다 얇은 천 같은 이불이 사락거리며 시원하게 몸을 스쳤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오는 듯했다.
“뭐 해요?”
내 목소리가 적막을 파고들었다. 송하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궁금해요, 형.”
“…그냥. 준비.”
고개를 살짝 올려 보았다. 송하견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주위로 빼곡하게 떠올라 있는 하얗고 네모난 지도와 손에 들린 노트를 번갈아 보며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안 피곤해요?”
“…안 피곤해. 그리고 내일 일찍 출발할 거야.”
그 말은 내가 빨리 잠들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눈을 꾹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까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펜촉이 종이 위로 지나가는 사각거림은 평소보다 작았지만 선율처럼 물 흐르듯이 차분하게 들렸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가 안정감 있었다.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며 잠이 점점 쏟아졌다.
“형. 나 그거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뭐를.”
“펜…… 형이 글씨 쓰는 소리요.”
“…응.”
사각, 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일 일어나면, 나는 없을 수도 있어.”
그런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어, 왜요? 하고 물어봤던 것 같다. 대답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이 뚝 끊겼다.
◇
눈을 떴다. 파란 아침 하늘이 눈앞의 나무 천장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 정가운데에 바르게 누워서 이불을 어깨까지 꼼꼼하게 덮고 있는 채였다. 머리가 푹신했다. 베개도 잘 베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이 차츰 깨어났다. 눈앞에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창이 떠 있지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퀘스트 창.’
그렇게 생각하자 그제야 파란 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함께 보내는 밤’ 진행 중!
밤을 함께할 용사님, 용사 송하견
퀘스트가 아직 안 끝났다니! 송하견, 잠을 안 잔 거야? 어제 내게 했던 대답은 대체 뭐였던 거지? 아니면 그냥 침대로 안 올라온 것뿐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을 헤집고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더운 공기가 얼굴을 훅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방 안과 마찬가지로 바깥마저 소란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낯선 장소에서 홀로 맞는 적막한 평화. 갑자기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이곳에 나만 남은 것 같았다.
그때 바람에 종이 스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쪽지?’
책상의 전등 아래에 작은 종이가 눌려 있었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쪽지에는 조금 흘려 쓰긴 했지만 반듯하고 곧아 보이는 필체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옆방에 민주혁. 깨면 찾아가.」
송하견은 말만 짧게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짧구나.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간 걸까.
민주혁의 방문 앞에 섰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혹시 자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급한 게 아니니까 나중에 찾아와도 될 것 같았다. 노크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리는데,
“들어와.”
안에서 민주혁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내가 이렇게 티 나게 움직이는 사람인데, 신전에 있을 때 신관님들은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나를 모른 척하신 걸까. 그 정도의 노력이라니 경이로울 정도였다.
달칵.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 있던 민주혁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민주혁은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일찍 깼네.”
“너는?”
“나는 더 일찍 깼고.”
그런 말은 안 통한다. 민주혁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는 걸 보니 피곤한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민주혁이 변명하듯이 살짝 웃었다.
“형님들은 다 나갔고, 여기에는 너랑 나밖에 없어.”
“민주혁. 너 괜찮은 거 맞아?”
“어. 저기 의자 끌어와서 앉아 있어.”
방문을 닫고 민주혁이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기 침대에서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곳 침대는 아무래도 혼자 써야 하는 침대임이 확실했다.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옆에 앉은 나를 민주혁이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불을 천천히 끌어당겨서 고치처럼 자기 몸을 감쌌다.
그 커다란 키로 몸을 아무리 웅크린다 한들 결코 작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만으로도 내가 옆에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잘 보이는 듯했다. 민주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여기로 와?”
“너 상태 좀 보려고.”
“저쪽 가서 앉아. 나 건드리지 말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굳어 있는 민주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민주혁의 이런 반응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했다. 나 말고 자기한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치료하기를 써 봐야 할 것 같았다.
민주혁에게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민주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망설이는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아니, 미안. 내가 지금 좀 무리해서. 조금만 도와줄래?”
주먹을 말아 쥔 민주혁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정말 힘든가 보다. 민주혁이 이러는 건 처음 봤다. 민주혁의 큼직한 손 위로 재빨리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잔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파란빛이 내게로 들어오며 치료하기 막대 게이지가 점점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직 여백이 꽤 되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피를 뱉을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해야 할 텐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야, 민주혁. 괜찮아? 어디가 안 좋았던 건데.”
지금 보니 민주혁은 한 손을 자기 명치께로 가져다 대고 있었다. 민주혁이 고개를 푹 숙인 자세 그대로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이 들렸다.
“…살 것 같아.”
이제 괜찮긴 한가 보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내게 얼굴을 문대던 민주혁이 돌연 벌떡 고개를 들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딱 맞았다.
“너는 괜찮아, 선이한?”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어.”
민주혁이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는 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내 안색을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민주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 저번에 라엔 형님 마나 고갈 치료했을 때도 한참 앓았잖아.”
그런 적은 없었다. 한참 동안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을 뿐이지. 아니, 잠깐만.
“너 지금 마나 고갈됐던 거야?”
민주혁이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려서 이마에 자기 손등을 대 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마나가 고갈된 건 아니고, 그냥 좀 무리하게 써서 상태가 별로였거든.”
아, 하긴. 마나 고갈로 인한 상태 이상은 치료하기로는 낫지 않았지. 급한 마음에 이 생각을 미처 못 했다.
“저번에 라엔 형님은 마나를 완전 끝까지 쓰셨던 거고. 어떻게 그렇게 다 쥐어짜 내셨는지 모르겠어.”
마나양도 많으실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말을 잇는 민주혁에게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어쩌다가 그런 건데?”
“해야 될 게 좀 있어서.”
민주혁이 내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민주혁은 잠깐을 그렇게 있다가 그제야 안심했다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몸은 안 떨리네. 열도 안 나고. 다행이다.”
“어. 그래서 너는 왜 그랬던 건데.”
민주혁이 자리에 풀썩 누웠다.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를 벤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