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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65화 (65/150)

065화.

보조하는 역할이니까

나도 따라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묶어 뒀던 마물이 증발하듯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텅 비어 버린, 마물이 있던 자리를 파란빛으로 감싸던 민주혁의 포획 마법이 파삭 부서졌다.

“예상은 했는데 조금 곤란하게 됐어. 이렇게 마물이 스며들었을 경우에는 핵을 찾아서 검을 박아 넣어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물이 제대로 된 형체도 없이 안개 형태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박율의 말투는 마치 상황을 멀리서 분석하는 것처럼 평탄하게 들렸다. 아무리 내가 치료를 해서 이제 상태가 멀쩡해졌다고 해도, 방금 마물에 공격당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담담했다.

“…박율 형. 필요한 건?”

송하견은 당장이라도 물약이 든 플라스크를 소환하려는 듯 보였지만 박율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이한아. 회복하기까지 조금 걸릴 뻔했거든.”

박율이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가자. 확인은 다 된 것 같네. 그렇지?”

박율이 모두에게 동의를 얻듯 한 번씩 눈을 마주했다. 다들 박율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눈치였으나, 박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발 더 빨랐다.

“자세한 건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서 박율은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내 어깨를 감싸는 라엔의 손길이 느껴졌다. 곧 강한 바람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까 떠나왔던 목조 건물이었다. 어느덧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무 냄새가 났다. 어쩐지 그 아래로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옅게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1층에 요리하는 공간이 있어서 그런가. 아까는 몰랐는데 밖에 나갔다가 오니 새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박율은 1층의 둥그런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채였다. 허공에 흰색 빛으로 떠올라 있는 지도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박율은 우리가 들어오자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왔구나.”

“안 쉬고 바로 얘기해도 괜찮으십니까?”

“그래. 이한이가 치료했으니까. 해야 할 얘기가 많으니까 일단 앉아 보자. 여기 좀 봐, 형이 마물에 핵이 없다고 했었지.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면….”

지도 위로 골짜기의 단면도 같은 것이 겹쳐졌다. 움푹 파인 바닥과 그 바닥 면에 박혀 있는 자갈 같은 것들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어느새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박율은 상황을 이렇게 넘기는 것에 익숙한 걸지도 몰랐다. 박율이 단면도를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물의 본체는 골짜기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아. 구름에 스며든 건 마물의 일부야.”

“그래서 그 안에서는 핵을 찾을 수 없었던 거네요, 리더 형.”

“맞아. 핵을 찾으려면 구름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공격해 오는 패턴이 까다로워.”

“…마기도 짙고.”

“균열이 열리고 오래 방치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 뚫고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뒤틀린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방법은 없나.’

그 안개 같은 것만 없어도 마물을 처리하기가 좀 수월해질 것 같은데. 공간이 뒤틀린 것이 신의 힘 때문인 게 맞다면 그 힘을 거두어 가 달라고 말씀드릴 순 없을까?

여기에 아마 신전처럼 큰 건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을 모시는 작은 건물이라도 있으면 그 안에서 기도를 드려서 말을 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는 밖에 나와 보는 것이 처음이어서 잘 모르지만, 마을이니까 어쨌든 작은 건물이라도 신을 모시는 곳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박율의 말이 이어졌다.

“마기가 목 안까지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어. 주의해야 해. 방어는 주혁이한테만 맡기지 말고 각자 신경 쓰고 있자.”

“네? 리더 형, 지금은 괜찮….”

라엔의 다급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의 부엌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흠칫 떨렸다. 여기엔 우리밖에 없을 텐데? 부엌 안쪽에서 뭔가가 둥실 떠올라서 이쪽으로 찬찬히 날아왔다.

‘접시?’

그 위에는 동그랗게 구워진 팬케이크가 각각 쌓여 있었다. 방금 완성됐는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고소한 향기가 났다. 그 접시는 우리 앞에 하나씩 놓였다.

설마 박율이 아까 오자마자 마법으로 만들어 둔 건가. 앞에서 박율이 손을 딱 튕기자 탁자 중앙에 커다란 버터가 생겨났다. 그 버터는 조각조각 저절로 잘려 팬케이크 가장 꼭대기에 다소곳이 놓이고는 서서히 녹아내렸다.

“먹으면서 얘기하자.”

박율의 말을 들은 라엔이 잠깐 생각하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라엔이 우유를 유리잔에 따라서 접시 옆으로 각각 놓았다. 박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한아, 네가 치료하니까 금방 나아졌거든. 주의하긴 하겠지만 이번에는 마물을 상대하기가 좀 까다로울 것 같아서, 잘 부탁할게.”

“네, 율이 형.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말고 꼭 필요할 때만. 위험해 보이면 나서지 마.”

“맞아, 선이한.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고 있어. 내가 최대한 잘해 볼 테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부상이라는 건 없으니까. 게다가 다들 위험을 감수하고 앞장서서 싸우는데 나만 뒤로 빠져서 몸을 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대답은 해야 했으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던 박율이 살짝 웃으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표정을 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네.”

그럴 리가. 나는 얼굴에 생각이 드러나는 편이 아니다. 그래도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접시 위로 넓적한 유리병이 생겨났다. 병의 표면에 붉은색의 나뭇잎이 그려져 있었고 안에는 옅은 갈색빛이 도는 투명한 시럽이 담겨 있었다. 병이 기울어지며 시럽이 팬케이크 위로 주륵 흘러내렸다.

“사실 이한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이기도 해.”

시럽에서 달콤한 향기가 훅 올라왔다. 꼭 그것처럼 달콤한 말이었으나 나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네가 물러나서 다치지 않고 있어야, 정말 중요한 순간에 우리를 치료해 줄 수 있잖아. 맞지?”

아차, 맞는 말이었다. 내 시야가 너무 좁았다. 어쩌면 힐러라는 건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만 있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보조하는 역할이니까. 괜히 억지 부릴 이유가 없어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알았어요, 형.”

“그래요, 이한.”

라엔이 우유가 담긴 내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 꿀을 조금 따르고 작은 티스푼으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치료는 꼭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서 해요.”

라엔이 내 손에 다시 쥐여 준 유리잔에서 미지근하고 적당한 온도가 느껴졌다. 달콤한 우유를 가만히 마시고 있는데 내 앞에 놓인 팬케이크가 한 입 크기로 똑 잘리더니 옆에 놓였던 포크가 둥실 떠올라서 그 조각을 찍었다.

“…먹어.”

맞은편에 앉은 송하견이었다. 이렇게 안 해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포크를 쥐려고 손을 가져다 대자 포크 손잡이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송하견을 빤히 바라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송하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뜻인 걸까. 어쨌든 입을 벌리기는 했다. 내 입 안으로 팬케이크 조각이 쏙 들어오더니 포크가 다시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팬케이크가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시럽에서는 처음 먹어 보는 특이한 향이 났다. 나도 모르게 꼭꼭 씹어서 삼킬 만큼 맛있었다.

옆에 앉은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헝클이더니 입을 열었다.

“방어 마법을 어떤 식으로 둘러야 할지 대략은 파악했습니다. 앞으로는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 보자.”

“예, 형님.”

“그리고 실수한 건 아니야. 마물이 공격하는 형태를 한 번은 봐야 했으니까.”

박율이 송하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하견이 노트를 펼쳐 두고는 말을 이었다.

“박율 형 말이 맞아. 골짜기 바닥에 마물의 본체로 보이는 덩어리가 있었어. 박율 형이 검으로 찌를 때, 그게 순식간에 옆으로 이동해서 피했어.”

“그렇구나. 그러면 구름을 뚫고 들어가도 쉽지 않겠네.”

“응. 그 아래에서 마물이 움직이는 걸 파악하기 힘드니까.”

송하견은 그런 것까지 보고 있었구나. 옆에서 계속 기록하던 것도 그것이었나 보다. 송하견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망설이듯이 입을 열었다.

“골짜기 바닥이 완전히 드러났던 건, 구름이 한 번에 솟구쳤을 때뿐이야.”

“박율 형님을 공격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하견, 그 말은….”

“미끼.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해.”

누군가가 미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숨이 막혔다. 공기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

‘아까 마기가 짙어서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워진 거라고 했지.’

여기 마을 대표는 왜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연락을 하기는커녕 받지도 않았던 걸까. 다들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조금 미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모르면서 섣불리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건 안다. 그래도 이미 마음이 불편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거기에 피해받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물론 나중에 마을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가 따로 내색할 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대해서 말할 권리를 가진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일 테니까.

그래도 마을 대표가 조금은 반성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당신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건 일단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 두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처럼 평소보다 가벼운 박율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송하견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제를 바꿔서 말을 이었다.

“마물의 공격 범위는 파악했어.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은지도.”

“나도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감을 잡았어요. 정확한 건 몇 번 더 마법을 써 봐야 알 것 같지만요.”

“그래. 잘했어. 그러면 이제 슬슬 정리된 것 같네.”

박율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닫혔던 커튼을 걷어 내자 바깥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간이 금방 지나가 있었다. 박율이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내일 다시 다녀와 보자.”

“예, 형님.”

책상 위에 놓였던 그릇과 컵이 달각거리며 순식간에 정리됐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끝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먼저 들어간 송하견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송하견이 책상 위에 있는 전등을 톡 건드렸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주황색의 불빛이 어둠을 옅게 덮였다.

“…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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