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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64화 (64/150)
  • 064화.

    구름 흐르는 골짜기

    온통 푸르른 산이었다. 여름의 울창한 나무에 파릇하게 돋아난 나뭇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리가 사아아 울렸다.

    땅에는 새하얀 안개 같은 것이 옅게 깔려 있었다. 시원한 물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 있었다.

    「‘구름 흐르는 골짜기’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파란 창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직거리던 상태 창은 곧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부서져 갔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글씨가 반짝 떠올랐다.

    「일어서 줘.」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상태 창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맞아, 지난번에도 이런 짧은 문장이 지나갔었지. 이건 무슨 의미일까.

    “일어서 줘.”

    조용히 따라 말해 보았지만 잠잠했다.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선이한. 뭐라고? 못 들었어.”

    “아니야.”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눈앞에 잔상처럼 남은 듯한 글자를 털어 내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바깥쪽은 괜찮아 보이니 골짜기 중심부로 이동하는 거라고 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땅에 깔려 있는 안개가 점차 두껍고 짙어졌다.

    ‘이걸 왜 구름이라고 부르는 걸까.’

    안개라고 하는 쪽이 더 맞지 않나? 물론 안개보다는 조금 더 밀도가 높은 묵직한 느낌이기는 했다. 어쩌면 그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무릎 바로 아래쪽까지 안개 속에 폭 파묻혀 있게 됐다. 이제는 정말 바닥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

    “아.”

    뭔가에 발이 탁 걸렸다.

    옆에서 송하견이 재빨리 팔을 뻗어서 내 배 쪽을 단단히 받쳤다. 몸이 들썩 들리듯이 앞으로 기울어졌다가 간신히 바로 섰다. 다행이다. 흙바닥에서 뒹굴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하견 형.”

    “…조심히 걸어.”

    바닥이 잘 보이지 않으니 조심히 걷는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송하견은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내가 영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더 가까이 붙어서 내 팔뚝을 붙잡듯이 감싸 쥐고 걸었다. 어쩐지 조금 더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앞장서 걷던 박율이 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앞을 막아섰다.

    “그만. 여기까지.”

    “…심각한데.”

    “그렇네요. 이미 상황이 많이 진행된 것 같아요.”

    라엔이 손을 휙 흔들자 주위로 센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깔렸던 흰 안개가 흩어져 날아가더니 주변이 훤히 보였다.

    골짜기였다. 태양의 열기를 표면에 머금은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돌이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안쪽에, 물이 흘러야 할 자리에는 온통 검은빛의 안개가 채워져 있었다. 점성도 있어 보였다. 꿀렁거리며 흔들리는 안개가 꼭 구정물이 고인 것처럼 보였다.

    온통 화창한 가운데서 그 장소만 따로 똑 떼어진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박율이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까이 가 봐야 할 것 같아. 보조를 부탁할게.”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마물이 이런 상태라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예측이 안 돼.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해.”

    “옆에서 보조하고 있을게요, 리더 형.”

    라엔이 박율의 옆으로 다가갔다. 민주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박율과 라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주위로 연하게 일렁이는 막이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우선은 얼마만큼의 방어 마법을 써야 마물을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할 거야. 효율적으로 마나를 써야 하니까.”

    “예. 상황을 보고 방어 마법을 조절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공격해 오는 형태를 파악하기 전까지 라엔이는 움직이지 말자.”

    “알았어요. 그래도 위험한 것 같으면 개입할게요.”

    “아니, 일단은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들 하나씩 계획을 세우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내 팔이 살짝 끌어당겨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송하견이 아까부터 쥐고 있던 내 팔뚝을 자기 쪽으로 가볍게 당기며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잡아.”

    “네?”

    “우리는, 지금부터 뒤로 빠질 거야.”

    송하견의 바로 앞에 노트와 펜이 둥실 떠올랐다. 송하견은 한 손으로 노트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위로 펜을 가져다 대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부유 마법 쓸 거야. 잡아.”

    아, 송하견이 나를 잡아 줄 수가 없구나. 그런데 어디를 붙들어야 하지?

    송하견은 여름인데도 여전히 흰색 긴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목 부분 단추를 세 개 정도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의 탄탄한 팔뚝이 다 드러났다.

    맨살에 닿는 건 조금 더울 것 같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손을 뻗어서 가져다 댔을 때,

    ‘헉.’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손을 재빨리 다시 떼어 냈다.

    단단했다. 그리고 너무 뜨거웠다. 한여름의 태양에 살갗이 달아오른 듯했다. 아니, 이건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어쨌든,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가뿐히 안아 들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손을 대 보니 이제야 확 실감이 났다. 송하견은 연구하는 쪽이라면서 왜 몸이 이렇게까지 좋은 걸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송하견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는 듯했다. 이렇게 미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살갗에 직접 손을 대는 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송하견의 허리 쪽 와이셔츠를 살짝 쥐었다.

    “그렇게 잡을 거야?”

    “안 되나요?”

    “……응.”

    송하견이 내 등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힘을 주자 나는 어느새 송하견의 허리에 매달리듯이 팔을 감싸고 있는 채였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맨살에 직접 닿는 것만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다. 송하견은 팔뚝뿐만 아니라 허리도 마찬가지로 단단했다. 내가 사람과 닿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가자.”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더운 공기가 주위를 옅게 감싸며 몸이 서서히 떠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른 생각을 끊어 내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저 아래에 다들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섭다.’

    높은 곳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바로 아래에 시커먼 안개가 잡아먹을 듯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는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되는 마음에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꾹 쥐었다.

    “…너.”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송하견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송하견의 모노클에 거울처럼 내 모습이 살짝 비쳤다.

    송하견은 잠깐을 말이 없더니 작은 한숨처럼 숨을 짧게 내뱉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응. 괜찮아.”

    순간 더운 공기 사이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옅은 풀 향기가 잠깐 난 것 같았다.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되고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살짝 풀자 송하견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송하견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바라봤다.

    ‘그 검이다.’

    다들 전략 얘기를 마무리한 것 같았다. 박율이 기다랗고 날카로운 검을 곧게 든 채 골짜기 쪽으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검에 박힌 붉은 보석이 여기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옆에서 펜촉이 종이를 긁는 거친 소리가 분주하게 들렸다. 그게 꼭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처럼 느껴졌다.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순간 박율이 골짜기 안으로 검을 깊게 박아 넣었다. 턱, 하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서 또렷하게 울렸다. 검이 박힌 곳은 골짜기 아래 단단한 돌바닥이었다. 질척해 보이는 새까만 안개가 아니라.

    마물이 스며든 검은 안개는 칼날을 피해 둥그렇게 물러나 있었다. 그 자리만 뻥 뚫린 것처럼 보였다.

    팍.

    검은 안개가 해일처럼 순식간에 박율을 덮친 것과 동시에 파란색의 선명한 막이 박율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쌌다. 민주혁이 마법을 쓴 듯했다.

    공포에 손이 떨렸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렇게 마물을 상대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험한 상황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검은 안개가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섬뜩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송하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듯이 들렸다.

    “방어 마법이 아니야.”

    “네? 그러면요?”

    “…차단 마법. 안에서도 밖에서도, 통과하지 못해.”

    두 개가 다른 거구나. 차단 마법이 더 확실하게 막는 쪽인 것 같았다.

    잠깐, 그러면 마물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저 마법을 해제해야 하는 건가? 방어 마법과는 달리 차단 마법을 쓰면 안쪽에서도 공격할 수 없을 테니까.

    아래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혁아, 차단 마법은 풀어. 라엔이는 한 걸음 더 물러나 있어.”

    “이런 형태의 마물도 기존의 방어 마법으로 막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한 번은 부딪쳐 봐야 감을 잡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해 보겠습니다.”

    박율의 주위를 감쌌던 선명한 막이 조금 흐릿해졌다. 마물이 담긴 안개가 골짜기의 커다란 돌을 넘어서 차근차근 넘쳐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별안간에 높이 솟구쳐 방어막을 날카롭게 뚫고 들어갔다.

    “큭.”

    박율이 마물에 목이 감싸인 채 저만치로 훅 던져졌다. 바닥에 흙먼지가 일었다. 박율은 여전히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였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안고 있는 송하견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람이 휙 불더니 어느새 박율의 앞으로 와 있었다. 송하견이 텔레포트를 쓴 듯했다.

    그사이에 라엔은 마물에 공격 마법을 쓰고, 민주혁은 떨어져 나간 마물에 포획 마법을 써서 저만치 떨어진 바닥에 내리누른 채였다.

    박율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있었다. 가느다란 금발이 아래로 흔들렸다.

    그 곁으로 급하게 다가가 앉아서 박율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벅찬 호흡을 애써 고르는 듯한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나도 덩달아 숨이 막히는 것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박율의 목을 감쌌던 빛이 내게로 들어왔다.

    “율이 형, 괜찮아요?”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여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심장이 철렁했다.

    곧 박율이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내게로 향한 채 나를 샅샅이 훑는 시선이 꼭 내 상태를 다급하게 확인하는 것 같아 보였다.

    설마 저번에 내가 부상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는 걸 확인해서 그러는 건가. 지금 나한테 신경 쓸 때가 아닌데. 방금 공격당한 건 박율이었다.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박율은 곧 표정을 부드럽게 풀더니 입을 열었다.

    “놀랐구나. 괜찮아, 이한아.”

    박율이 나를 안심시키듯이 눈을 접어서 환하게 웃었다. 늘 봐 왔던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박율의 목덜미에 땀방울이 하나 주륵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기분인 건지 잘 모르겠다.

    박율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서 가볍게 헝클였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호흡도 안정되어 있었다.

    박율이 저 멀리 골짜기에 있는 검은 안개를 향해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음, 여기에는 마물의 핵이 없네.”

    침착한 목소리였다. 박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포획 마법으로 묶어 놓은 마물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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