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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63화 (63/150)
  • 063화.

    같은 방

    “저는 1층에 있겠습니다. 천천히 내려와 주십시오.”

    그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서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아까 보니 1층은 식당 같은 공간이었다. 반절 정도는 요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막혀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동그란 탁자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레데오도 그러더니, 왜 가는 곳마다 방 개수가 이럴까. 어쩌면 방은 딱 네 개씩만 만들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침대를 같이 쓴 적은 없는데.’

    신전에서는 별관에서 항상 따로 지냈다. 애초에 방을 같이 쓴 것도 송하견과 처음이었는데 침대를 같이 써 본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방을 혼자 쓰고 싶다고 말해도 될까? 안 되더라도 일단 얘기는 꺼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려는 순간,

    띠링.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돌발! 퀘스트> 함께 보내는 밤!

    알아 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용사님과 한 침대에서 자요.

    성공 시: 용사님이 보낸 밤(1회) 획득

    실패 시: 혼자 보낸 밤 페널티

    제한 시간: ‘구름 흐르는 골짜기와 마을’ 지역을 벗어나기 이전까지

    밤을 함께할 용사님은 누구인가요?

    1) 용사 민주혁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망할 시스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몰아붙일 수가 있어? 한 침대에서 자는 것과 알아 갈 기회 사이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성공 보상이나 페널티가 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페널티보다 보상이 더 낫다는 건 확실하지만.

    숨을 작게 내쉬었다. 세상이 이렇다. 뭘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선택을 종용한다. 내가 정신 차리고 있으니 다행이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니까.’

    같은 방을 쓴다면 내가 최대한 피해 끼치지 않을 만한 사람과 함께해야 했다.

    송하견과 항상 같은 방을 쓰긴 했지만 송하견이 자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리면 방에서 송하견이 불편할 것 같았다.

    라엔도 저번에 보니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민주혁은 아침이 너무 일렀다. 그렇다면….

    “율이 형.”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보던 박율이 계속 얘기하라는 듯 나와 눈을 맞췄다.

    “형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요?”

    “응? 그건 왜?”

    다시 질문이 되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직접 말하자니 뭔가 민망한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은 방…… 쓸 수 있을까 해서요.”

    고작 이 한 문장을 말하는 데 이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걸까?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박율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잠깐 깜빡였다. 그러고는 내게로 다가와서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해, 이한아. 형이 늦게까지 안 자니까 이한이 잠을 깨울 것 같아서.”

    별로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하긴 나보다 더 일찍 자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그러면 누구와 자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들 나와 잠드는 시간이 맞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박율이 무릎을 숙여서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이야. 그래서 형은 지금까지 누구와 방을 같이 쓴 적이 없거든.”

    “정말인 거 알고 있어요.”

    그때 내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민주혁이 씩 웃으며 옆에 서 있었다.

    “안다는 표정이 아닌데, 선이한. 그런데 진짜야. 다들 박율 형님하고는 방을 같이 쓴 적이 없어.”

    안다는 표정이 아니긴. 내가 알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박율이 말한 자는 시간은 사실 핑계일지도 몰랐다. 박율은 사생활을 중요시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나는 레데오에 있을 때도 박율의 방에만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옆에서 민주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한테 먼저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왜냐니? 우리 동갑이잖아. 당연히 방을 같이 써야지.”

    아,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 건가? 그렇다면 지금껏 방 개수가 모자랄 때면 송하견과 라엔이 같은 방을 써 온 걸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뒤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혁.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방을 나눴죠?”

    민주혁은 생각보다 뻔뻔한 편인 것 같았다.

    “막내들이 같은 방을 쓰겠습니다. 형님들은 편안하게 자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민주혁은 어쩌면 생각보다 꼼꼼하게 생각하는 편일지도 몰랐다.

    잠깐 말을 멈췄던 라엔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한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게 왜 중요한 거지? 내 의견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냥 누군가와 침대에서 함께 자기만 하면 됐다.

    “나는 다 좋아요. 그런데 형들은 늦게 자는 편이잖아요. 나는 일찍 잠드니까 불편할까 봐요.”

    민주혁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보면 이른 시간에 자는 것이 틀림없다. 설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 아닐 테니까.

    내 말을 들은 라엔이 잠깐 생각하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요즘 일찍 자고 있어요. 이제 무리하지 않으려고요. 그러니까….”

    라엔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라엔의 입술에 피가 몰려서 붉게 물들었다. 라엔은 망설이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아니더라도, 다음에 확인해 줘요.”

    굳이 내 확인이 필요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리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았다.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내 손목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송하견이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저쪽에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견 형…?”

    “가자. 항상 같은 방이었잖아.”

    “형은 늦게까지 깨어 있잖아요.”

    “…조용히 할게.”

    송하견은 그렇지 않아도 항상 조용했다. 송하견이 여기서 더 조용히 한다면 아예 인기척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내가 방해될까 봐요.”

    “그럴 일은 없어.”

    송하견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렇다면 뭐, 나쁘지 않았다. 송하견과는 지금까지 같은 방을 써 왔으니까 더 편할지도 몰랐다. 익숙할 테니까.

    등 뒤로 민주혁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쉽다. 될 뻔했는데.”

    송하견은 민주혁을 돌아보며 슬쩍 웃고는 방문을 열고 성큼 들어섰다. 내가 방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뒤에서 문이 탁 닫혔다.

    “침대…. 정말 하나밖에 없네.”

    막상 확인하니 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퀘스트니까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자는 거, 처음이야?”

    “처음이에요. 신전에 있을 때도 방을 혼자 썼어요.”

    송하견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이야.”

    “형은 그동안 여러 군데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한 번도 없었어요?”

    “너랑, 같은 침대는.”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풀썩 앉았다. 하늘색의 얇은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시원한 재질이었다.

    다행히도 침대가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두 명이 넉넉하게 잘 만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송하견이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한 편이어서 좀 걱정되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송하견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다. 용사라서 그런가. 내가 작은 건 아니고.

    “…기다려.”

    그렇게 말한 송하견이 방 한쪽에 나무 가방 여러 개를 차근차근 쌓아 두었다. 짐 정리가 끝나고 같이 1층으로 내려가면 될 것 같았다.

    “네. 천천히 해요, 형.”

    물론 내가 이렇게 따로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할 것 같기는 했다.

    방 안을 둘러봤다. 옆으로 미는 작은 창이 벽면에 있었고, 그 창 바로 앞에는 네모난 나무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가구는 그게 전부였다.

    ‘퀘스트 창.’

    내가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밤을 함께할 용사님, 용사 송하견」

    역시 이미 선택되어 있었다. 내가 아까 송하견과 함께 방에 들어온 순간 계속 떠 있던 퀘스트 창이 눈앞에서 사라졌었다. 자동으로 진행되는 거였구나.

    시간도 넉넉하고 곧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 촉박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퀘스트 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송하견이 짐을 다 정리했는지 내게로 다가왔다.

    “나가자.”

    송하견이 뻗은 한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나와 송하견이 가장 늦었다. 나름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인 거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그는 이미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사람도 행동이 참 빨랐다. 박율과 라엔이랑 민주혁이 그에게 들었던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 줬다.

    “옆쪽에 구름 흐르는 골짜기가 있다고 했었지. 들어 보니까 그 구름 안에 이미 마물이 스며든 것 같아.”

    “맞아요. 다행히 그 골짜기 내부에만 구름이 퍼져 있어서 마을까지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맞아. 마을 대표가 주위로 마법을 펼쳐 뒀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하니까.”

    그래도 마을까지 피해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당신들만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마무리하면 됐다. 물론 그게 가장 힘든 일이겠지만. 나도 앞으로 최선을 다해야지.

    “…연락은, 왜 안 됐던 거야?”

    “마을 대표의 개인 사정이어서 말을 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네. 곧 우리를 찾아오도록 얘기해 둘 테니까 그때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이제 짐도 풀고 상황도 파악했으니 일단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골짜기에 다녀올 거라고 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서 태양이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마물이 구름에 스며들었다면 처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아요. 꽤 까다롭겠어요.”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벌써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전략은, 다녀온 후에 보완하면 되니까.”

    다들 슬슬 이동하려는 분위기였다.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갈래요. 방해되지 않을게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 이한아. 뒤틀린 장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는 거지?”

    박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말을 받았다. 나도 같이 가는 걸로 이미 결정돼 있던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러면 지금 출발할게요.”

    라엔이 내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동시에 센 바람이 훅 불어오더니 장소가 바뀌었다.

    눈앞에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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