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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62화 (62/150)

062화.

중요한 일

박율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찬찬히 깜빡였다. 노을의 붉은빛 속에서 연한 녹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뭐가 준비됐냐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내 몸이 훅 들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창밖으로 이동했다. 발아래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이런 준비는 안 됐는데.’

더운 바람이 내 주위를 빙글 돌았다. 몸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갑작스럽게 허공에 떠 있게 됐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박율이 나를 떨어뜨릴 리가 없었으니까.

내 몸을 감쌌던 바람이 흩어지는 순간 나는 박율의 바로 옆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율이 형. 할 말이 뭐예요?”

“안 놀랐네, 이한아.”

내가 놀라기를 바랐나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박율을 올려다봤다. 설마 박율이 이럴 줄은 몰랐다. 박율이 눈을 접어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길래.”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박율은 내 손을 펼치더니 자기가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쥐여 줬다. 그러고는 물뿌리개 아래를 받치고 천천히 기울였다.

흙바닥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느릿하게 쏟아 내렸다. 하나하나에 노을빛이 스며 있었다.

자그만 물방울들이 톡톡 튀어 옷의 밑단에 조금씩 스며드는 느낌이 났다. 박율의 나긋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너무 많은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그렇게 멍해지면, 더 이상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되잖아.”

박율이 손을 떼어 냈다. 내 손안에서 여전히 물뿌리개가 기울어져 있었다.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근처로 물기 섞인 바람이 옅게 불었다.

“그러니까 멈춰 서서 생각하면 안 돼. 작은 거라도 손에 쥐고, 아니면 누군가라도 옆에 있는 상태여야지. 그래야만 다시 나아갈 수 있어.”

박율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접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형 옆으로 부른 거야, 이한아.”

박율이 내 등허리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시 앞쪽의 정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박율은 그래서 늘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박율에게서 더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뜨겁고 마른 공기 속에서 물방울이 흩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정원에서는 꽃향기와 여름의 억센 풀 향기가 났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내가 먼저 그 고요함을 깨고 목소리를 냈다.

“형.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말해.”

“정말 아무런 할 말도 없었어요?”

박율은 지금 말을 꺼낼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 나는 늘 그런 것을 고민하곤 하니까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내 예상대로 박율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실 형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네. 준비됐어요.”

무슨 얘기기에 이렇게 망설였던 걸까.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꼴깍 삼켰다. 박율이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 갈 마을이 어떤 분위기인지 모르잖아. 그래서 어떤 말을 들을지도 알 수가 없어.”

“무슨 말을 얘기하는 거예요?”

“날카롭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화들짝 놀라서 박율을 돌아봤다. 박율은 여전히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늘 그랬듯이 연한 미소를 띠고 있는 채였다.

“왜요? 그럴 이유가 있나요?”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실감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런 일도 없다면 괜히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지.”

박율이 손을 뻗어서 꽃잎을 살짝 쓸었다. 박율의 손을 타고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박율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그리고 눈앞에 위험이 보였을 때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니까. 지금껏 뭘 하다가 한발 늦게 도착했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말도 안 돼요. 무슨 자격으로요?”

나도 모르게 격한 반응을 했다. 수긍할 수가 없었다. 당신들은 몸을 깎아 가며 희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히 어떻게 당신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박율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내 뺨을 살짝 쓸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내 볼에 옮겨 와서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미리 얘기하기를 잘했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나는 지금 놀란 게 아니다. 내가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화가 난 거다. 지금 박율의 태연한 반응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박율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에 누구도 피해를 받지 않은 상황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잘 해낸 거니까.”

“누군가 피해를 받았다면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형들 잘못인가요? 아니잖아요.”

“그때는 잘잘못을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수습할 수 있는지니까.”

“그건….”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야.”

잘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그런 세상이라면, 당신들은 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희생하는 거지?

그래. 당신들은 단단한 사람들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당신들이 그런 것들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되는 건가?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뒤죽박죽 섞였다. 내가 생각을 채 정리하기 전에 박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한아, 잘 들어 봐. 형이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라 이거였어.”

“…네. 듣고 있어요.”

“만약에 누군가 네게 험한 말을 한다면….”

박율이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서 나와 눈을 맞췄다.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그러니까 형한테, 꼭 말하자. 알았지?”

박율이 글자 하나하나를 끊어서 말했다. 아직도 환한 웃음을 얼굴에 띠우고 있었음에도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잠깐 긴장시켰다.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그제야 내 머리를 쓸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렸다.

“그래. 형이 너무 겁을 줬네. 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야.”

박율이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다시 잘 정돈해 줬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렸던 물뿌리개를 부드럽게 빼냈다. 그 안은 어느새 물 한 방울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슬슬 해도 떨어지네. 이한아, 다시 올려 보내 줄까?”

박율이 허공으로 손을 휘저으려는 것처럼 살짝 들었다. 그 손을 다급하게 잡아서 내렸다.

박율이 자기 손을 간절하게 쥔 나를 바라보면서 살짝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진지했다.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다행히도 들어갈 때는 내가 걸어갈 수 있었다.

달칵.

방에 들어오니 박율의 말처럼 벌써 해가 거의 내려앉고 있었다.

방 안에는 송하견이 자기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송하견의 앞에 둥둥 띄어진 여러 색의 플라스크가 나무 가방 안으로 하나씩 들어가고 있었다. 송하견은 나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아직 해도 다 안 떨어졌어요, 형.”

“내일 일찍 떠나.”

일리가 있었다. 군말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누웠다. 눈을 감자마자 저쪽에서 커튼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플라스크 안에 담긴 액체가 찰랑이는 울림이 공기에 옅게 스몄다. 귓가에 일렁이는 소리를 들으니 꼭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이 조금 복잡했다. 박율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내 눈가를 차분하게 덮는 손길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켰다. 더운 공기 사이로 연한 풀 향기가 났다. 여름밤과 꼭 어울리는 향이었다. 송하견이 내 눈가를 찬찬히 쓸어내렸다.

“…걱정 마.”

내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아는 걸까. 나 자신을 향한 걱정이 아니었다. 당신들 걱정이었지.

그렇지만 낮게 가라앉은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입 밖으로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만 삼켰던 것 같기도 했다.

송하견이 잘 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정신이 차츰 멍하게 가라앉았다.

새로운 태양이 밝았다. 날이 쨍쨍했다.

“일단은 마을 입구로 먼저 이동하자.”

“네. 그리고 마을 대표를 찾아가면 될 것 같아요, 리더 형.”

구름 흐르는 골짜기를 찾아가는 건 마을 대표와 얘기한 이후에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단은 연락이 안 됐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제 갈까요, 이한.”

라엔이 내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얹었다. 라엔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욱.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감았던 눈을 떴다.

마을 초입부가 보였다. 입구 양쪽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씩 심겨 있었다. 바닥에서는 흙먼지가 일었다. 여름의 쨍한 태양이 그 위로 두껍게 쌓여서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었다.

들었던 것처럼 작은 마을이었다. 그 안으로 한 걸음을 들어섰을 때, 뭔가가 이쪽으로 휙 날아왔다.

민주혁이 어느새 손을 뻗고 있었다. 우리 주위로 연한 파란색의 막이 일렁였다.

툭, 데구루루.

동그란 공이 그 막에 튕겨서 다시 굴러갔다. 아이들이 갖고 놀 만한 공이었다.

갑자기 이게 뭐지.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급하게 다가왔다. 중년의 어른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이가 사람이 있는 쪽으로 그만….”

“아, 아닙니다. 제가 반사적으로 과한 반응을 했습니다.”

그는 한 손으로 급하게 공을 주워 들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민주혁이 더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곧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누구신지…. 여기에는 무슨 일이신지요?”

박율이 바로 말을 받아서 설명했다. 내가 듣기에도 핵심만 딱 전달하는 말이었다. 익숙해 보였다. 이런 일이 꽤 있었구나.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용사들의 얼굴도 모르는 걸까. 그래도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정말 자기 눈앞의 일이 아니면 관심조차 없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쓰렸다.

박율의 얘기가 끝나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 연락이…. 마을 대표님이 지금 개인적인 사정으로 업무를 통 못 보는 것 같긴 했는데, 연락도 못 받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지금 바로는 마을 대표님을 만나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일이 있긴 합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무슨 일이 있다는 말에 다들 표정을 굳혔다. 그는 들고 있던 공을 저 멀리 있는 아이에게 다시 던져 주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걱정이 컸는데 이 사람을 보니 다행히도 우리를 불쾌해하거나 원망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다행인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정신 차리자.

그렇게 잠깐을 앞장서서 걷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들어오시지요.”

눈앞에 있는 것은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인 것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설명을 들어 보니, 이 마을이 산골이라서 오고 가기가 힘들어 생필품을 팔러 온 상인들이 주로 이곳에 묵는다고 했다. 종종 여행객이나 방문객도 묵는 곳이라고 했다.

“방이 몇 없긴 합니다만, 모쪼록 편하게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건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2층짜리 건물에 방은 단 네 개뿐이었다. 각 방에 침대도 하나씩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이대로라면 두 명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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