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뭔가 문제라도
민주혁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민주혁은 여전히 내 어깨를 꾹 눌러서 감싸 쥔 채였다.
민주혁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살갗이 닿은 부분부터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민주혁이 마법을 쓰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인지 모르겠다.
내가 말없이 있자 민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싫어?”
그럼 옷을 벗는 게 좋을까? 민주혁이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는 건데?”
“너 그러다가 쓰러질까 봐. 시원한 걸로 갈아입어. 반팔이면 더 좋고.”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하긴 겨울에 입었던 옷이랑 겉보기에는 별다르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괜찮아. 여름옷이야. 얇잖아.”
민주혁이 내 옷감을 살짝 쓸었다. 비칠 정도로 얇고 하늘거리는 흰색 천이 민주혁의 손에 부드럽게 감겼다. 민주혁은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옷밖에 없어? 항상 긴팔만 입어?”
“어. 원래 신관복이 다 그래. 뭐, 나는 신관은 아니지만.”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민주혁이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깐만 벗어 봐. 네가 원하면 나도 벗을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걸 왜 원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
민주혁은 그런 식으로 나를 한참 더 설득했다. 나중에 가서는 소매만 걷어 보자고 말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체 무슨 의도인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민주혁이 생각보다 끈질겼다. 계속 실랑이하다 보니 더워진 것 같았다. 옷이 한여름 뙤약볕에 내놓았다가 입은 것처럼 후끈해진 것 같기도 했다. 민주혁이 마법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더위에 얼굴이 달아오를 때까지 싫다고 하자, 민주혁은 결국 포기하고 방에서 훌훌 떠났다.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말은 왜 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억지로 벗기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덥다.’
정신이 없었다. 민주혁이 나가니까 방 안이 좀 조용해졌다.
창틀에서 내려와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누웠다. 이불도 안 덮고 가만히 늘어져 있는데도 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뜨거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게 다 민주혁 때문이다.
똑똑.
방문을 조그맣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문을 열어 줄 힘도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간신히 목소리만 냈다.
“네. 안에 있어요.”
문이 천천히 열렸다. 붉은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라엔은 늘 그랬듯 구불거리는 짧은 머리를 낮게 묶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라엔은 지난번에 떠나기 전에도 나를 찾아와 줬던 것 같다.
문을 닫느라 잠깐 등을 돌렸던 라엔이 내게로 다시 몸을 틀었다. 나와 시선이 딱 부딪혔다.
“이한. 뭐하고 있…었….”
라엔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손을 허공에 빠르게 휘저었다. 내 위로 커다란 담요 하나가 생겨나서 내려앉았다.
“라엔 형….”
왜 이 날씨에 담요를…? 정말 너무 더웠다.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큰일이다. 지금 온몸이 젖은 것 같은데.
간절하게 이름을 불렀으나 라엔은 그 자리에 딱 붙은 것처럼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은 채였다. 라엔이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고 있, 어요?”
“…더워요.”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라엔이 그제야 아, 하며 손을 살짝 튕겼다. 담요의 온도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라엔이 시선을 살짝 비낀 채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앞에 서더니 내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라엔도 더운 건지 뺨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곧 빛이 반짝하더니 땀에 젖었던 옷이 보송해졌다. 라엔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보였다.
라엔이 어쩐지 힘겨운 것처럼 나와 눈을 맞췄다. 달아오른 내 뺨에 라엔이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댔다.
“많이 더워요?”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형.”
라엔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달콤한 향이 났다. 라엔은 그렇게 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았다.
“더위는 많이 안 탄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그냥 잠깐 그랬나 봐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었다. 어물쩍 대답했으나 라엔은 처음부터 내 대답이 궁금했던 게 아닌 듯 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한. 옷이…. 그것밖에 없나요?”
아까 민주혁도 그렇고 다들 내 옷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라엔 형. 혹시 내 옷에 뭔가 문제가 있나요?”
“음, 아니요. 너무 얇은 것 같아서요.”
“어…. 그런가요?”
아까 민주혁은 긴팔이라 더워 보인다면서 한참을 말하고 갔는데. 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옷을 바꿔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내 소신을 지켜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엔이 눈썹을 살짝 올려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내가 신경 쓸게요.”
대체 뭐를 신경 쓴다는 걸까. 라엔은 아까 소환했던 시원한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줬다. 그러고는 투명하고 길쭉한 유리잔을 자기 손에 하나 쥐었다.
허공에서 주전자와 은색 통 같은 여러 가지 물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유리잔 안에 뭔가가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유리잔 안에는 초콜릿색의 음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음료의 위쪽에는 하얀색의 폭신해 보이는 크림 같은 것이 가득 얹어져 있었다.
“마시면서 들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요.”
음료를 한 모금 넘기니 시원하고 달았다. 위에 얹어진 크림도 부드럽고 달콤했다. 맛있었다. 뜨거운 것뿐만 아니라 시원한 것도 있었구나.
라엔이 내 입가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살짝 웃으며 내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 냈다. 단정한 손가락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어쩐지 선명한 것 같았다.
“좋아할 것 같았어요. 차가우니까 천천히 마셔요.”
“맛있어요. 고마워요, 형.”
라엔은 음료를 조금씩 마시는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얀 빛무리가 뭉치더니 네모난 지도가 만들어졌다.
“내일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나요?”
“네. 골짜기 옆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간다고 들었어요.”
“들었군요. 그 장소 관련해서 얘기할 게 있어서요.”
지도의 왼편에는 커다란 산이 겹쳐진 채 그려져 있었고, 흰 줄기가 그 중간 부근을 곧게 뻗어 내려오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오른편에는 작은 건물이 옹기종기 그려져 있었다.
라엔이 손을 뻗어서 흰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은 구름 흐르는 골짜기라고 불러요.”
“어…. 구름이 흘러요?”
“네. 계곡물 대신에요.”
물 대신에 구름이 흐른다니 어떤 분위기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번뜩 생각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라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도 비틀린 장소인가요?”
라엔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내린 숲과 비슷한 느낌의 장소인 것 같았다. 어, 잠깐만. 그때 숲에서는 하늘에 장막 같은 게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요, 이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이 손을 살짝 튕겼다. 앞쪽에 떠올라 있던 지도가 휙 뒤집히더니 평평하게 내려앉았다. 그 위로 산 모양이 볼록 솟았다.
“결계가 아니라 신의 힘이 덧씌워져 있는 것일 가능성이 커요.”
라엔이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호선 모양으로 둥그렇게 그었다. 파란색의 막이 산을 둘러싸며 생겼다. 라엔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소가 뒤틀린 이유도 신의 힘 때문일 것이고요.”
“맞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걸 나만 느낄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이 돼요.”
그렇다면 왜 신은 장소를 뒤틀어 놓은 걸까. 이것도 나중에 신께 여쭤볼 필요가 있었다.
“이건 내가 알아볼게요, 라엔 형.”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라엔이 몸을 굳혔다. 그러고는 내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라엔이 양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같이, 알아봐요. 움직이는 건 항상 같이해요. 약속이에요.”
라엔의 손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맞춰 오는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라엔의 금안에 오롯이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봤다.
“노력할게요.”
웃으며 대답했다. 라엔이 입술을 짓씹었다. 내 대답의 의미를 알아챈 거겠지.
이건 내가 할 일이었다.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는 것이 당신들의 역할이라면, 당신들을 치료하고 신의 힘과 관련된 것들을 알아내는 건 나의 역할이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치듯이 떠오른 것이 있었다.
‘당신들도 이런 마음인 걸까.’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마음.
생각해 보면 모든 것들이 그랬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짊어지게 된 역할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필사적으로 해내려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길은 하나였느니.
갑자기 그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것 같았다. 소매를 꾹 말아 쥐었다.
신의 말씀이라 해도 나는 감히 그것을 수긍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내 의지고, 내 선택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한. 같이 노력해요. 혼자서 말고요.”
라엔의 간절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라엔을 바라봤다. 라엔은 여전히 가라앉은 시선을 나에게로 향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라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게 당신들 스스로의 의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많이 바빠질 거예요. 무리하지 말고, 어디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해 줘요.”
라엔은 그 후로 걱정의 말을 한참 더 덧붙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요즘 조용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쩌면 조용하지 않은 날이 잦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적막의 한가운데에서는 그것이 적막인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까.
‘아, 또 이러네.’
뺨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실감할 때가 있었다. 내가 어느새 조용하지 않은 이 모든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과 내게로 향하는 뜨거운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두근대며 들리는 것 같았다. 진정해야 했다.
달칵, 끼익.
창가로 서둘러 걸어가서 창문을 열었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덧 하늘에는 노을이 낮게 지고 있었다. 몸이 노곤하게 데워지는 느낌에 마음이 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저무는 해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봤다. 정원 앞에 박율이 서 있었다. 물뿌리개를 손에 든 채였다.
박율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내가 시선을 맞추자 박율이 내게로 손을 작게 흔들었다. 나도 따라서 손을 흔드는데 박율이 입 모양으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어.
내가 맞게 이해한 거라면 그런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마저 입을 열었다.
준비됐어?
그리고 박율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무슨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