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혹시나 해서
내 말이 끝나자마자 스승님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이한이구나.]
소매를 꾹 말아 쥐었다. 말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할 때도 아니었고. 나는 그냥 그걸 입 밖에 내기만 하면 됐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전 건물에는 정말 못 들어가나요?”
[지금 바로는 어렵단다.]
“저에게 신의 힘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신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도 안 되나요?”
[신께서 네게 알렸구나. 미안하단다. 그래도 아직 때가 아니란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스승님도 내가 제물이었다는 걸 알고 계셨구나.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마음을 잠깐 정리하는 사이 스승님의 말이 이어졌다.
[용사님들이 내년 초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단다. 그때 오련.]
박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 사람들과 있으면 시간이 꽤 금방 가니까.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그렇지 않아도 바쁠 것이었다. 나만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보다는 이미 정해진 약속을 따라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이를수록 좋겠지만 사실 늦는다고 해서 문제는 없었다.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막무가내로 내 다급함만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렵지만, 다음에 언젠가…. 찾아온다면, 이한아. 그때는 바로 시간을 내마.]
스승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수정이 거의 다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해지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 순간 내뱉지 않으려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제가 신의 힘을 받았다는 것을요.”
[그래. 알고 있었단다.]
“그러면, 스승님, 그동안 제게 잘 대해 주신 것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정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건 없었다.
파랗게 빛나는 작은 입자가 먼지처럼 책상 위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텅 빈 고요함뿐이었다.
그때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온기가 느껴졌다. 박율이 내 어깨를 찬찬히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이한아. 다시 연락해 볼까?”
“…괜찮아요. 이거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연락이 그대로 끊어졌지만 생각보다 정말 괜찮았다.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스승님의 대답이 어떻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나에게는 스승님이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신전 같은 곳은 이미 떠나온 지 오래였다.
‘나라는 존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이제….’
고개를 들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박율도, 라엔도, 송하견도, 민주혁도 다들 이 자리에 있었다.
텅 빈 고요함이 아니었다. 이곳은 처음부터 빈틈 하나 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 자리에 있었고. 그러니까 괜찮았던 거였다.
‘그렇구나. 당신들이었구나.’
나는 어느샌가 이곳에 물들어 있었다. 당신들의 따뜻함에.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손에 얼굴을 묻고 조금 진정하고 싶었다. 지금 무슨 기분인 건지 모르겠다.
이따금 별도 뜨지 않는 밤이면, 하늘은 그저 텅 비어 보인다. 하지만 그 밤을 견디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텅 빈 하늘 같은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밤일 리가 없었다. 또 다른 하루가 밝아 올 테니까.
햇살이 하늘을 가득 메워 오고 있었다.
◇
그동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내일이면 다시 출발할 때였다.
어느덧 날씨가 꽤 더워졌다. 이제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공기가 텁텁하고 뜨거웠다. 태양 빛도 쨍하게 내리쬔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다들 바빴다. 사실 나는 모두를 대하는 게 갑자기 살짝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당신들의 옆에 있다는 걸 이제야 온전히 실감하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또렷하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밥도 먹었고, 잠도 잤고, 얘기도….
어떤 얘기를 했더라? 그렇지만 다들 내게 딱히 뭔가를 묻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지금 몸은 어떤지, 쉬는 동안 하고 싶은 게 있는지, 신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더위를 많이 타는지. 그런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그사이 나는 흔들렸던 마음을 다 정리했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나는 지금 송하견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창틀에 기대어 앉아 있다. 무릎에 노트를 올려 두고 연필을 쥐었다. 연필 끝을 잘근 물다가 노트에 가져다 댔다.
「꼭 희생이 필요한 걸까.」
신께 물어야 할 것을 미리 적어 두는 거였다. 내년 초까지면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생각나는 대로 틈틈이 기록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신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희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꼭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는 희생하게 된다는 것처럼 들렸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건가?
「내게 제물이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
제물이라는 건 뭔가를 위해서 이미 희생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딱히 그렇진 않았다. 내가 뭔가 감내하고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나에게 왜 제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인지도 물어야 한다.
‘음, 아니다. 이건 궁금하긴 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
호기심에 의한 질문과 꼭 필요한 질문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라면 후자를 먼저 말해야 했다. 옆에다가 글자를 더 적어 넣었다.
「내게 제물이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 (이건 중요하지는 않음.)」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아, 맞다.
「그런 것도 정말 신의 뜻인 걸까.」
여기서 ‘그런 것’은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다. 혹시나 누가 볼까 봐 뭉뚱그려 적었다. 아마 아무도 볼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상황은 늘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시스템 자체는 신의 힘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퀘스트를 생각해 보면 아리송했다.
그런 모든 퀘스트가 신의 뜻이라면 신께서는 내게 그저 시련을 주고 싶으신 걸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노트를 펼쳐 두고 한참을 더 고민했지만 이 외에 떠오르는 건 없었다. 지금은 일단 이걸로 마무리를 지으면 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민주혁이 준 노트에 처음 적은 게 이런 것들이었다. 조금 미안했다. 뭐,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알차게 사용하고 있….
“선이한.”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서 노트를 탁 덮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을 보니 민주혁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도 내 바로 옆에.
“왜, 여기에 있, 어?”
말이 뚝뚝 끊어져서 나왔다. 방금 내가 쓴 걸 봤을까? 벌써 들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민주혁이 눈을 크게 깜빡이더니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내 이마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다행히도 못 본 것 같다. 노트를 자연스럽게 품 안에 넣었다. 민주혁은 창틀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멀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너는 뭐 해?”
대체 왜 2층 허공에 떠 있는 걸까. 민주혁의 주위를 시원한 공기가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 더위를 뚫고 가느다랗게 불어오는 바람에 내 머리칼도 살짝 흩날렸다.
“나도 그냥. 들어가도 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민주혁이 창틀을 훌쩍 넘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민주혁이 내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내일이면 바로 출발하잖아. 그래서 얘기해 주러 왔어.”
아, 그거였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골짜기 근처에 있는 마을로 갈 거야.”
“마을?”
라엔도 그렇게 말했었다.
-답신이 없었던 마을이 한 군데 있어요. 그곳으로 먼저 갈 거예요.
큰일이 있는 거라면 연락이라도 왔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은 그 마을에 먼저 들르는 거라고 설명했다.
민주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 너는 계속 신전에서만 지냈다고 했잖아. 그래서 좀 불편할지도 몰라.”
“뭐가 불편해?”
“갑자기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사람이 많아?”
사람들이 바글대는 곳에 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각대는 발걸음 소리와 저마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한가운데서 내 존재가 서서히 흐릿해지고 묻혀 버리는 것 같았다. 잊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점점 투명하게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내 앞에서 민주혁이 잠깐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내 머리칼을 세게 헝클였다.
“아니. 걱정 마. 작은 마을이거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혹시나 해서.”
“그러면 괜찮아.”
“다행이네. 그래도 힘들면 말하고. 옆에 있을 테니까.”
민주혁이 내게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다음 말을 이었다.
“올해가 끝날 때까지는 레데오로 못 돌아올지도 몰라.”
“그렇게 바빠?”
“어. 돌아봐야 할 곳이 조금 많아서. 이어서 쭉 이동할 것 같아.”
민주혁이 나를 향해서 손을 살짝 까딱였다. 살갗에 닿아 오던 더운 공기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회오리처럼 내 몸을 시원하게 감싸며 돌았다.
잠깐 망설이던 민주혁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균열이 열린 곳이 많다면 부상을 입는 일도 많을 거야.”
“조심해야겠네.”
“항상 조심하고 있어. 그런데 마물을 처리하다 보면 이래저래 상태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거든.”
그건 그래 보였다. 애초에 적은 인원으로 상대해야 하니까. 게다가 마물이 다른 데로 스며드는 거라면 상황이 더 어려워졌을 터였다.
다들 여러 가지 경우를 고려해서 전략을 세우는 것 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서 마물의 공격 양상이 달라진다면 어떤 경우가 있을지 다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밤이 내린 숲에서는 네 덕분에 몇 배는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어. 그건 고마워.”
주먹을 잠깐 쥐었다가 편 민주혁이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멀리 봐야 하잖아. 무리하지 마. 네가 쓰는 게 신의 힘이라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
“대가 같은 건 없어. 그건 내가 알아.”
여기서는 단호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설마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민주혁이 어쩐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손끝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를 훑는 듯한 시선이었다. 민주혁이 평소답지 않게 느릿한 속도로 말을 꺼냈다.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대가를 바친 적이 한 번도 없는 거야?”
“어. 정말 한 번도 없어.”
“신전에 있을 때도?”
“갑자기 신전은 왜? 거기서도 없어.”
“…….”
잠깐 말을 멈췄던 민주혁이 손을 딱 튕겼다. 아까부터 내 주위를 시원하게 감싸고 있던 바람이 뚝 끊겼다. 내 이마를 간질이며 휘날리던 머리칼이 다시 내려앉았다.
민주혁은 어느새 다시 입가에 웃음을 띤 채였다.
“너무 덥지 않아?”
가벼운 목소리였다. 아니, 갑자기? 주제 전환이 너무 빠른데.
“방금 네가 마법 푼 거 아니었어?”
“그래서 더워?”
“별로 그렇지는 않아. 그건 왜?”
민주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쉽지 않네, 하고 말하는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잠깐을 그러고 있던 민주혁은 곧 고개를 다시 번쩍 들었다.
“나는 더워서.”
물론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민주혁을 바라봤다.
“선이한, 네가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걸 보니까 숨도 못 쉬겠어.”
민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창틀에 앉은 나를 내려다봤다.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손등에 핏줄이 보였다.
“옷, 벗어 볼래?”
간절한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