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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59화 (59/150)

059화.

준비됐어

송하견은 잠든 선이한의 곁으로 다급히 다가갔다. 책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린 채였다.

선이한은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깨어나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여린 몸을 흔들면 잠깐은 눈을 떴다. 그러나 멍한 눈동자에 자신을 흐릿하게 담아내고는 곧바로 다시 잠에 빠졌다.

헐떡이는 숨에 섞인 건 공포였다. 찡그리듯 감은 눈 아래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선이한은 그렇게 몇 시간 즈음 꿈을 헤집으며 앓다가 실이 툭 끊어지듯 미동도 없이 잠들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그날 이후로 송하견은 하늘이 새벽으로 물들 때면 한 번씩 연구실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일같이.

닫힌 방문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 댈 때면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며 몸을 굳히곤 했다.

선이한이 악몽을 꾸는 일이 잦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선이한은 그럴 때마다 꼭 열이 오르곤 했다.

높은 열이든 낮은 열이든 약을 먹여도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갛게 물든 뺨이 서서히 가라앉는 건 그 꿈이 끝나고 나서부터라는 걸, 송하견은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지금도 선이한은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송하견은 오늘의 대화로 확신했다. 선이한의 꿈이 신의 힘을 받은 것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잠결에 드문드문 내뱉는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얼추 조각이 맞추어졌다. 강제적인 일이었겠지.

그러나 아까 상황을 설명하던 선이한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그래서 송하견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신의 힘을 받은 일이 제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선이한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 모를 리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자기가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대답은 그 두 가지뿐인데.

송하견은 선이한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어딘가로 가야만 한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그 말에는 자기 의지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컸다. 그 미묘한 어감을 송하견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선이한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연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신의 힘을 받아야만 한다.’

어쩌면 선이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의무처럼 받아들인 것 아닐까.

송하견은 선이한이 신전에서 좋은 기억이 없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송하견 뿐만 아니라 다들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선이한의 한발 물러나는 태도나, 자기에게 향하는 시선을 낯선 것처럼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자기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행동이나. 그런 것들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선이한은 신전에서 쭉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건 늘 뒷전으로 미루면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하견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선이한.”

눌러 내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송하견은 선이한에게로 허리를 숙여 동그란 이마를 쓸어 냈다.

울먹이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잠들지 않은 선이한에게서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송하견은 잠깐 몸을 굳혔다. 턱 막히는 것 같은 숨을 애써 가다듬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와 정신이 들지 않았을 때 보이는 면이 다르다면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 송하견은 후자를 믿는 쪽이었다.

감정을 묻어 두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이 될 수 있었다. 송하견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기 싫은 건, 싫다고 해.”

수건에 물을 적신 송하견이 그걸 선이한의 열이 오른 이마 위에 올렸다.

선이한은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송하견은 그게 정말 괜찮다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미인지 줄곧 고민했다.

“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송하견은 생각했다. 자기는 선이한에게 줄곧,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선이한이 원하는 것만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건 자신이….

송하견은 이어지던 생각을 끊어 냈다. 그러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선이한은 이제야 미동 없이 잠든 채였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니 아직도 살갗이 달아올라 있었다.

‘열이 꽤 높아.’

지금쯤 약을 한 번 더 먹여야 했다.

송하견은 선이한을 조심히 일으켜 앉혔다. 축 늘어지는 목을 받치고 열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그 안에 해열 효과가 있는 시럽을 한 방울씩 흘려 넣었다.

입가에서 턱으로 주륵 흘러내리는 끈적한 시럽을 손으로 찬찬히 훑어 내며, 송하견은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한참을 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송하견의 생각대로 선이한은 그다음 날 하루를 내리 앓았다.

선이한이 눈을 떴다.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세상을 담아냈다.

‘어, 잠깐만.’

아침이었다. 세상이 어스름한 푸른빛으로 밝아 있었다. 아침 공기가 연하게 덮인 방 안이 숨죽은 듯이 고요했다. 주위에 약초 향기가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것도 너무 익숙한 천장. 여기는 송하견 방인데? 분명히 잠들 때는 여기가 아니었다. 왜 갑자기 레데오로 돌아와 있는 거지.

“선이한.”

송하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인기척도 없어서 옆에 있는 줄 몰랐다. 송하견이 내게로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러고는 내 이마 위에 놓였던 미지근한 수건을 걷어 냈다.

“…몸은 어때?”

“네? 괜찮…, 콜록.”

목이 잠겨 있었다. 큰일이다. 이 상황은 익숙했다. 내가 오래 잤던 게 틀림없었다.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일주일밖에 쉬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신전에 가서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내 어깨를 송하견이 가만히 짚었다. 그러고는 내 등허리를 천천히 받쳐서 일으켜 앉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송하견은 유리잔을 직접 내 입으로 가져다 대 줬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을 몇 모금 마시니 그제야 목이 좀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났다.

“하견 형,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하루. 어제 아침에 돌아왔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송하견이 다급한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어제 신전에 연락했어. 여기 도착하자마자.”

“신전에 연락할 방법이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대답은 어땠나요?”

“규정상 안 된다고….”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송하견이 내 뺨을 살짝 쓸었다. 달래는 듯한 손길이었다. 송하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락 수단은 있어. 다시 연락해 볼 수도 있고. …네가 직접 말하고 싶으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일단 스승님과 말씀을 나눠 봐야 했다. 송하견이 내 턱을 가볍게 쥐었다.

“그만해. 열 떨어진 지 얼마 안 됐어.”

아무래도 내가 잠들기 전에 송하견이 말했듯 몸살이 났던 게 맞아 보였다. 상황이 정리되면 몸 상태에 대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건 정말 문제가 있었다.

송하견이 내 다리와 등을 받쳐서 나를 안아 들었다.

“형, 내가 걸을게요. 어디로 가야 해요?”

“…지금, 몸에 힘 들어가?”

“어….”

생각해 보니 몸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뜨거운 물에 푹 담가졌다가 갓 나온 것처럼 흐물흐물한 느낌이었다. 이걸 이제야 알다니 내가 정신이 없긴 했나 보다.

“고마워요, 형.”

“열이 높았으니까. …기대.”

송하견은 방문을 나서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복도가 휑했다. 하긴 이 시간이면 다들 잘 시간이었다. 아직 아침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공기가 이전보다 조금 더워진 것 같았다. 벌써 여름이 부쩍 다가오는 것 같았다. 봄은 늘 빨리 가 버렸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송하견의 몸이 살짝씩 흔들렸다.

“…다들 서재에 있어.”

“네? 이 시간에도요?”

“응.”

왜 이 시간에 서재에 있는 건지가 궁금했던 거였는데. 그러나 내가 이 말을 꺼내기 전에 송하견은 이미 서재 문 앞에 서 있는 채였다.

송하견이 마법을 썼는지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송하견의 말처럼 세 사람이 모두 있었다.

라엔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박율은 그 맞은편에 검은색의 기다란 소파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앉은 채였고, 민주혁은 벽에 기대서 있었다.

모두가 멈춘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곧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이한! 이제 괜찮아?”

“이한, 심하게 앓았어요. 지금은 좀 어때요?”

“걱정했어, 이한아. 뭐라도 먹을래? 지금 해 줄까?”

괜찮다는 말을 다섯 번쯤 한 것 같다. 지금은 뭔가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송하견은 침착하게 나를 소파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연락 넣는대. 신전에.”

“그래. 결정했구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민주혁이 송하견의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서서 서재 밖으로 사라졌다.

라엔이 내 앞으로 조그만 유리잔을 띄워서 보냈다. 송하견이 그걸 집어서 내 입에 가져다 대 줬다. 적당한 온도의 꿀차였다.

“신전에서 제공해 준 연락 수단이 있어요. 주혁은 지금 그걸 가지러 간 거예요.”

곧 민주혁이 돌아왔다. 품에 영롱한 파란색의 커다란 수정을 안은 채였다. 라엔이 책상 위로 도톰한 방석 같은 것을 깔자 민주혁이 수정을 그 위에 올려 두었다.

“이 수정을 깨면 연락할 수 있어, 이한아. 가루가 돼서 다 흩어지기 전까지. 준비되면 말해.”

“준비됐어요.”

“바로? 급하게 하지 않아도 돼.”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지금 마음이 급한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준비가 안 되지는 않았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침착하게 잘할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러면 시작할게. 이건 마법으로는 못 깨는 거라서 좀 시끄러울 거야. 형님들, 시작하겠습니다.”

민주혁이 박율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뒤에서 내 귀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귀를 스치는 손이 따뜻했다.

민주혁이 수정 위에 가느다란 못 같은 것을 댔다. 그러고는 길쭉한 은색 막대로 그 위를 세게 내리쳤다. 걷어붙인 팔뚝에 힘줄이 솟는 모습이 보였다.

민주혁이 그렇게 서너 번을 반복하자 수정이 반으로 쪼개졌다. 쪼개진 부분부터 반짝이는 푸른색의 가루가 흘러나왔다. 그 가루는 연기처럼 위로 솟구치며 서서히 흩어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님 목소리였다. 혹시라도 다른 신관님이었으면 상황이 복잡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선이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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