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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58화 (58/150)

058화.

중요한 일

아까는 지직거리며 불안정해 보이던 상태 창이 멀쩡히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페널티까지 주고 있었다. 고장 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제 존재를 격렬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는데.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피가 주륵 흘러나오는 느낌이 났다. 송하견이 이걸 봐서는 안 됐다. 서둘러서 말을 이었다.

“아니, 콜록. …형, 들어오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방금까지 자다가 일어나서인지 다리에 힘이 곧바로 풀렸다.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는 순간,

우당탕.

앉아 있던 의자까지 나동그라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주 난리가 났다. 나는 이런 돌발 상황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침착해야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며 빠르게 목소리를 냈다.

“들어오지, 마…요….”

그러나 문은 이미 벌컥 열린 채였다.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에 엎어져 있는 내 모습이 담겼다. 상황은 늘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게 꿈일 리가 없었다. 송하견이 내게로 훅 다가왔다. 빠른 속도에 바람이 살랑 불었다.

“형…. 잠깐, 괜찮…, 욱.”

피 맛이 비릿했다. 쏟아져 나오는 피에 말을 제대로 잇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야 했다.

“말하지 마.”

송하견이 내 목소리를 단호하게 끊어 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내 등에 가져다 대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뱉어. 참지 말고.”

송하견의 손이 닿은 등 쪽이 뜨거운 것 같았다. 입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아, 이거 언제쯤 멈출까. 바닥도 엉망이었다.

송하견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건 페널티가 모두 끝난 이후여야 한다. 지금은 기다릴 때였다.

송하견은 가만히 앉아서 내 등을 쓸어내렸다. 페널티는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멈췄다.

“하견 형, 이제 괜찮아요. 멈췄어요.”

소매로 입가를 쓸었다. 송하견은 내가 피를 뱉는 증상이 완전히 멈췄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클린 마법을 썼다. 그리고 내 몸이 번쩍 들렸다.

몸이 찬 바닥에서 떨어져서 푹신한 침대 위로 놓였다. 포근하게 감기는 이불이 따뜻했다.

“속은, 안 아파?”

“네. 괜찮아요.”

나를 내려다보던 송하견이 질문을 그만뒀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짚어 보고 목덜미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참 내 상태를 확인하던 송하견이 허공에 서로 다른 색깔의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 세 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텅 빈 커다란 플라스크 하나를 자기 손에 쥐었다.

세 가지 색깔의 액체가 비율을 맞추듯 커다란 플라스크 안으로 조금씩 섞이기를 반복했다. 송하견은 섞이는 액체를 바라보며 플라스크의 목 부분을 잡고 천천히 돌렸다.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 위로 느릿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열이 조금 있어. 피를 토했으니까, 몸도 안 좋을 거고.”

열이 난다고? 그럴 리가. 이마로 손을 가져다 대 보았지만 미지근했다.

송하견이 이마로 가져다 댄 내 손을 잡아서 내렸다. 그리고 플라스크를 내 손에 쥐여 주며 입을 열었다.

“…이마에만 열이 오르는 건 아니야.”

무슨 뜻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내 손도 뜨거워서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구나.

그렇지만 지금 열이 나는 건 정말 아닐 텐데. 몽롱한 느낌도 없었다. 체온은 원래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거였다. 송하견의 손이 차가운 편일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플라스크에 담긴 액체를 세 모금 정도 마시자 송하견은 그걸 다시 가져갔다. 공중에서 흔들리던 모든 플라스크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한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다리… 봐도 돼?”

“네?”

“…넘어졌잖아.”

넘어진 건 아니고 그냥 주저앉은 거였다. 그렇지만 의자가 쓰러질 때 소리가 컸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딱히 숨길만 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길게 내려온 내 옷을 천천히 걷어 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몸이 살짝 떨렸다. 옷을 입으면 다리가 드러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보여 주는 게 조금 어색했다.

외상은 없었다. 당연했다. 물론 내상도 없을 터였다.

송하견은 내 다리를 조심스럽게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이번에는 내 발목을 살짝 쥐었다. 단정한 손안에서 발목이 느릿한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아파?”

고개를 저었다. 그걸 잠시간 반복하던 송하견이 손을 떼어 내고 내 옷을 다시 덮어 줬다.

“…지금 이상은 없는데. 나중에라도 아프면 바로 말해.”

“네. 고마워요, 형.”

“잘 수 있겠어?”

“어…. 네?”

“…놀라서, 자기 어려울까 봐.”

송하견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고 자기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송하견은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금방 또 다른 플라스크를 만들어 냈다.

이번에는 그 안에 분홍색의 투명한 액체가 빙빙 돌고 있었다. 송하견은 스푼에 넘치지 않도록 액체를 조심히 따랐다.

내 입 앞에서 액체가 찰랑이는 스푼이 멈췄다. 어쩔 수 없었다. 입을 벌리자 꿀처럼 달콤한 액체가 입 안을 훑고 삼켜졌다.

“이건 무슨 약이에요?”

“…잠이 오기 쉽게 하는 거. 긴장을 풀어서.”

송하견은 내가 약을 잘 넘기는 걸 도와주는 것처럼 등을 두어 번 쓸어내리더니 나를 자리에 천천히 눕혔다. 느릿하고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많이 먹으면, 내성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아, 그래서 조금만 마시게 한 거였구나. 지금 몸이 조금 나른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내성이 생기려면 한참은 남은 듯싶긴 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졸릴 거야. 바로 자.”

점점 의식이 흐려지려던 찰나,

‘아, 맞다.’

중요한 할 말이 이제야 생각났다. 꼭 중요한 일은 자리에 눕고 나서 생각난다. 그래도 지금 옆에 송하견이 있어서 바로 말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송하견을 돌아봤다.

“형, 이번에 레데오에 돌아가서는 얼마나 쉬어요?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까지요.”

송하견이 내 고개를 바로 천장을 향해 돌렸다. 곧 눈가에 시원한 느낌의 마른 수건이 덮였다. 연한 냉기가 이마를 식혔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송하견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기에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왜? …많이 힘들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물론 내 체력에 조금 문제가 있긴 했다. 바닥을 찍고 있는 체력도 해결해야 하긴 할 텐데 지금 하려고 한 말은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되면 신전에 가 봐야 해서요.”

“…가 봐야 해?”

“네. 꼭이요.”

신전에 방문하려면 몇 주 전에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가 없으면 막무가내로 찾아가도 신전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었다.

“일주일 즈음, 쉴 거야.”

“음….”

그러면 시간이 조금 어려웠다. 지난번에 더워질 때쯤이면 많이 바빠질 거라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단 신전에 찾아가서 스승님이라도 만나 볼까. 정해진 규칙을 깨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부탁드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송하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가 봐야 하는 거야?”

“네.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중요한 거야? 아까 말한, 신의 힘을 받은 것 때문에?”

“비슷해요.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형들 일정이 먼저라는 건 알아요. 그냥 언제쯤 가능할지 알고 싶어서요.”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응. 일정은 다 같이 얘기하자. 지금은 자고.”

눈가에 덮인 수건에서 시원한 풀 향이 났다. 송하견이 가만히 말을 멈추니 방 안에 정적이 들어찼다. 공기마저 고요했다. 잠에 점점 빠져 가는 의식 사이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하견 형은…. 무슨 일로 찾아왔던 거예요?”

“…그냥.”

그리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송하견은 조그만 목소리로 몸살이라도 났을까 봐, 하고 덧붙였다.

어쩐지 노크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내가 침대에서 제대로 잤다면 분명히 잠든 채로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밖에 오래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몸살이 나지는 않는다. 송하견은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말이 머릿속에서만 빙빙 돌았다. 몽롱해지는 의식에 입을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런데 송하견은 언제 나가려고 하는 거지? 아직도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은 채였다.

“이제 자.”

얼핏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목소리를 끝으로 기억이 없었다.

선이한은 송하견의 앞에서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새벽이 깊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새파란 꽃송이가 어둠에 잠긴 채 낙하하고 있었다.

방 안을 고른 숨소리가 메웠다. 그 안정된 호흡 소리에 녹아든 잠깐의 평화를 송하견은 침착하게 지켜봤다.

“…윽, 흐으.”

가느다란 신음이 고요함을 깨웠다. 송하견은 익숙하게 주위에 빛을 만들어 두고 선이한의 식은땀 맺힌 이마를 쓸었다. 후끈한 열기가 손바닥을 데웠다.

선이한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낸 송하견이 주위의 공기를 식혔다. 서늘한 바람이 열에 달뜬 몸 위로 차근히 덮였다.

‘몸살이 난 건가? 아니면 악몽을 꾸는 건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몸살이 날 거라는 건 예상했다. 선이한의 몸 상태로 봤을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종일 무리했을 테니까. 아까도 미열이 있었다.

그래서 약을 먹였는데 열이 채 떨어지지 않아 있었다. 오히려 더 오르는 듯했다.

‘이 정도로 열이 안 떨어지는 거면, 이번에도 악몽 때문일 수도 있겠어.’

송하견이 악몽을 꾸는 선이한을 처음 본 것은 꼭 지금처럼 새벽을 지날 즈음이었다. 송하견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했다.

그날 송하견은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완전히 우연이었다. 평소라면 소환 마법을 썼을 테니까.

왜 그날은 직접 가지러 갔는지 송하견도 알지 못했다. 직감이었을지도, 혹은 잠들어 있을 이의 얼굴이 문득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송하견이 방문을 열고 마주한 것은 더운 숨을 뱉으며 이불에 푹 파묻혀 바르작대던 선이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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