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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57화 (57/150)
  • 057화.

    알고 있었구나

    박율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형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박율이 내게 이렇게까지 해 줄 이유가 있을까? 시간을 들여서까지 나를 찾아와 줄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로.

    잘 모르겠다. 묻어 두고 있었지만 가끔 생각날 때가 있었다. 처음의 박율이. 나와 눈을 마주할 때 잠깐씩 굳히던 표정이 아직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근래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모든 일이 해결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의심의 씨앗.’

    나는 그게 아직 발아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은 채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내가 자꾸 이렇게 이상한 곳으로 이동해 온다거나 하는 수상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게 양분이 되어서 언젠가 싹이 틀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게서 고개를 돌리겠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날 터였다.

    내게서 시선을 거둬 갔을 때, 나는 그제야 무엇이 잘못됐는지 지나온 길을 더듬더듬 짚어 볼 뿐일 것이다. 신전에서 보냈던 숱한 날들처럼. 그건 싫었다.

    “왜냐면, 율이 형은….”

    입을 뗐지만 이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앞에서 박율이 내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해 왔다. 차분한 눈동자였다.

    ‘나는 지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박율이 내게 뭔가를 물어본다고 해서 내가 그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 더 많았으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제야 조금 침착함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주제로 얘기를 꺼내는 건 다음에 해야 됐다. 적어도 내가 박율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게 된 후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형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을 이을수록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박율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주제는 이제 넘어갔으면 좋겠다. 말을 어떻게 돌리지?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지.”

    박율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침을 꼴깍 삼켰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다음에 이어질 말은 뭘까. 당장 모든 것을 말해 달라는 얘기? 아니면, 이제 내가 말하기를 더 기다려 줄 수 없다는 얘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넘기지 못할 거라면 마주해야 했다. 대답은 못 하겠지만 뭐라도 말하면 진심이 통하지 않을까. 고개를 번쩍 들려는 순간,

    “형은 항상 궁금했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박율이 내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그리고 내 머리칼을 천천히 헝클였다. 느릿한 손길처럼 박율의 목소리가 가만히 이어졌다.

    “이한이가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뭐가 그렇게 서럽고 힘들었는지.”

    내 양쪽 뺨을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박율이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지.”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내게서 손을 떼어 내고는 팔을 살짝 위로 뻗었다. 박율의 단정한 손바닥 위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란 꽃송이가 차근차근 놓였다.

    “그래서 이한이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알 것 같네.”

    박율의 손 위에 쌓였던 꽃송이 주위로 빛무리가 반짝 빛났다. 꽃에서 슬금슬금 자라난 줄기가 서로 엮였다.

    어느새 다발로 묶인 꽃송이를 박율이 정돈하듯 찬찬히 쓸었다. 그러고는 그걸 내게 불쑥 내밀었다.

    “자, 일단은 여기서 먼저 나가자.”

    내 품에 안긴 꽃에서 진한 향기가 났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

    짝.

    옆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동시에 바람이 훅 불었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초록색 덩굴로 이어진 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흰색 건물이 있었다. 하늘은 똑같은 보랏빛 새벽이었다. 나는 아침에 땅에 뿌리 박힌 꽃을 발견했던 그 장소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금방 나올 수 있었다니.

    내 옆에 선 박율이 바람에 헝클어졌던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입을 열었다.

    “형이 용사로 선택받았을 때, 처음 신전에 갔었어.”

    박율이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다시 가져가서 자기 손에 들었다.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래서 이한이를 볼 때 가끔 그때 생각이 났거든.”

    눈앞의 하얀 건물을 올려다봤다. 나도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 신전을 떠올렸다. 원래 지나간 일이라는 건 예상치 못한 데서 스치듯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율도 신전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박율 역시 내가 아까 받았던 묵직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였구나.’

    박율이 종종 얼굴을 굳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앞으로 꽃다발이 다시 불쑥 내밀어졌다. 파란 꽃 사이로 노란색의 조그만 꽃이 쏙쏙 박혀 있었다.

    “이한이가 앞에 있을 때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율이 형. 그리고 처음에만 잠깐 그랬잖아요. 이제는 아닌 거 알고 있어요.”

    “…정말 다 알고 있었구나.”

    내 위로 도톰한 담요가 덮였다. 박율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을 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다들 기다리고 있겠다.”

    건물을 빙 돌아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율은 결국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답을 내어 주었구나. 나는 박율에게 무엇도 먼저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내 옆에서 가만히 걸음을 옮기는 박율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박율이 나를 내려다봤다. 박율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끼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건물 안에 하얗게 빛나는 지도가 떠올라 있었다.

    “…왔네.”

    송하견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이쪽으로 누군가 훅 다가왔다. 달콤한 바람이 스쳤다. 나를 살포시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걱정했어요. 기다렸어요.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지 마요.”

    라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라엔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매달리듯 나를 안은 라엔의 등을 토닥였다. 옆에서 박율도 작게 웃으며 라엔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형이 데려올 거라고 했잖아, 라엔아.”

    “리더 형…. 고생했어요.”

    “다녀오셨습니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민주혁이 내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선이한.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어. 괜찮아.”

    “…고생했어.”

    어느새 송하견이 이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송하견이 내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나와 눈을 가만히 맞췄다.

    상황이 조금 진정되고 나는 내가 알게 된 것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다들 일단 쉬고 난 다음에 얘기하라고 했지만 지금은 이게 먼저였다.

    물론 어디선가 끌어온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등에 담요를 덮은 채로, 따뜻한 베개를 안고, 약초 향이 나는 차를 손에 들고 나서야 제대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말 하나 하기도 참 쉽지 않았다.

    “나는 신의 힘을 받았어요.”

    방금 들어갔던 공간은 아마도 신의 힘이 깃든 공간일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내가 신의 힘을 받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제물이나 희생이나,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건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찾아내야 할 것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쓴 것도 치료 마법이 아니라 신의 힘일 거라고 말했다. 라엔이 눈을 발갛게 물들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력으로는 인세에 큰 개입이 불가능하지 않은가요? 치료도 가능하지 않을 텐데….”

    라엔은 말을 마치는 듯싶다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 잘 모르는 거면 괜찮아요, 이한. 같이 알아보면 되니까요.”

    나는 라엔의 이런 점을 본받고 싶었다. 망설이면서도 알고자 하는 것을 꿋꿋하게 묻는 모습.

    처음에는 라엔의 질문 덕에 꽤 힘든 상황이 있었으나….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질문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아니에요, 라엔 형. 나도 고민해 봤거든요. 신관님들이 쓰는 신력은 신에게서 빌려 오는 거예요. 대가를 드리고요.”

    앞에서 내 얘기를 듣던 민주혁이 몸을 잠깐 굳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민주혁의 시선이 내 손목 쪽으로 향했다. 민주혁이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으므로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신의 힘을 몸 안에 직접 받아 냈어요. 그래서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러면 대가는 필요 없는 거야?”

    민주혁이 내게 곧바로 물어 왔다. 치른 적 없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일단 알겠다며 계속 말해 보라고 했다.

    “음…. 이게 전부예요.”

    다들 대략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라엔을 바라봤다. 조금 기대했지만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퀘스트 창은 뜨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중에 뜰 수도 있었다. 지금 시스템이 조금 오락가락하는 듯 보였으니까.

    “…그러면, 박율 형만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것 같네요. 리더 형은 용사로 선택받을 때 신에게서 직접 힘을 받았으니까요.”

    “…응.”

    박율이 그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제 알게 됐다. 좋아. 상황이 다 정리됐다. 이제….

    “…이제 쉬어.”

    송하견이 내 손목을 훌쩍 끌어당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절로 걸음을 뗐다.

    아니, 잠깐만. 뭔가 할 말이 남았던 것 같은데. 뭐였지?

    “그래, 이한아.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네.”

    발걸음 소리 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겹쳐졌다.

    “피곤하지는 않은가요?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줘요.”

    내 머리 위로 쓰다듬듯이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야, 잘 자.”

    등을 힘주어 두드리는 느낌이 났다.

    밝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달각, 닫혔다. 나는 순식간에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어?’

    눈 깜짝할 사이였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등을 뒤로 돌렸다.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그대로였다.

    커다란 창밖으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파란 꽃이 달빛에 옅게 비쳤다. 그 모습이 꼭 아침이라는 껍질을 벗겨 내고 새벽이 속살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조용했다. 탁자 앞의 의자에 가만히 기대어 앉았다.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맞다, 마지막으로 본 퀘스트 창이 뭔가 이상했는데, 혹시 고장 난 게 아닌지 시스템도 불러 봐야 하고….

    눈이 점점 뻑뻑해지는 것 같았다. 의식이 붕 뜨는 것처럼 생각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으면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았다.

    잠깐만 눈을 감고 있을까. 그러면 정신이 맑아질지도 몰랐다. 정말 잠깐만….

    똑똑.

    방문을 조그맣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번쩍 깼다.

    아, 언제 잠들었지. 나는 탁자에 엎드린 채였다. 창밖은 아직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이 자세로 오래 잔 건 아니었구나.

    “누구예요…?”

    문밖에는 작은 인기척도 없었다. 벌써 간 건가?

    “…깨어 있었네. 들어가도 돼?”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하견이구나.

    “네, 들어….”

    잠에서 막 깨어나서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 차올랐다. 눈앞에 이질적인 파란빛이 반짝였다.

    「‘간헐적 각혈’ 페널티 적용 중입니다.」

    뭐? 아니. 잠깐만. 지금?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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