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결국 찾아낼 거니까
땅에 무릎을 댔다. 손을 가슴께로 가져다 대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진정될 때까지.
‘좋아.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
역시 사람은 조금 차분하게 생각해야 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세상에 막막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멀어질수록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신 차리자. 팔을 들어 눈가를 쓸었다. 시야가 선명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품을 뒤적이자 마법이 담긴 종이가 손끝에 빳빳하게 걸려 왔다. 그중에 지금 필요한 마법 두 개를 골라서 꺼내 들었다.
지이익.
종이를 한꺼번에 찢었다. 보랏빛 새벽 공기를 뚫고 날카로운 소리가 반짝 울렸다.
주위가 밝아졌다. 동시에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방금 찢은 종이에 들어 있던 건 빛 마법과 부유 마법이었다.
내 주위로 바람이 사락 불어왔다. 시야가 점점 높아졌다. 이곳의 구조가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도달할 곳은, 내가 정해요.”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더는 없었다. 이를 꾹 깨물었다.
‘신전에 가 봐야 해.’
답은 그곳에 있다. 제물, 희생….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찾아가야 했다. 가서 찾아내야 했다.
지금 고민하는 건 무의미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눈앞의 일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아까 그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겠지. 여기서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몸이 둥실 떠오르자 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마음이 차차 가라앉았다. 땅에 있는 것들이 조그마하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오니 이제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미로였구나.’
그런 것 같긴 했다. 길이 이리저리 엇갈려 있었다. 시야가 닿는 먼 곳까지 미로가 주욱 펼쳐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이 중앙인가?’
초록색 덩굴이 원통형으로 넓게 뭉쳐져서 감긴 채 다른 벽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 위로 내려서 자리에 풀썩 앉았다.
손바닥에 닿는 덩굴이 조금 축축했다. 새벽이어서 그런지 이슬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손끝에 쓸리는 차가운 감촉에 이제야 현실감이 확 다가오는 듯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 고민하며 숨을 찬찬히 고르고 있을 때,
띠링.
귓가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몸이 흠칫 떨렸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Ⅴ 실패!
페널티 ‘간헐적 각혈’이 지속 시간 ‘3개월’ 동안 유지됩니다.
그 앞으로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
수락 / 거절
대충 휘갈긴 것처럼 보이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뒤로 몸을 누였다. 파랗게 빛나는 상태 창 뒤로 보랏빛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언제부터 선택지를 줬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꼭 언제는 퀘스트를 시작할 때 내 의사를 반영했다는 것처럼 수락과 거절이 적혀 있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마치 명목상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당해 온 게 있지 않으냐고.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퀘스트이고 페널티만 받을 텐데, 이쯤에서 그만둬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내가 뭘 선택할지 다 알고 있다고.
왜냐하면, 길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게 친절을 가장해 그만두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수락할 거야.”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퀘스트가 수락됐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
눈앞의 상태 창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가 정해진 답을 내뱉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걷는 길은 내가 정하고, 어디로 향할지 결정을 내리는 것도 나였다. 반항하듯 내뱉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거야. 그러니까 수락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의 상태 창이 깜빡였다. 꼭 오류라도 난 것처럼 빛이 이리저리 번졌다. 흔들리는 상태 창 위에 새로운 글자가 지직거리며 만들어졌다.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
성공 시:
실패 시:
제한 시간:
깨어진 것처럼 작은 빛 알갱이가 튀어 오르는 퀘스트 창을 가만히 바라봤다. 퀘스트 제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양.
곧 눈앞에서 퀘스트 창이 저절로 훅 사라졌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채였다. 빛이 꺼진 눈앞에 다시 차가운 새벽의 하늘이 펼쳐졌다.
‘제대로 수락되긴 한 건가?’
그것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퀘스트 창, 하고 가만히 말해 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눈을 꾹 감았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우선 내가 본 장면이 나의 어린 시절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제물이었다.’
신에게 바쳐진 제물. 여기까지 생각하자 손끝이 잠깐 떨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손을 꾹 말아 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제물이지만, 희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희생하지 않는 거라면 제물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건 알 수 없었다. 일단 넘어가야 했다.
‘푸른빛.’
그건 신의 힘이겠지. 그리고 흡수됐다는 건 지금 내 안에 신의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푸른빛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시스템.’
그래. 이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신의 힘이 맞다면 왜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지? 신력은 신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게임하듯이 장난스러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연관성은 있어 보였으나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됐다.
‘왜 기억이 안 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그 나이대일 때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통째로 도려낸 것처럼 그때의 시간이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말이 그런 의미일지도 몰랐다. 지금 잊은 것들을 나중에 알게 된다는 의미.
‘뭐든 상관없어.’
우선 신전에 가서 신께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며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신을 모시는 장소인 신전밖에는 없을 테니까.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정리가 다 됐다.
나는 신과 대화할 수 있는 자세한 방법을 모르니까 일단은 스승님께 여쭈어야 했다. 물론 특별히 어려울 건 없을 것 같긴 했다. 이미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신전에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정식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그래도 신께 말씀을 전하는 절차는 배우는 게 정상이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신전에서 보통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신관님들께서는 내게 정말 한 톨의 관심조차 두지 않으셨고, 스승님께서는 내게 세세한 가르침까지 주시기에는 너무 바쁘셨다.
‘…스승님.’
스승님도 내가 제물이라는 걸 알고 계셨을까. 아니, 알고 계셨겠지. 그렇다면 나에게 향했던 스승님의 모든 시선은… 전부 동정일 뿐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자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갑자기 모든 의지가 증발해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피가 쭉 빠져나가서 몸이 껍데기만 남고 텅 비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했다.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버텼던 모든 시간이.
눈앞이 캄캄했다. 당연했다.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눈을 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짝!
그때 저 위쪽에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눈을 반짝 떴다.
보랏빛 하늘에서 노란색의 환한 빛무리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꼭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누구지?’
그 안에 누군가의 인영이 흔들리듯 보였다. 빛무리가 이쪽으로 바로 다가왔다. 곧 옆에 사뿐히 내려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빛이 조금 연해졌다. 가만히 누워 있는 내 앞머리를 슬쩍 쓸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한아.”
박율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접어서 곱게 웃은 채였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어.”
“…어떻게 찾아왔어요?”
“형이 못 가는 데가 어디 있어.”
대답이 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 어떻게 찾아온 걸까. 박율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박율이 내 눈가를 살짝 쓸었다.
“이번에도 눈이 부어 있네.”
“…새벽이어서 그런가 봐요.”
박율이 내 눈 위로 손을 가만히 덮었다. 눈앞에 따뜻한 어둠이 들어찼다. 박율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졸려서 그런가?”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혼자서 무서웠구나.”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딱히 이을 말이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박율이 내 눈 위에 올려놓았던 손바닥을 천천히 옮겨서 이마를 가만히 다독였다.
“이번에는 형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
언제쯤 이한이가 기다렸다는 말을 먼저 해 줄까, 그렇게 혼잣말처럼 내뱉는 조그만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내 이마 위로 찬찬히 닿았다가 떨어지는 손길이 규칙적인 울림을 만들어 냈다. 꼭 차분하고 고요한 심장 박동처럼. 텅 빈 것 같았던 몸이 점차 온기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래. 위험한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박율이 누워 있는 내 몸 위로 손을 부드럽게 뻗었다. 그러고는 옷 위에 내려앉아 쌓였던 파란 꽃송이를 차근차근 걷어 냈다.
“오래 찾았어요?”
생각해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시간이 훌쩍 흐른 것이다. 나야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뜬 것이었지만 박율은 그게 아닐 터였다. 설마 종일 찾아다닌 건 아니겠지.
“찾는 시간은 항상 길게 느껴지지.”
박율이 내 양쪽 손을 감쌌다. 그러고는 나를 부드럽게 일으켜 앉혔다.
“그래도 결국 찾아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 같아. 그렇지?”
박율이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환하게 웃었다. 박율의 머리 위로 파란 꽃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손을 뻗었다. 박율이 내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박율의 금발 위에서 옅게 흔들리던 꽃송이를 손에 쥐었다.
손안에 닿는 꽃이 어쩐지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분명 바뀐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도. 손을 꾹 말아쥐었다.
“율이 형은 내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래.”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안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그런 거요.”
“이한이도 형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더 안 물어봤잖아.”
당연하다는 듯한 박율의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내가 박율에게 더 묻지 않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형이 와 줬잖아요. 나는 그거면 충분하니까요.”
나는 더 이상 이곳에 혼자 있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어떻게 왔는지 궁금한 건 맞았으나 박율이 말하지 않는데도 캐물을 만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율이 형은 아니잖아요. 형은….”
형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서 매번 나를 찾을 필요가 없지 않나요? 그렇게 물으려고 했지만 차마 목소리가 더 나오지 않았다.
박율이 연한 녹색의 눈동자에 나를 가만히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