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길을 잃을 리가
때 하나 타지 않은 순백색의 계단이었다.
건물 뒤편의 외벽에 주르륵 박혀 있는 계단 위로 햇살이 맑게 내리쬐었다. 계단에 쌓인 파란 꽃송이가 아래로 찬찬히 흘러넘쳤다. 그 모습이 꼭 느릿하게 쏟아지는 작은 폭포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계단은 지붕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3층….’
올라가지 못할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여기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랐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봐야 했다.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시야가 높아질수록 따스한 바람이 더욱 세게 불어왔다.
봄의 끝자락이 서서히 다가온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귓가에 바람 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들렸다.
마지막 계단 위로 올라섰다. 둥그런 지붕이 바로 앞에 있었다. 먼 풍경이 보였다. 바닥도 하늘도 온통 새파랬다. 어디가 경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맞다. 여기 있는 꽃도 하얗게 변하려나.’
생각해 보니 잊고 있었다. 서편에 있던 꽃은 탈색되듯이 희게 변했었는데.
지붕 끝으로 걸어가서 경사진 면에 기대어 앉았다. 허공에 발이 달랑 흔들렸다. 주변에 흩어진 파란 꽃을 손에 가만히 쥐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후웅.
파란 꽃이 순간 붕 떠올랐다. 뭐지? 잠깐 공명하는 듯한…. 내 몸 안에서 뭔가와 이어지는 느낌이 얼핏 들었다. 마법을 쓴다면 이런 느낌일까.
허공에 둥실 떠 있던 꽃송이는 곧 나풀나풀 내려와 앉았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채 잇기 전에 옆에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어, 하견 형?”
어느새 송하견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송하견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뒤이어 박율도 바람을 살랑 일으키며 나타났다.
“떨어지려던 건 아니지, 이한아?”
“네? 내가요?”
“그래. 아니면 괜찮아. 여기까지는 어떻게 올라왔어?”
“뒤편에 계단이 있었어요.”
“음, 설마 그 가파른 계단을 말하는 거야?”
“…선이한.”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내 손목이 붙들렸다. 동시에 눈앞의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는 어느새 바닥으로 다시 내려와 있었다. 내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기 전까지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의자에 풀썩 앉은 채였다.
송하견은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높은 곳을 좋아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대체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 걸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박율이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견이가 너 높은 데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철렁한대, 이한아.”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형.”
“그래. 그러면 그냥 조금 놀란대.”
박율이 내 옆으로 살포시 앉으며 말을 맺었다. 송하견은 거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왜요?”
그렇게 물었지만 이번에는 둘 다 대답이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박율이 입을 열었다.
“조심했으면 좋겠으니까. 그것보다, 지금은 줄 게 있어서 찾았던 거야.”
박율의 앞으로 뭔가가 둥실 떠올랐다. 새하얗고 동그란 구름이었다. 내 얼굴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그런데 아래에 나무 막대기가 달려 있었다.
박율이 그 막대기를 내 손에 쥐여 줬다.
“어떻게…. 진짜 구름이에요…?”
이럴 수가. 마법으로는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박율을 올려다봤다. 박율이 맑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먹는 거야. 솜사탕. 마음에 들걸.”
구름도 먹을 수 있구나. 박율은 저번부터 신기한 걸 많이 주었다.
솜뭉치를 입에 살짝 넣었다. 무게도 느낌도 없는 것이 입 안에서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진한 달콤함이 남았다. 설탕을 수저로 한 움큼 입에 넣은 것처럼 달았다.
“…! 맛있어요.”
“그래. 더 먹고 싶으면 말해.”
박율이 내 입술을 살짝 쓸었다. 찐득했던 입가가 다시 말끔해졌다.
박율은 송하견의 손에도 아주 조그만 솜사탕을 들려 줬다. 딱 한 입 크기였다. 송하견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걸 받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레데오로 돌아갈 거야.”
박율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율은 고개를 들어 새파란 하늘을 눈에 담은 채였다.
“봄도 금방 지나간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봄은 특히나 더 짧은 것 같았다.
“날이 더워질 때쯤에는 조금 바빠질지도 모르겠네.”
“…응. 다녀야 할 데가 많으니까.”
사실 나는 지금도 다들 꽤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바빠지는구나.
어쩌면 지금이 평화로운 편일지도 몰랐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여름의 색처럼 파란 꽃송이가 땅으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손에 들린 솜사탕을 다시 입에 넣었다. 여전히 녹을 듯이 달콤한 맛이었다.
◇
박율이 말했던 며칠이 훌쩍 지났다.
-이제 내일 돌아갈 수 있겠다.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들은 말이었다. 내일 떠난다는 건 이 풍경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건물 옆쪽의 의자에 앉았다. 아침 햇살이 밝았다. 바람이 이쪽으로 살랑 불었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쪽에서 둥그런 꽃송이 하나가 방향을 틀어서 이쪽으로 훅 날아왔다.
‘헉…!’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서 앞을 막았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꽃송이였으니까.
내 손등에 닿아 살랑이는 꽃을 쥐어 들었다. 투명한 물빛의 꽃이었다. 이곳에 있는 다른 꽃들보다 조금 연한 색을 띠고 있는 듯했다.
…잠깐만.
겹쳐지는 장면이 있었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시스템이 처음 나타났던 날.’
맞아. 그거였다. 그날의 꿈속.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꽃송이가 날아온 쪽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발목에 스치는 파란 꽃을 헤집으며 그냥 앞으로 쭉 걸었다.
그렇게 도착했을 때, 바닥에 단단히 박혀서 피어 있는 꽃 한 송이가 있었다.
‘분명히 이 지역에 뿌리 내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침을 꼴깍 삼켰다. 홀로 동떨어진 것처럼 찬찬히 흔들리는 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치 빨려 드는 것처럼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손끝이 꽃잎에 스친 순간,
사락.
연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이 잠깐 감겼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큰일 났다.’
나는 처음 보는 장소에 똑 떨어진 채였다.
하늘은 똑같이 파랬다. 그리고 똑같은 파란 꽃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옆쪽으로 벽이 있었다. 초록색 덩굴이 빽빽하게 뒤엉킨 벽이.
‘너무 높은데.’
덩굴이 단단하게 얽힌 벽은 내 키를 훌쩍 넘었다. 반대편에 뭐가 있는지조차 볼 수가 없었다. 앞쪽으로 좁은 길이 하나 나 있었다.
‘나가는 곳이 있기는 하겠지.’
흔들리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길은 점점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앞이 막힌 곳도 있었고, 다시 갈림길로 나뉜 곳도 있었다. 다 똑같이 생긴 벽이어서 지나온 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길, 잃은 건가.”
파랗던 아침 해가 어느새 낮게 내려앉아 노란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나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착잡함을 안고 자리에 잠깐 멈춰 섰을 때,
【길을 잃을 리가 없단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작은 종이 치듯 옅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머리가 지끈 조이는 것 같았다. 듣는 내가 짓눌리는 것처럼 어딘가 근엄하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부터 길은 하나였으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 머릿속에서 퍼지는 목소리가 확실했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춥지 않았음에도 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조금 가쁜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갈림길… 지나왔는데요….”
길이 하나라는 말은 틀렸다. 이곳에 들어와서 한참을 걸었으니까. 무수히 많은 갈림길을 지나왔고, 심지어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길도 네 개로 갈라져 있었다.
한참 공백을 두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아이야. 결국 네가 걸어온 것은.】
차분한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무기물적으로 들렸다.
【하나의 길이지 않느냐.】
하나의 길. 그 말이 머릿속을 빙 돌며 되풀이됐다.
머리에 때려 박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쑤셔 넣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옆으로 몸을 기대니 덩굴 벽에서는 눅눅한 풀 냄새가 났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후욱.
눈앞에 다가오듯 펼쳐지는 장면이 있었다.
신전. 커다란 방.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어둠처럼 새카만 머리칼의 아이가 방 한가운데에 홀로 있었다. 방금 들었던 그 목소리가 텅 빈 어둠 위로 덮였다.
【아이야. 제물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단다. 희생하는 것은 네가 아닐 터이니.】
아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아이의 위로 물빛 꽃이 천천히 쏟아졌다.
【하고픈 대로 하련. 도달할 곳은 정해져 있으니.】
푸른빛이 아이를 감쌌다. 그 빛이 아이의 가는 목을 칭칭 감쌌다. 아이가 겁먹은 듯 몸부림쳤다. 뱉어 내는 흐느낌이 공간을 울렸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단다.】
푸른빛이 아이에게 점점 흡수되는 듯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그 푸른빛에 물들어 갔다. 말간 하늘색이었다. 아이의 눈에서 흘러넘치는 투명한 눈물처럼.
【때가 되면, 알게 될 터이니.】
순간 푸른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에게로 모조리 들어간 듯했다.
【미안하구나.】
다시 반짝 눈을 뜬 아이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새까맣게 돌아와 있었다.
화악.
장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눈을 떴다. 나는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분명히 찰나였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늘이 밤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이 촘촘히 박힌 보랏빛 어둠이었다.
‘방금 뭐였지?’
숨이 목에서 턱턱 걸렸다. 호흡이 가빴다.
그건 분명히… 나였다. 어린 내 모습. 그런데, 나는 기억에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침착하자. 천천히 생각해야 했다.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고 있을 때.
-도달할 곳은 정해져 있느니.
그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욱, 흐으. …우웩.”
속이 메스꺼웠다. 고개를 숙였지만 올라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바닥에 조그만 물방울이 찬찬히 원을 그렸다가 스며들었다.
아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좀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일어나자. 그래, 일단 일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