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선택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을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새로운 상태 창이 앞에 생겨났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보상이 사라집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모든 상태 창이 작은 멈칫거림도 없이 훅 꺼졌다. 파랗게 빛나던 눈앞에 다시 어둠이 들어찼다.
누구 한 명만을 선택해서 보상을 쓸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했다. 보상 이름을 보니까 꽃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 준다는 것 같았는데.
옆에 놓은 등불을 톡 건드렸다. 붉은 꽃잎이 손끝에 걸렸다. 이렇게나 선명한데도 곧 사라지는구나.
뭐, 실패 페널티를 받지 않은 것만 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지나간 보상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어느새 창밖에 어둠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새삼 시간이 이렇게나 빨랐다.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알아채고 났을 때는 이미 어둠은 저 멀리 걷힌 채일 것이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
붉은 꽃이 내리는 이곳에 머무른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라엔은 마나를 과도하게 쓰지 않았다. 곧 부러질 것처럼 나를 대하던 모두의 태도도 한결 나아졌다. 웬만한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맞았다. 다행이었다.
이제는 이곳 서편을 떠나서 동편으로 이동할 거라고 했다.
건물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천히 쏟아지는 붉은 꽃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내 옆으로 민주혁이 다가와서 섰다.
“선이한. 저번에 물어봤었지? 동쪽에는 어떤 색의 꽃이 내릴 것 같은지.”
“어. 흰색은 아니라면서.”
“그래. 이제 곧 답을 찾겠네.”
민주혁이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내 눈 위로 손을 덮었다.
“바로 보면 재미없으니까.”
“나중에 본다고 딱히 재미있어지지는 않아.”
“…이럴 때 보면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뭐가?”
“별거 아냐. 네 말이 맞긴 하지. 답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래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즐거운 거잖아.”
민주혁의 목소리가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가볍게 흩어졌다.
곧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살포시 얹어졌다. 출발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센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 봐.”
민주혁이 손을 천천히 걷어 냈다.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눈앞에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이 조각나서 떨어지는 것처럼 새파란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에도 푸른 꽃이 수북이 깔려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하늘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옅은 꽃향기가 실려 왔다. 방금까지 있던 곳과는 또 달랐다.
향기에도 색깔이 있다면 지금은 바람마저도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원하고 맑은 향이었다.
저 멀리에 하얗고 단정한 건물이 보였다. 손을 뻗어서 그 건물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저기로 가는 건가요?”
“맞아, 이한아. 여기서도 며칠 머무를 것 같네.”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푸른 꽃이 사박거리며 밟혔다. 꼭 조각난 물결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건물 앞에 섰다. 건물 외벽이 네모졌다. 지붕은 둥그런 모양이었다. 여기에도 건물 주위로 하얗고 낮은 울타리가 빙 둘려 있었다. 어쩐지 모든 것들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신전 건물.’
잠깐 그 생각이 났다. 딱딱하고 정갈했던, 그래서 네모난 틀 안에 갇힌 것만 같았던 기분이 다시 기어올라 왔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왜 잊고 있던 신전을 떠올린 거지. 이제 거기는 떠나온 곳이었다.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내 머리 위로 송하견이 손을 턱 얹었다. 휘젓던 고개가 멈춰 세워졌다.
“…어지러워.”
그렇게 말한 송하견이 손을 천천히 떼어 내고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가자.”
건물 내부 구조는 방금까지 있었던 서편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층 꼭대기에 있는 수정구도 문제없이 작동한다고 했다. 나는 1층 방에 똑같이 짐을 풀었다.
다들 바쁠 테고 지금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혼자서 알찬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건물 옆쪽으로 돌아 나와서 나무 의자에 앉았다.
품에서 작은 노트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노트를 한 장 넘기니 빳빳하고 오돌토돌한 감촉의 새하얀 종이가 만져졌다. 눈앞으로 파랗게 쏟아지는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연필을 살짝 댔다.
이건 여기 오기 전에 민주혁이 내게 준 거였다.
-선이한. 이게 널 처음으로 담는 그림이라면서. 그러니까 더 시간을 들이고 싶어.
그렇게 말한 민주혁이 내 품에 종이봉투를 안겨 줬다.
-원래는 그림이랑 같이 주려고 했는데, 그냥 이거 먼저 줄게. 심심할 때 써.
그 종이봉투 안에 있던 게 내가 지금 꺼낸 그 노트와 연필이었다. 백색의 텅 빈 노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뭐 해요, 이한?”
어느새 라엔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냥 있었어요. 형은….”
형은 바쁘지 않아요? 하고 물어보려다가 말을 삼켰다. 바쁘지 않으면 좋은 거지. 라엔도 쉴 시간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엔이 내가 하려던 말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형은,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요?”
말을 한 건 좋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라엔은 내 손에 들려 있는 노트를 살짝 바라보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림 그리는 건 주혁이 좋아해요. 나는 그림보다는 다른 걸 좋아하고요.”
“어떤 거를요?”
“그건….”
라엔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민망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려 웃고는 말을 이었다.
“직접 말하기는 조금 그렇네요. 대신에 다른 건 말해 줄 수 있어요. 하견이 좋아하는 건 마법 약 만드는 거예요.”
“하견 형이요?”
의외였다. 뭔가를 좋아하는 걸 티 내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아, 하견이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니고요.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과제가 없어도 종종 만들었었거든요. 그래서요.”
그렇다면 라엔의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과제가 아닌데도 뭔가를 한다는 건 그걸 어지간히 좋아하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같은 건 다녀 본 적 없지만, 스승님께서 가끔 신전 교리를 적은 책을 손에 들려 주신 적은 있었다. 그걸 읽어 가는 것이 숙제였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책 읽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교리에 적힌 말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모든 이의 생은 숭고할 것이니. 내딛는 걸음은 신의 그림자 아래서. 다다르는 깨달음은 신의 뜻일 것이므로.」
교리 첫 장의 첫 번째의 구절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읽었을 때는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그 뜻이 아리송했다.
그런 생이 정말 숭고한 걸까? 나는….
“이한. 하견에게 나중에 만들어 달라고 해요. 웬만한 건 뭐든 만들 수 있을걸요.”
라엔의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 사이로 파고들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어, 뭐든지요?”
“네. 약초를 조합해서 약을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안에 아예 마법을 담을 수도 있어요.”
라엔이 손을 앞으로 살짝 뻗었다. 라엔의 손끝에서 색색의 빛 조각이 튀어 오르며 조그맣게 반짝였다.
“이한이 좋아할 만한 건 마법을 담은 쪽이겠네요. 주위에 반짝이는 빛을 만드는 것도 있고, 폭죽이 터지게 하는 것도 있어요.”
내게로 고개를 돌린 라엔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것 말고도 여러 가지 많아요. 이한이 바라는 건 다 가능할 거예요.”
신기했다. 마법 약으로도 여러 가지가 가능하구나.
“그러면 다들 마법이 아니라 마법 약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정교한 마법일수록 담기 어려워서요. 하견은 쉽게 하지만요.”
송하견이 약초 맛이 나는 물약을 소환하는 건 많이 봤는데, 마법이 담겨 있는 마법 약을 사용하는 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여유로워 보일 때 꼭 보여 달라고 해야지.
“율이 형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아요?”
“리더 형은….”
말끝을 흐리던 라엔이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얼마나 중요한 얘기기에 이렇게 뜸을 들일까. 나도 모르게 집중했다. 라엔은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비밀이에요.”
그러고는 내게서 다시 훅 멀어졌다. 마주 본 라엔의 표정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리더 형이 좋아하는 건 많아 보이는데….”
라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음으로 이을 말을 생각하는 듯했다.
라엔의 말이 맞았다. 박율이 좋아할 만한 거라면 생각나는 게 많았다. 요리하는 것도 있었고 꽃에 물을 주는 것도 있었고. 조각을 만들어서 선물하는 것도 있었다.
잠깐 사이에 내가 알게 된 것도 여러 가지인데 그동안 함께 지내 온 라엔은 훨씬 많은 것을 알 터였다.
라엔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그런데 전부 좋아하는 거라면 사실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해서요.”
잠깐 눈을 깜빡이던 라엔이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하늘에서 서서히 떨어지고 있는 꽃송이 때문인지 옅은 꽃향기가 주위에 맴도는 듯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이한이 물어봐요. 리더 형한테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라엔에게도 지금 물어볼 필요가 있었다.
“라엔 형이 뭘 좋아하는지는 정말 안 말해 줄 거예요?”
“말보다는 언젠가 직접 보여 주고 싶어서요.”
보여 줄 수 있는 종류인 건가? 라엔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너무 궁금했다.
그렇지만 라엔은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계속 고민하게 만들려는 거라면 성공이었다.
내 옆에 앉아서 잠깐 시간을 보내던 라엔은 곧 다시 건물 안으로 향했다.
‘마을이 얼마나 많은 걸까.’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그 숫자가 상당한 듯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마을이 있는 커다란 세상이라면 왜 그 세상을 구하는 걸 당신들만이 해야 하는 걸까. 이 넓은 세상에서 좀 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칠 수는 없는 걸까.
라엔이 떠난 자리에 파란 꽃송이가 떨어져서 쌓이고 있었다. 노트를 다시 펼쳐 들었다. 연필을 그 위에 가져다 댔는데 어디서부터 선을 긋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가만히 연필을 내려놓았다.
‘조용하다.’
무릎을 모아서 팔로 감싸 안았다. 앉은 채로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까 꼭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사락사락 쌓이는 꽃송이도 간질이듯 연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모두 고요했다.
그 안에서 나도 풍경이 되는 것 같았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녹아들어서 결국 사라져 버리는 풍경.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가만히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뗐다. 물론 멀리 갈 생각은 아니고 그냥 건물 벽을 따라서 산책하듯이 빙 돌아볼 참이었다.
그런데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자마자 눈앞에 뜬금없는 것이 보였다.
‘어…. 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