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정해져 있는 답을
일단 박율은 매끼 식사가 끝난 후에 작게 자른 과일을 찍어서 내 입에 넣어 주려고 했다.
“율이 형, 이제 배불러요.”
“평소보다도 못 먹네. 원래도 조금씩만 먹었잖아. 그러면 한 조각만 먹어 볼래?”
“항상 많이 먹….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먹을게요.”
“그래. 먹는 건 이한이가 하자.”
박율이 말하는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아마도 씹어서 삼키는 것만일지도 몰랐다. 물론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말랑한 과일은 맛있었다.
송하견은 따뜻한 차를 내 손에 들려 줬다. 향긋한 맛이 났다.
“…속은. 괜찮아?”
“괜찮아요, 하견 형.”
“…어지럽지는 않고?”
송하견은 내 팔목을 차분히 짚어 보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송하견의 다양한 질문에 나는 끊임없이 괜찮다고만 대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송하견이 다녀간 자리에는 도톰한 담요와 물약 하나와 풀꽃이 담긴 작은 주머니가 남았다.
민주혁은 바람처럼 시원한 공기를 달고 와서는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쉴 새 없이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 어제 박율 형님이랑 라엔 형님이 두 시간쯤 얘기를 나눴어. 하견 형님도 라엔 형님이랑 꽤 오래 얘기하더라.”
“오래 얘기했네. 그런데 하견 형도…? 민주혁 너는 어땠는데?”
“나는 너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
“장난이야. 형님들이 다 얘기했으니까 내가 할 말은 없었거든. 그리고 나까지 말하면 라엔 형님이 너무 힘드시잖아.”
민주혁의 말을 듣고 보니 박율은 나를 꽤 봐준 걸지도 몰랐다. 다행이었다.
민주혁은 방에서 나가기 전에 내 입에 막대 사탕을 하나 물려 주고 갔다. 사탕에서는 초콜릿 맛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라엔은 방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와서 내 손에 작은 캐러멜을 쥐여 줬다. 우유 맛이 났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던 라엔은 결국 눈물을 쏟으며 말을 맺었다.
“미안해요, 이한. 이제 다시는, 그렇게 무리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요. 그러니까 이한도… 그러지 마요. 제발….”
작은 흐느낌도 없이 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꼭 고장 난 수도꼭지 같았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멈추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그래도 라엔이 무리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다들 내가 아주 잠깐 흔들렸던 모습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걸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앞으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인 것은 모두 교대로 다녀가며 3층에서는 계속 연락을 넣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나에게만 신경 썼더라면 그건 조금 부담스러웠을 것 같았다.
잠깐. 그러면 지금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게 되나?
‘…아니, 이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아무튼 그렇게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것들만 먹은 하루를 보낸 이후, 다시 밤이 내려앉고 나서야 내가 지냈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새벽에 눈을 반짝 떴다. 사방이 고요했다.
잠든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일어나 버렸다. 내 방으로 돌아온 뒤였기에 곁에는 아무도 없는 채로 텅 비어 있었다.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 정적이 벌써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십몇 년간 쌓아 온 익숙함이 며칠 사이에 무너지다니,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이제 혼자 있는 것보다 당신들과 함께 있는 걸 더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려 해 봐도 사실이었다. 인정하고 나니까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뺨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발을 침대 밖으로 빼냈다.
창가 쪽을 바라보니 묘한 보랏빛이 도는 검은 하늘에 붉은 꽃이 팔랑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꼭 핏빛 비가 내리는 것 같이 보였다.
탁자 위의 꽃병에 파란 꽃이 네다섯 송이쯤 꽂혀 있었다. 꽃잎 끝부분이 뾰족해서 꼭 별 같은 모양이었다. 누군가 꽂아 둔 듯했다.
그 바로 옆에는 조그만 등불이 놓여 있었다. 불은 꺼진 채였다.
달칵.
등불 옆쪽에 조그만 스위치를 누르니 주위로 연한 빛이 퍼졌다. 이건 내가 신전에서 썼던 전등과 비슷한 원리인 듯했다. 누가 가져다 둔 거지? 마나가 필요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나무 손잡이를 잡고 등불을 들어 올렸다. 거칠한 나뭇결이 손끝에 쓸렸다.
‘밖에 다녀올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텅 빈 바깥 공간이 너무 광활해 보였다. 저 아래에 혼자 서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정신이 또렷했다.
‘그러면 3층으로 갈까.’
3층은 여기보다 조금 더 탁 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창문이 더 넓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깨어 있을 거라면 거기에서 있고 싶었다.
의자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몸 위로 덮었다. 새벽 공기가 방 안에 은은하게 스며 있었음에도 몸이 따뜻해졌다. 등불을 한 손에 들고 방을 나왔다.
황량한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올랐다.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어, 왜 불이 켜져 있지?’
2층까지 올라왔을 때 복도 멀리에서 연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장 끝 방이었다. 방문 틈으로 빠져나온 빛이 어두운 복도 위로 옅게 깔려 있었다.
‘아직도 안 자나? 아니면 나처럼 자다가 깼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잠깐은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똑똑.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열린 문 뒤에는 방 전체에 빼곡하게 흰 종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이한?”
그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떠 있던 종이가 차곡차곡 포개지더니 한군데로 모였다.
시야를 가리던 종이가 사라지고 탁 트인 방 안에는 라엔이 있었다. 침대 위에 기대어 앉은 채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라엔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순식간에 없앴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내게로 서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안 좋아요?”
라엔이 내 팔뚝을 조심히 잡고 나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방금까지 앉아 있던 침대 위에 나를 앉혔다.
라엔이 내 발에서 슬리퍼를 천천히 벗겨 냈다. 그러고는 복슬복슬해 보이는 양말을 공중에 생겨나게 하더니 그걸 내 발에 끼워 넣었다. 발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이 간지러웠다.
“추운가요? 아니면 잠이 안 오나요?”
순식간에 쏟아지는 질문을 듣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아요. 그냥 잠에서 깨서요. 라엔 형은요? 이제 무리하지 않는다면서요.”
“맞아요. 평소에도 이 정도는 했으니까요.”
평소에도 해 왔다면 무리가 아닌 걸까? 평소에 무리하는 게 아닌 걸까? 쉽지 않은 기준이었다. 마나 고갈 상태만 안 될 뿐이지 체력은 야금야금 깎이고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라엔 뿐만 아니라 다들 그랬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늘 바빴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그래,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겠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나는 당신들이 세상을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형은 왜 안 쉬어요?”
“네? 쉬고 있어요.”
들고 왔던 등불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라엔의 손목을 잡았다. 라엔이 내 손길을 따라서 내 옆에 가만히 앉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라엔에게만 가져오기를 두 번이나 쓴 거였다. 다들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라엔은 자기를 몰아붙이는 게 유독 도드라지는 듯했다.
‘첫 번째 가져오기를 썼을 때도 그랬지.’
그때도 라엔이 혼자 남아서 수습하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안전했을 거였다. 이번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나는 몇 번이고 라엔을 치료해 주고 부상을 가져와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시스템의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거나, 능력이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내가 옆에 있을 수 없게 되거나.
“나는 형이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한 번도요.”
라엔이 아까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종이 뭉치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검은 글씨가 빼곡히 박혀 있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형은 오히려 넘칠 만큼 노력하잖아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한.”
“…사실이에요.”
라엔이 고개를 돌려서 나를 봤다. 그러고는 내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언제나 완벽한 건 없으니까요.”
“꼭 완벽해야만 해요?”
“아니요. 완벽해질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 가까이라도 가 보려는 거죠.”
라엔이 내 어깨를 천천히 감쌌다. 그리고 나를 뒤로 눕혔다. 등 뒤에 푹신한 침대가 닿았다. 내 몸 위로 이불이 살짝 덮이는 느낌이 났다.
전등 불빛이 어른거리는 천장이 보였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요?”
“계속이요.”
이룰 수 없는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건 어떤 기분인 걸까.
옆에 앉은 라엔을 올려다봤다. 내게로 향한 라엔의 금안에 또렷하게 담긴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맞다. 아직 퀘스트를 안 끝냈었지.’
이제 라엔에게만 선물을 전해 주면 됐다.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생각나서 다행이었다.
품에 있던 하바리움을 라엔에게로 건넸다. 라엔이 그걸 받아 들고 한 번 빙글 돌렸다.
“예쁘네요.”
“선물이에요, 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요.”
“그러니까 더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고마워요.”
라엔이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등불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창문이 휙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붉은 꽃이 이쪽으로 몇 송이 날아왔다. 꽃향기가 퍼졌다.
날아온 꽃은 등불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곧 초록 줄기가 등불의 나무 틀을 휘감으며 자라났다.
“이건 내 선물이에요.”
등불의 연한 불빛이 꽃잎 주위로 흔들리며 퍼져 나왔다. 자리에 앉아서 등불을 품에 안았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요, 라엔 형.”
지금이라면 방 안으로 들어가도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조금 남았어요. 가서 더 자요, 이한.”
“형도요. 꼭 푹 쉬어요.”
문을 닫고 나왔다.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원래 계획대로 3층을 들르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자 사방에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창문이 탁 트여 있었다.
높은 곳에서 환한 달이 빛났다. 꼭 어둠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등불에 휘감긴 꽃 때문인지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창 앞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밖으로 보이는 바닥이 온통 붉었다. 아직도 그 위로 새빨간 꽃이 차근차근 쌓이고 있었다. 그걸 보자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나 방금 퀘스트 성공한 게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제야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 이제 아주 막무가내구나. 좀 내가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작동할 필요가 있었다.
<돌발! 퀘스트> ‘꽃비 내리는 평원’ 성공!
성공 보상으로 ‘사라지지 않는 꽃(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연이어 새로운 상태 창이 떠올랐다.
보상을 사용할 용사님이 누구인가요?
1) 용사 민주혁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어? 한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보상인 건가? 게다가 이번에는 사용하겠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선택지부터 떴다.
내 대답을 재촉하듯 상태 창은 흔들림도 없이 또렷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뭐, 그렇게 나온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망설임 없이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