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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52화 (52/150)
  • 052화.

    알게 될 때까지

    나는 박율에게 안기듯이 몸을 기대고 있는 채였다. 박율이 내 가슴의 중간 부근을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율이 형, 이제 괜찮아요.”

    “……조금 나아졌구나. 다행이다. 마나 회복 약을 마셨거든.”

    박율이 내 입가를 살짝 쓸었다. 입술에 끈적하게 묻었던 뭔가가 반짝 사라지는 느낌이 났다. 씁쓸하면서도 묘한 맛이 남았다. 꼭 향긋한 꽃잎을 짓씹어 먹으면 날 만한 맛이었다.

    ‘마나 회복 약 때문에 괜찮아진 건 아닌데.’

    시스템의 패시브 스킬이 늦게 적용된 것일 뿐이었다. 저번부터 상태 창이 흔들리는 모습이 몇 번 보였던 것 같은데, 혹시 이러다가 고장이라도 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이제 멀쩡해졌으니 박율에게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박율이 나를 힘주어 안았다.

    “좀 더 기다려야 돼. 아직 약효가 도는 중일 거야.”

    “형, 나는 마나가 고갈된 게 아니라….”

    “이한. 앞으로는 이러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미안해요. 내가….”

    라엔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말을 뱉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라엔아. 진정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 괜찮아진 것 같아도 아직 쉬어야 해.”

    박율이 손을 들어서 자기 머리를 살짝 쓸어 올렸다. 착잡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둘 다…. 나중에 형이랑 얘기 좀 하자. 일단은 쉬고, 다 괜찮아진 다음에 천천히.”

    큰일이다. 어서 뭐라도 변명을 생각해 둬야 했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한 변명이 필요한 거지?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박율이 나를 안은 채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창가에 다가가 섰다.

    덜컥.

    창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노을이 거의 떨어지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봄바람이 훅 불어왔다. 내 위로 두꺼운 담요가 하나 덮였다.

    박율이 숨을 깊게 들이켜더니 창밖으로 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살짝 튕겼다. 곧 바깥에서 팡, 하는 소리와 함께 흰색 불꽃이 반짝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혁과 송하견이 뒤쪽으로 이동해 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왜?”

    둘 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급한 상황일 때만 쓰는 신호인 듯했다.

    “하견아, 주혁아. 라엔이 좀 방으로 데려다줄래? 마나가 고갈됐었어.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옆에서 상태를 지켜봐 줘.”

    “…라엔.”

    송하견이 의자에 앉아 있는 라엔의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라엔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손을 잠깐씩 짚어 본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금방 괜찮아졌어?”

    “이한이가…. 이건 나중에 말해 줄게. 라엔이한테는 이 얘기만 먼저 하자. 이제 절대 무리하지 마.”

    “마나를 그렇게까지 쓴 줄 몰랐어요. …리더 형. 그런데, 형도 마나 회복….”

    “라엔아. 그것도 같이 얘기할 거니까, 방에서 쉬고 있어.”

    민주혁이 박율의 품에 안긴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박율 형님, 선이한은…?”

    “이한이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형이 옆에서 있을게.”

    박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하견이 이번에는 이쪽으로 훅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안색을 신중하게 살폈다.

    “…형, 이거.”

    송하견이 나무로 된 가방 하나를 옆에 띄웠다.

    “…더 필요하면.”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게.”

    송하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엔에게로 돌아가 부축하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옆에서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가 보겠습니다. …선이한. 너도 제발 몸 좀 챙기고. 푹 쉬어. 이따 확인하러 간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선이한. 약 먹고, 바로 자.”

    송하견과 민주혁이 이제 이동하려는 듯했다. 라엔은 그동안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쯤 하고 자기는 괜찮다는 말을 한 번쯤 했다.

    라엔은 아마도 정말 괜찮을 것이었다. 내가 가져오기를 썼으니까. 다행이었다. 게다가 라엔이 더 무리하지 않도록 송하견과 민주혁이 옆에서 붙들고 쉬게 할 것 같아서 더 안심이었다.

    눈앞에서 세 사람이 훅 사라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한아.”

    아차, 안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내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계속 가만히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박율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굳어 보이는 표정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러자 박율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표정을 금세 풀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이 무슨 말을 할지 알겠어?”

    “율이 형, 그런데요….”

    “그래, 먼저 말해. 듣고 있어.”

    “나는 마나가 고갈된 게 아니었어요. 마나를 쓴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박율의 눈치를 살짝 봤다. 나를 흔들림 없이 안은 채 걸음을 옮기던 박율이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괜찮아요. 원래 가끔 그럴 때가 있었어요. 잠깐 지나면 나아지고요.”

    “…그래. 일단 계속 들어 보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익숙한 일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괜찮다는 말에 신빙성을 더할 수 있을 테니까.

    박율이 계단을 느릿하게 내려갔다. 몸이 살짝씩 흔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안겨서 계단을 올라갔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의식이 몽롱했고,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혼자서 걸어가도 돼요?”

    “음, 아니. 그건 아직 안 될 것 같네.”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문장의 끝맺음이 단호했다. 그렇다면 나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발을 땅에 디딜 수 없을 것이었다.

    박율이 방문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어, 여기는 2층인데.

    “춥거나 덥지는 않아? 머리는?”

    “다 괜찮아요. 형, 그런데 여기 내가 지냈던 방이 아닌데요…?”

    “형이 지내는 방이야.”

    “어… 왜요?”

    “하루 정도는 상태를 지켜봐야 해서.”

    박율은 아무래도 내가 마나 고갈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맞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라엔에게 가져오기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치료뿐만 아니라 부상이나 상태 이상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단 것도 짐작하겠지…? 음, 적어도 라엔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무조건 아니라고 말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가져오기를 하면 마나가 채워지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라엔이 뭔가 말을 했을 테니까. 그냥 그 상태 이상 자체만 가져오는 것이겠지.

    그건 아쉽긴 했지만 나름 괜찮았다. 방금 박율의 말을 들어 보니까 마나가 고갈되면 하루쯤 고생하는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다행히 라엔도 나도 완전히 괜찮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박율이 침대 위에 나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형이 말해도 될까?”

    “……네.”

    더 도망칠 길이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박율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결백하므로 바로 반박할 수 있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

    박율이 내 위로 이불을 덮어 주고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우선, 이한아. 고생했어. 고마워. 라엔이가 많이 힘들었을 거거든.”

    “…어, 네.”

    이런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결국 멍한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박율의 말이 차근차근 이어졌다.

    “그런데 치료 마법을 쓰면 원래 그렇게 몸에 영향이 가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치료 마법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치료한 게 아니라, 마나가 고갈됐을 때 몸에 무리가 간 걸 그대로 너한테 옮긴 거구나.”

    “…평소에는 치료하는 게 맞는데 지금만요. 그런데 고통까지 그대로 느끼는 건 아니에요. 아까는 잠깐 그랬던 거고….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어, 그리고….”

    내가 지금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혹시 말실수라도 할까 봐 바짝 긴장됐다. 몸도 덩달아 굳는 듯했다.

    박율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책상 위에 있는 나무 가방을 열었다.

    아까 송하견이 줬던 가방이었다. 그 안에는 각각 다른 색의 물약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와 약초가 담긴 투명하고 납작한 유리 함이 여러 개 있었다.

    어떤 약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살펴본 박율이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속이 안 좋아?”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박율이 내 가슴의 중앙 쪽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천천히 쓸어내렸다.

    온기가 서서히 퍼졌다. 분명히 옷 위로 손을 가져다 댔는데도 살갗이 직접 쓸리는 것처럼 선명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형은, 이한이가 저번에 라엔이의 부상을 낫게 했을 때부터 확신했거든. 치료 마법이 아니구나, 하고. 다들 그랬을 거야.”

    “치료가 아니었던 건 그때랑 지금이랑 딱 두 번뿐이었어요.”

    정말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박율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바로 말을 이었다.

    “이한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어. 게다가 형이 아까 네가 마나 고갈 상태일 때처럼 아파하는 걸 봤는데.”

    “그건 잠깐이었잖아요. 나는 아픔 없이 그대로 부상을 가져올 수 있어요.”

    박율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까부터 한결같이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나를 안정시키듯이 살살 쓸어내리는 박율의 손길이 여전히 느껴졌다. 박율은 그 손길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사실은 마나 고갈이 됐을 때 회복 약을 마셔도 그렇게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거든. 시간이 좀 걸려. 그래서…. 잘 모르겠네.”

    박율이 쓸어내리던 손을 뚝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형은 이한이가 정말 괜찮은 건지도 잘 모르겠어.”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내게서 몸을 돌린 박율이 나무 가방에 들어 있던 것들을 달각달각 움직였다. 그리고 곧 내 손에 유리잔 하나를 쥐여 줬다. 안에 반짝이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더 물어보지 않을게. 이한이가 얘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겠다. 그 말이 귀에 박혔다. 박율이 내 입가에 유리잔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몸이 안 좋으면 꼭 말해 줘. 걱정돼서 그래.”

    “걱정할 필요….”

    내가 말을 다 마치기 전에 물약이 입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왔다. 달짝지근한 물약을 조금씩 삼켰다. 내가 약을 다 마신 걸 확인한 박율이 유리잔을 다시 가져갔다.

    “약을 먹어서 바로 졸릴 수도 있어. 졸리면 버티지 말고 자자.”

    박율이 내 등을 몇 번 쓸어내리고는 나를 자리에 눕히며 말을 이었다.

    “아까는 갑자기 놀랐지? 라엔이가 가끔 무리할 때가 있거든. 이번에는 더 그런 것 같아.”

    나긋한 목소리가 점점 흐릿하게 들렸다.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내 뺨을 찬찬히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했다.

    “무리하지 않도록 신경 써도 자꾸 그러네…. 걱정되지 않아, 이한아?”

    박율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이해가 됐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걱정하고 있다고 계속 말해 줘야겠다. 그렇지?”

    그런가? 내 위로 푹신한 이불이 살포시 덮였다. 따뜻했다.

    걱정하고 있어. 그런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눈이 점점 감겼다. 약 기운이 몸에 훅 돌았다. 잠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약 기운에서 헤어 나와 잠에서 깼더니 아침이었다. 나는 그날 내리 박율의 방에서 지냈다.

    박율은 내가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 어디에서 잤던 걸까? 박율에게 물어봤지만 알아서 잘 잤으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내 몸 상태가 나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러나 다들 누가 보면 내가 병색이 짙은 환자라도 되는 양 착각할 정도로 나를 간호했다.

    아프지도 않은데 대체 무슨 간호를…?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다루는 모두의 행동을 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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