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51화 (51/150)

051화.

방법이 있으니까

어떤 느낌의 물건인지 상상은 됐지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그걸 하바리움이라고 부르는 거야?”

“어. 보통은 말린 꽃으로 만들기는 하는데….”

“여기 있는 꽃은 안 마르니까?”

“맞아. 얼마 안 가서 사라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잠깐이겠지만, 그래도 보관하기 좋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민주혁이 내게 기다란 핀셋을 쥐여 줬다. 그걸로 유리병 안에 꽃을 넣었다. 그러자 민주혁이 투명한 용액을 조심스럽게 채웠다. 꽃송이가 흔들리며 서서히 잠겨 갔다.

“그건 무슨 용액이야?”

“그냥 오일이야.”

“신기하다. 너는 이런 걸 언제 만들어 봤어? 아카데미에서?”

어쩐지 조금 부러웠다. 다들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다는 것 같은데.

나도 처음부터 마나가 있었더라면 신전에서 살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아카데미에도 다니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까지는 너무 큰 꿈이었다. 그냥 중간에 나에게 마나가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다른 신관님들께 평범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스승님은 너무 바쁘셨으니까.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금 아쉬웠다.

“야, 선이한.”

민주혁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차가운 유리병이 뺨에 슬쩍 닿았다.

“사실 나도 직접 만들어 보는 건 처음이야. 아카데미에서 이런 건 안 배우기도 하고.”

“어?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만들었어?”

“만드는 걸 전에 본 적이 있어서.”

잠깐 봤다고 똑같이 만들 수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안 해 본 일들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별거 아냐.”

민주혁이 유리병의 뚜껑을 꾹 밀봉해서 다시 나에게 건넸다.

“봐. 지금도 네가 만든 거잖아.”

유리병을 살짝 흔들어 보니 붉은색의 꽃잎이 그 안에서 하늘거렸다. 꼭 처음부터 물에서 피어난 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해사해 보였다.

“하나 더 만들어도 돼?”

“아, 그렇네. 너도 하나 가지면 좋겠다.”

민주혁이 유리병을 하나 더 소환했다. 그걸로 하바리움을 금세 하나 더 만들어서 민주혁의 손에 다시 쥐여 줬다.

“나한테는 벌써 준 거 아니었어?”

민주혁이 내가 꽃반지를 끼워 준 손을 팔랑 흔들었다.

물론 민주혁의 퀘스트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선물의 목적이 그것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퀘스트 성공은 부가적인 거였다.

“둘 다 주고 싶어서.”

“…….”

민주혁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하바리움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서 내 손 위에 올려 줬다.

“자, 너도.”

그 안에 담긴 찰랑이는 용액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네가 준 선물 잘 가지고 있을게. 나는 이제 하견 형님이랑 교대하려고. 간다.”

멀어지는 민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송이 하나를 쥐었다.

비슷한 꽃인데도 용액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

내가 손에 쥔 꽃에서 붉은색이 점점 빠졌다. 내 손끝이 닿은 부근부터 탈색되듯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뭐지? 원래 이런 건가?

‘…아니. 손에 오래 쥐고 있었다고 색이 빠질 리가.’

그때 위쪽에서 드르륵, 하고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손에서 미끄러진 꽃이 살랑 떨어져서 바닥으로 파묻혔다.

“이한아.”

고개를 위로 올렸다. 2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연녹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역광이어서 박율의 표정이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방금 봤을까?’

박율에게 수상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침을 꼴깍 삼켰다.

박율이 창문을 넘어서서 이쪽으로 부드럽게 내려와 앉았다. 바람이 옅게 불어와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있었어요.”

“정말?”

무슨 의도의 질문일까. 떨리는 손을 꾹 말아 쥘 무렵 박율의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혁이가 가 보라고 하던데.”

아, 그거였구나. 괜히 긴장했다. 품에서 하바리움을 꺼내서 박율에게 건넸다. 박율이 그걸 받아 들었다.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돌발! 퀘스트> ‘꽃비 내리는 평원’ 진행 중!

1) 용사 민주혁 (성공!)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성공!)

퀘스트 창 뒤로 박율이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내 머리 위에 있는 화관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살포시 얹어 놓았다.

“이것도 잘 어울리네.”

“고마워요.”

“그래. 하견이는 2층 방에서 쉬고 있을 거야. 라엔이는 아직 3층에 있고.”

박율이 말을 멈추고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얼굴이 어쩐지 내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박율이 몸을 일으켰다.

“형은 이제 올라가 볼게. 너무 오래 나와 있지는 말고. 봄이어도 아직 쌀쌀하니까.”

박율이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는 옆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텔레포트로 이동한 듯했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서 화관이 톡 떨어졌다. 붉은 꽃 사이사이로 노란색의 작은 꽃이 촘촘히 피어 있었다.

박율이 아까 해 놓은 거구나. 붉은색과 노란색이 잘 어울렸다. 화관을 손에 들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하견에게 무사히 하바리움을 전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라엔에게만 전달하면 퀘스트를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창밖에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오늘 종일 라엔을 본 적이 없었다. 박율과 송하견과 민주혁은 틈틈이 교대하는 듯했는데. 라엔이 핵심이라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마나를 써도 괜찮은 건가?’

마나도 고갈되는 거라고 들었던 것 같다. 라엔이 가지고 있는 마나양이 많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재라고 불릴 만했다.

타박.

계단을 올랐다. 3층으로 들어서자 수정구 앞에 선 라엔과 박율이 보였다.

수정구에서부터 옅은 붉은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창 안으로 들어오는 노을 사이에서도 선명했다. 수정구 바로 위에는 네모난 지도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한 걸음을 조심히 내디뎠다. 동시에 둘 모두가 내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냈는데. 다들 어떻게 이렇게 금방 기척을 느끼는 거지.

라엔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올라와 봤어요. 가만히 있을게요.”

“방해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제 거의 끝나 가요. 잠시만 기다려 줘요.”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라엔의 모습이 보였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양쪽 손을 수정구 위로 올린 채였다.

박율이 그 옆에서 수정구 쪽으로 한 손을 뻗고 있었다. 다른 손은 지도 위에서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주위가 고요했다. 노을빛이 바닥을 길게 물들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박율이 수정구와 라엔의 손 사이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진지한 걸 넘어, 처음 본다 싶을 만큼 굳은 표정이었다.

“그만. 라엔아, 언제부터야.”

“…네?”

“언제부터 무리하고 있었어. 손 떼.”

“…아직, 조금만요.”

“그만하랬지. 시간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야.”

“여기까지만…….”

“라엔아.”

라엔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동시에 수정구에서 퍼져 나오던 은은한 빛이 뚝 끊겼다.

“…고생했어요, 리더 형. 먼저 내려가 있어요.”

라엔은 다른 한쪽 손을 여전히 수정구에 가져다 댄 채였다. 꼭 거기에 기대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엔이 걸치고 있는 로브가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이쪽 봐 봐.”

박율이 라엔의 어깨를 붙들고 얼굴을 살피더니 허공에 대고 살짝 손짓했다. 곧 라엔의 뒤로 등받이가 있는 의자 하나가 생겨났다.

“더 무리하지 말고 앉아. 지금 어느 정도야?”

“…참을 만해요.”

라엔이 자리에 무너지듯이 앉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곧 한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붉은 노을이 라엔의 얼굴로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안색이 창백했다.

박율이 품에서 조그만 약병을 하나 꺼냈다. 안에 검푸른 액체가 들어 있었다.

“정말 안 되겠으면 마나 회복 약이라도 쓰려고 그래. 한 번은 괜찮을 거야. 지금 견딜 수 있겠어?”

“리더 형이 그걸 왜…. 왜 가지고 있….”

거기까지 말한 라엔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황이 완전히 파악됐다. 지금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라엔에게로 뛰듯이 다가갔다.

라엔의 목덜미로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살갗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라엔’

치료하기 / 가져오기」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치료하기를 선택하고 있을 때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마나 고갈은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거야. 라엔아, 일단은 약 조금만 마셔 보자.”

라엔을 감쌌던 파란빛이 내게로 들어왔다. 치료하기 게이지가 옆에서 깜빡였다. 붉은빛은 차오르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박율의 말처럼 치료는 불가능한 것 같았다.

왜지? 마나 고갈처럼 원인이 따로 있는 상태 이상일 경우에는 치료할 수 없는 건가?

라엔은 정신을 차리기 힘든 듯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앞에서 박율이 약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어 보니까 마나 회복 약이라는 게 썩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한두 번은 괜찮다 해도 굳이 라엔이 그걸 쓸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치료하기보다 가져오기가 더 상위에 있는 스킬일지도 몰랐다. 단순히 게이지가 차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받아 내는 게 더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일 테니까.

나에게 남아 있는 한 가지의 방법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가져오기’ 성공!」

다행이다. 그 생각과 동시에 박율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이한아? 선이한!”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히든! 퀘스트> ‘첫 번째 상태 이상 해제!’ 성공!

성공 보상으로 ‘회복 약(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에 퀘스트 창이….

하지만 지금은 읽을 정신이 없었다. 명치 부근이 꽉 조이는 것 같고, 온몸이 사방에서 쥐어뜯기는 느낌이었다. 불로 지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얼음장을 가져다 대는 것 같기도 했다. 숨쉬기가 벅찼다. 아니, 지금 왜?

“…아, 흐윽.”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울렸다. 어지러웠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욱….”

입가를 막았다. 라엔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내 몸이 번쩍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닌가? 입을 막았던 손이 떼어진 것 같았다. 뭔가를 꿀꺽 삼킨 것 같기도 했다. 이것도 잘 모르겠다. 감각이 온전하지 않았다.

아파…. 아니, 잠깐. 진정해야 했다.

아플 리가 없었다. 이건 그런 거였다. 잠깐 스쳐 가는 것. 나는…, 고통 면역이라고 했으니까.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모든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망할 시스템. 저번에 밤이 내린 숲에서부터 조금 오락가락하는 것 같더니 이제야 일을 했구나. 이런 식이면 좀 곤란했다.

눈앞에 박율의 얼굴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