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주고 싶은 만큼
하얀색의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붉은 꽃송이가 그 위로 찬찬히 쏟아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건물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래도 여기가 더 넓어, 이한아. 방도 여러 개 있거든.”
건물은 벽면이 둥그렇고 지붕 끝은 뾰족했다. 주위로는 넓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쪽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붉은 꽃이 짓눌리듯 밟혔다. 잠깐 뭉개졌던 꽃송이는 발을 떼자마자 다시 원래 상태로 탱글탱글하게 돌아왔다.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아래 깔린 초록 잔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새빨간 꽃만 주욱 널려 있었다. 잠깐 핏빛 길을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을 스치듯이 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의미 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도 똑같이 새하얀 색이었다.
벽면을 타고 늘어서 있는 납작한 계단을 밟았다. 이 건물도 3층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다.
마지막 계단을 딛자마자 넓게 펼쳐진 홀이 보였다. 그 중앙에는 이전의 건물에 있던 것과 같은 흰색 막대가 솟아 있었다. 위에 태양처럼 새빨간 수정구가 올려져 있었다.
라엔이 수정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붉은빛이 주위로 연하게 퍼졌다.
“문제없이 작동해요. 다행이네요.”
“여기서 연락을 넣는 거예요, 형?”
“맞아요. 며칠쯤 머무르고 동편으로 갈 거예요.”
“그래, 라엔아. 내일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건물 안을 쭉 둘러보았다. 방은 1층과 2층에만 있었다. 박율과 걸음을 맞춰 걷다 보니 나는 어느새 1층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이한이는 이 방 어때?”
방문을 달칵 열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시원한 바람이 방 안쪽을 휩쓸고 지나갔다. 뒤따라 들어온 박율이 클린 마법을 쓴 듯했다. 방 안에는 먼지 한 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방이 꽤 넓었다. 나무 침대 위에는 연한 잿빛의 이불이 개어져 있었다. 커다란 창문 앞에는 동그란 탁자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텅 빈 유리 화병이 있었다.
“이 방도 좋아요. 여기서 지낼래요.”
“그래. 형은 바로 위층에 있을 거니까, 필요한 일이 있거나 하면 언제든 올라와.”
“네. 그런데 형, 이 건물에서는 원래 누가 사는 건가요?”
“아니, 아무도 안 살아. 그건 왜?”
그러면 방 안이 왜 이렇게 정갈한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박율이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방이 말끔하지? 연락을 넣을 때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머무르거든. 그렇게 다녀가는 사람들이 정리해 둬서 그래.”
다들 새 집처럼 치우고 가는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방금 질문을 직접 꺼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둘 중 하나였다. 내 생각이 잘 드러나는 편이거나,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많이 없었기에 몰랐을 뿐 모두가 이 정도의 짐작은 할 수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끼익 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창가에 다가가서 서 있는 박율의 뒷모습이 보였다. 열린 창문 안으로 봄바람이 훌쩍 넘어왔다.
한낮의 맑은 태양이 박율의 위에서 쏟아졌다. 뒤쪽으로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깔려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조각 없이 파랬다. 박율의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박율이 내 쪽으로 등을 휙 돌렸다.
“오늘은 바람도 선선하다. 푹 쉬어, 이한아.”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이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창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무 의자라 조금 딱딱했다.
탁자 위에 올려진 화병을 들어 올렸다. 유리 표면의 냉기가 손바닥에 생생하게 닿아 왔다.
‘이 화병은 왜 가져다 둔 걸까.’
창밖에는 꽃이 저렇게나 많은데 여기에 꽂을 수 있는 건 정작 한 송이도 없었다. 줄기도 없고, 마법으로 억지로 만들더라도 꽃송이 자체가 곧 사라져 버릴 테니까.
화병을 빙글 돌려 보다가 다시 자리에 놓았다. 책상에 턱, 하고 공허한 울림이 퍼졌다. 안이 텅 빈 소리였다.
저 바깥은 반대였다. 텅 빌 새가 없었다. 아래에 쌓인 꽃이 사라지더라도 그 위에 새로운 꽃이 덮이고 있을 테니까. 그 빈자리를 채우듯이.
‘평화롭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평화롭다고.
분명히 이곳에서 수많은 꽃이 사라져 왔고, 사라져 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했다. 보이지 않는 곳의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태양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봄 공기가 찼다.
◇
어스름한 아침에 눈을 떴다. 푸른 햇살이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맑은 공기를 들이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꽃비 내리는 평원 퀘스트가 있었지.’
오늘은 그 퀘스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바람에서 차가운 냄새가 났다.
하얀 벽을 빙 돌아가자 건물 옆쪽과 울타리 사이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기다란 나무 의자 하나가 벽면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 털썩 앉아서 그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고개를 올리니 내 얼굴 위로 붉은 꽃이 빗방울처럼 톡 톡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사박.
꽃송이를 헤치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곧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뭐 해, 선이한?”
아무것도 안 한다고 대답하자 민주혁이 내 옆에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민주혁이 내 얼굴 위에 떨어진 꽃송이를 차근차근 훑어 냈다.
“무슨 생각해?”
여기에도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없이 민주혁을 올려다보고 있자 민주혁이 씩 웃으며 내 옆에 풀썩 앉았다. 바람이 훅 불었다.
“지금은 라엔 형님이랑 송하견 형님이 같이 연락을 넣고 있어.”
“벌써? 아직 이른 시간이잖아.”
“그렇긴 한데, 빨리 시작해야 끝나는 것도 빠를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꽃으로 선물 만드는 걸 빨리 시작해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민주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민주혁이 말만 하라는 듯 밝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바닥을 헤집어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걸 민주혁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만들고 싶은 게 있거든.”
그걸 보면서 가만히 생각하던 민주혁이 아, 하고 깨달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민주혁이 손을 가볍게 튕기자 꽃에서 가느다랗고 연한 줄기가 스르르 자라났다.
“뭘 만들고 싶은 건데?”
“보면 알아. 아무튼 고마워.”
줄기를 동그랗게 말았다. 끝부분을 잘 엮어 놓으니 나름대로 모양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수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지?”
“맞아. 어때? 정성이 들어가 보여?”
“정성이 안 들어간 작품이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겠어.”
무슨… 작품…? 내가 말없이 눈을 깜빡이자 민주혁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마음을 담아서 직접 만들었잖아. 그게 작품이 아니면 뭐야?”
민주혁은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걸지도 몰랐다.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서 만들었다고 말해 준 부분이 가장 좋았다. 퀘스트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몇 개만 더 부탁해도 돼?”
“얼마나 필요한데?”
“어….”
네 명의 사람에게 줄 거라고 굳이 개수를 딱 맞출 필요는 없었다. 혹시 잘못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몇 개라고 정확히 짚어 말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었다.
“그냥, 네가 주고 싶은 만큼만.”
물론 이렇게 부탁하는 것도 그렇게 염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민주혁에게는 두 개쯤 만들어 줄까.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바닥에서 붉은 꽃이 수북이 솟아올랐다. 멀리서 보면 바닥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걸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상황을 파악하자 몸이 흠칫 떨렸다. 민주혁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 잠깐. 다 내려놔 봐.”
민주혁이 자기 팔을 붙잡은 내 손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주고 싶은 만큼이라면서.”
진심인가? 아니. 호선을 그린 입꼬리를 보아하니 장난인 게 틀림없었다.
침착하게 민주혁의 팔뚝을 꾹 쥐었다. 그러자 산더미 같은 꽃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다행이었다. 민주혁은 내 표정을 보고는 적당한 숫자의 꽃송이를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손 줘 봐, 민주혁.”
“이야. 내 것부터 바로 만들어 주는 거였어?”
생각보다 손이 컸다. 민주혁의 손가락에 꽃송이를 올려놓고 줄기를 엮어 냈다.
민주혁은 내가 하는 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허공에 다른 한 손을 놀리면서 말을 이었다.
“잘 만드네. 전에 만들어 본 적 있어?”
“아니. 처음이야.”
민주혁이 손짓하는 걸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곧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이구나?”
“어어.”
처음인데도 이렇게 순조롭게 만들 수 있다니. 어쩌면 나는 손재주가 꽤 좋은 걸지도 몰랐다.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민주혁이 고마워, 하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매듭을 지었다.
“다 됐다.”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꽃비 내리는 평원’ 진행 중!
1) 용사 민주혁 (성공!)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시작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됐다. 역시 해 보기 전에 섣불리 어렵다고 판단해서는 안 됐다.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방법은 있으니까.
그때 내 머리 위로 뭔가가 톡 얹어지는 느낌이 났다.
어, 뭐지? 그걸 손으로 쥐어서 내렸다. 모양과 색깔이 조금씩 다른 붉은 꽃이 초록색의 줄기에 빼곡하게 엮여 있었다. 동그랗게 빙 둘러싼 모양이었다.
“자. 나도 다 됐어.”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주혁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민주혁이 내 손에 들렸던 화관을 다시 제대로 씌워 줬다. 머리 위로 사뿐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어…. 고마워.”
“별로. 아무튼, 다른 형님들한테도 선물하려고?”
“맞아.”
민주혁이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무릎에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면 꽃반지 말고 이건 어때?”
허공에 투명하고 자그마한 유리병 세 개가 생겨났다. 유리 표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옅게 빛났다.
“하바리움. 이 안에 꽃을 넣고 나서 용액을 채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