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기억에는 남으니까
박율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선물이에요, 형.”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퀘스트 창은 여전히 잠잠했다. 아까 퀘스트에서 용사님들에게 선물을 전하라고 했으니, 박율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박율이 말갛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그래. 고마워.”
“야, 선이한. 나는?”
옆에서 민주혁이 바로 내게 물어 왔다. 당연히 민주혁에게도 줄 생각이었다.
민주혁의 손에 꽃을 올려놓고 뒤쪽에서 짐을 풀고 있던 송하견에게도 꽃을 전달했다. 지도를 띄워 놓고 그 앞에서 가만히 생각하던 라엔의 손에도 꽃을 쥐여 줬다.
그런데도 성공했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
왜? 다 전달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떴다.
<돌발! 퀘스트> 꽃비 내리는 평원!
받기만 할 수는 없다! 용사님들에게 ‘마음을 담은’ 꽃 선물을 전해요.
추가된 글자가 있었다. 친절하게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이렇게 뒤늦게 말을 덧붙이는 것 자체는 친절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려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창가로 가만히 걸어갔다. 여전히 꽃이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다. 조금 막막해졌다.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는 건 어떤 거지.’
기준이 너무 모호했다. 정성을 쏟으면 되는 건가? 그렇지만 내가 직접 꽃으로 뭔가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줄기도 없고 잎도 없어서 작은 꽃반지조차 만들 수가 없었으니까.
“어렵다….”
“뭐가요?”
멍하니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불쑥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이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내 옆에 서 있었다.
라엔이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란 어떤 것인지 물어볼까? 그렇지만 방금 내가 선물이라고 말하며 달랑 꽃송이 하나를 줬기에 이런 질문을 하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결국 뭉뚱그린 답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뭔가를 뒤늦게 알게 된다는 것이요.”
생각해 보니까 그랬다. 시스템이 처음부터 모든 조건을 알려 줬다면 이렇게까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음가짐은 첫 순간에 결정되는 게 가장 큰 법이니까. 처음부터 어려운 난이도였더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작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다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러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없잖아요.”
“이한 말이 맞아요. 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갑작스럽다면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겠죠.”
라엔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앞에서 부는 바람에 라엔의 붉은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그렇지만, 준비하지 않았기에 더욱 의미 있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나를 바라보는 라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라엔이 내게로 손을 천천히 뻗어 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목 부근을 살짝 스쳤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이 잠깐 굳는 것 같았다.
“가끔은 갑작스럽게 깨닫는 것도 좋지 않나요?”
천천히 이어지는 말간 목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라엔의 손이 스르르 멀어졌다. 라엔의 손에는 작은 꽃송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내 옷깃에 붙어 있던 것인 듯했다.
라엔이 자기 손에 들린 분홍색 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게로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민하는 표정이네요.”
“형도 뭔가를 갑작스럽게 깨달았던 적이 있나요?”
“글쎄요. 이한은 지금 어떤 걸 알게 된 건데요?”
모두가 규칙이라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질문에는 무조건 대답을 먼저 하기로 하는 규칙.
나야 알게 된 것이 있긴 했다. 시스템이 내게 준 퀘스트에 추가된 조건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라엔이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 라엔의 손 위에 있던 꽃이 다른 꽃들 사이에 뒤섞여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말을 뱉었다.
“꽃 소나기가 있다는 거요. 신기한 것 같아요. 이상하기도 하고요.”
“그렇죠. 처음 봤으니까 낯설겠네요.”
“라엔 형은요?”
“…나도요. 이 시기에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 잠깐의 공백을 두고 이어졌다. 라엔이 원래 생각했던 대답이 아닌 듯했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라엔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이번 퀘스트도 그랬다.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다시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당시에만 조금 억울할 뿐이지.
그러니까 준비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원래 세상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기도 하고.
“아름답네요. 밖에는 못 나가지만요.”
라엔의 시선을 따라 나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 말이 맞아요.”
여전히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려는 것처럼 하염없이.
◇
새벽에 눈을 떴다.
진한 꽃향기 속에서 잠이 들었었다. 창이 유리 없이 뻥 뚫려 있어서인지 꽃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창가에 다가가 섰다. 새까만 밤이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여전히 꽃이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에 꽃송이 하나하나가 빛났다.
전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서 여기까지 오는 걸까. 새벽이 옅게 묻은 듯한 분홍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어, 지금 다들 자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동시에 그가 내게로 훅 다가왔다.
“하견 형?”
순간 풀 향기가 훅 불어왔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왜 일어났어?”
송하견이 내 상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냥 깼어요. 하견 형은요?”
대답이 없었다. 송하견이 나를 빤히 바라본 채로 허공에 담요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 담요가 내 등 뒤로 부드럽게 덮였다.
“…보고 있었어.”
“네?”
“…물어본 거야. 밖에, 보고 있었어?”
송하견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깨로 내려뜨린 보랏빛 머리칼에 달빛이 옅게 스몄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밤이 되니까 다른 것 같아서요.”
“…뭐가?”
“밖에 분위기가요. 어두워서 그렇게 느껴지나 봐요.”
송하견이 내 어깨를 짚었다. 그러고는 내게 천천히 가까워졌다. 내 몸이 슬쩍 밀려났다. 어느새 나는 뻥 뚫린 창틀에 걸터앉은 채였다.
“형?”
내 옆에 선 송하견이 한 손을 바깥으로 쭉 뻗었다. 다시 거둔 손에는 커다란 꽃이 세 송이쯤 들려 있었다.
송하견이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인 것 같았다. 동시에 꽃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내 손목 위로 내려앉았다.
꽃 주위로 빛무리가 반짝였다. 곧 짙은 녹빛의 줄기가 자라났다. 그 줄기가 서로 칭칭 엮이면서 내 손목에 느슨하게 감겼다. 살갗에 닿는 느낌이 보드라웠다.
“팔찌…. 이런 마법도 있구나.”
멍하게 중얼거리는 내 앞으로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중에는 사라질 거야.”
새벽의 봄바람이 훅 불어왔다. 내게 헐겁게 묶인 꽃이 살갗을 살랑 간질였다.
이 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억에는 남잖아요.”
대답을 뱉고 보니 문득 언젠가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박율이 매년 사라지는 조각을 선물해 온 이유. 어쩌면 박율도 이런 생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손목을 들어서 내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화사한 향기가 났다.
“고마워요, 하견 형.”
“…응.”
멍하게 대답한 송하견이 내 팔을 훅 끌어당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자.”
송하견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송하견은 내가 다시 자리에 눕는 것까지를 확인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가만히 누운 채로 팔을 천장으로 뻗어 보았다. 손목을 감싸고 있는 분홍색 꽃이 달빛 사이로 선명하게 빛났다.
실마리를 잡았다. 이런 느낌의 선물을 주면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마음이 차고 넘치는 선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마법 같은 걸 못 쓰는데. 어떻게 하지? 마법을 써 달라고 부탁할까? 그렇지만 마법을 써 준 걸 바로 선물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점점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뜨니까 또 금방 아침이었다.
주변이 밝았다. 누워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박율의 얼굴이 보였다.
“…율이 형. 내가 또 늦었나요?”
“늦은 적 없어, 이한아. 딱 맞게 일어났어.”
박율이 내게 뻗은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천천히 일으켜 앉혔다.
다행히도 아직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짐을 다 정리한 상태긴 했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잘 잤나 보네. 마침 방금 다 정리한 참이었거든.”
다음 장소로 슬슬 이동하려는 것 같았다. 라엔이 내 등에 손을 사뿐히 올렸다.
“이제 갈까요.”
바람이 훅 불었다.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전히 꽃향기가 났다. 지는 태양처럼 새빨간 꽃이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붉은 나비처럼 내게로 살랑 날아온 꽃송이가 뺨에 스쳤다. 그러고는 바닥 위로 사뿐히 쌓였다.
“여기는 꽃이 빨간색이네요?”
“…서쪽이라서.”
그렇구나. 여긴 서쪽이구나.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연관성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때 박율이 말을 이었다.
“구역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했었지? 서편에는 이렇게 붉은 꽃이 내려.”
“동편은 다른가요?”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며 내게 물었다.
“무슨 색 꽃일 것 같아?”
“하얀색 아닐까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반대되는 색이니까요.”
민주혁이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반대되는 색인가?”
“아니야?”
“청록 느낌이 반대되는 색이긴 한데…. 뭐, 각자 느끼는 건 다르니까. 흰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박율이 말갛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맞아. 그래도 하얀색 꽃은 아니야. 천천히 더 생각해 봐.”
정답을 말해 주지는 않는구나. 박율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먼저 알려 주지 않는 편인 것 같았다.
박율이 손을 들어서 저쪽 멀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박율의 손끝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저 건물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