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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48화 (48/150)
  • 048화.

    꽃비 내리는 평원

    주변이 밝았다. 아직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게 느껴졌다.

    벌써 아침인가?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잠에 취해 흔들리는 의식 사이로 얼핏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못 일어나는데. 그냥 내일….”

    “아무래도 그게….”

    아니, 잠깐만. 그건 안 된다. 아직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것만큼은 수긍할 수 없었다.

    갈래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제대로 목소리를 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더 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싫어요.

    또렷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손을 뻗었다.

    누군가 내 손을 감싸듯이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러더니 내 팔 아래로 손을 넣어서 나를 마주 안았다. 진한 향기가 났다. 무슨 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이 번쩍 들렸다. 데려가 주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자 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닿아 오는 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내 몸도 따끈해졌다.

    주위로 바람이 휙 불었다. 이제 이동한 듯했다.

    내 눈가를 누군가 가만히 가려 주었다. 쏟아지던 태양 빛이 사그라들었다. 잠들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

    그렇게, 다시 잠들었다.

    눈을 반짝 떴다. 봄의 연한 바람이 내 뺨을 간질였다.

    “이한아, 일어났어?”

    바로 위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로 꽃향기가 났다. 뭐지?

    머리를 대고 있는 바닥이 묘하게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나는 지금 박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채였다.

    “야, 잘 자더라.”

    민주혁이 키득 웃으며 내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찍었다.

    “…잡아.”

    내 앞으로 뻗어 오는 단정한 손이 보였다. 손을 마주 잡았다. 송하견이 나를 훌쩍 일으켰다. 순식간에 자리에 앉았다.

    “더 쉬어도 되는데. 괜찮아요?”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몸 위로 라엔의 로브가 덮여 있었다. 어쩐지 몸이 따뜻하다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삿다…….”

    아직 정신이 조금 덜 깬 듯했다. 양손을 들어서 내 뺨을 때렸다.

    찰싹.

    생각보다 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옆에서 너 뭐 해, 하면서 가볍게 웃는 민주혁의 목소리도 들렸다.

    내 얼굴로 꽃송이가 나풀나풀 내려앉았다. 분홍색의 꽃송이였다.

    “…와.”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눈에 보였다.

    넓게 펼쳐진 평원이었다.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에서 분홍색 꽃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도 온통 꽃송이가 깔려 있었다. 같은 분홍색인데도 다 조금씩 달라서 꼭 분홍빛 물결이 치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초록 잔디도 보였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내가 앉은 곳에도 꽃이 가득했다. 그래서 아까 꽃향기가 났구나.

    자세히 보니 꽃이 줄기도 이파리도 없이 똑 떨어진 모양새로 있었다. 크기도 가지각색이었다. 꽃이 비처럼 내려서 쌓인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했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내가 오래 잤나요?”

    “아니야. 금방 일어났어.”

    박율이 맑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바람이 살랑였다. 송하견이 옆에서 순식간에 유리잔을 만들어 내더니 그걸 내 손에 쥐여 줬다.

    “고마워요, 하견 형.”

    “…천천히 마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주위에 꽃이 가득해서인지 물에서도 은은하게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계속 이렇게 꽃이 내리는 거예요?”

    “응. 매일.”

    “그런데 생각보다 바닥에 많이 쌓여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져서 사라지거든요. 흔적도 없이요.”

    꼭 꿈을 꾸는 것처럼 신기했다. 박율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출발할까?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잘 거거든. 텔레포트를 바로 썼으니까.”

    “여기에서 연락을 넣는 게 아니었나요?”

    “선이한. 너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민주혁의 목소리가 마치 장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제대로 들었거든, 민주혁.”

    “어, 잘 들었네. 여기는 완전 중심이고, 동편과 서편으로 또 나뉘어 있거든. 전달하는 건 그 두 개 구역으로 가서 할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라엔 형님?”

    “맞아요. 정확해요.”

    옆에서 송하견이 조용히 내 어깨를 짚었다.

    “…업어 줘?”

    이 말을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송하견이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꽃송이가 푹신하게 밟혔다. 꽃은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데도 상하지도 않은 채 생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얼마간 걷자 눈앞에 하얗고 조그만 건물이 보였다. 벽이 원통처럼 둥근 모양새고 천장까지 둥글었다. 네모난 창이 단정하게 뚫려 있었다. 창에 유리는 끼워져 있지 않고 자리만 나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는 거예요?”

    “맞아. 뭐 하나만 확인하고 바로 짐을 풀면 될 것 같아.”

    다 같이 그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의 구조를 보니 이 건물은 탑인 것 같았다. 중앙에 계단이 빙글빙글 있었다.

    3층 정도 높이를 올라갔을 때 위쪽에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중앙에 흰색 막대가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위에 동그랗고 투명한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밖에서 내리는 꽃송이와 똑같은 분홍색 수정구였다.

    박율이 그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빛이 잠깐 반짝였다.

    “음…. 오늘인가 본데.”

    박율의 목소리가 곤란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민주혁과 라엔이 바로 말을 받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시기가 조금 일러요. 오늘이라면 언제쯤인가요, 리더 형?”

    박율이 뻥 뚫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녹색 눈동자에는 깜빡임조차 없었다. 나도 박율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서 아직도 분홍색 꽃잎이 살랑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박율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바로.”

    옆에 서 있던 라엔이 내 양쪽 귀를 손으로 스륵 감쌌다. 로브가 내 등 뒤를 살짝 덮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손바닥이 스치며 닿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뭐가 오늘인데요?”

    내 물음에 송하견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라엔이 귀를 감싸고 있어서인지 송하견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소나기.”

    동시에 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송하견을 바라봤던 시선을 창밖으로 급하게 돌렸다. 분홍색 꽃이 쏟아붓듯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푸른 하늘이 꽃송이 때문에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꽃… 소나기요…?”

    라엔이 내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는 봄의 끝자락 즈음에 내려요. 올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네요.”

    사방에 진한 꽃향기가 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꽃잎이 떨어지며 이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민주혁이 내 오른편으로 와서 섰다.

    “내일 텔레포트로 떠날 거니까 상관은 없어. 근데 오늘은 아예 밖에 나가질 못하겠네.”

    “이한아, 여기서만 있어서 답답하진 않겠어?”

    옆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율이 창밖으로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꽃이 단정한 손을 스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 위로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저 위쪽부터 꽃송이가 떨어져 오는 듯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이 여전히 새파랬다.

    “괜찮아요. 예뻐서 좋아요, 형.”

    신전에서 있을 때는 늘 단조로운 하얀 건물만 봐 왔다. 이런 풍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답답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꽃잎끼리 스치며 사락사락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창 안으로 들어왔다. 빗방울처럼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꼭 바람 소리처럼 맑았다. 그 위로 박율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한아.”

    박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박율이 눈을 접어 웃으며 내게로 손을 천천히 뻗어 왔다. 박율의 손이 내 귓가를 살짝 훑고 지나갔다.

    “그렇네, 예쁘다.”

    손을 올려서 그 부근을 더듬었다. 손끝에 부드러운 뭔가가 걸렸다. 그걸 살짝 손에 쥐어서 바라봤다. 분홍색의 조그만 꽃이었다.

    박율의 말처럼 꽃송이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니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띠링.

    <돌발! 퀘스트> 꽃비 내리는 평원!

    받기만 할 수는 없다! 용사님들에게 꽃 선물을 전해요.

    성공 시: ‘사라지지 않는 꽃(1회)’ 획득

    실패 시: ‘사라져 버리는 꽃’ 페널티

    제한 시간: ‘꽃비 내리는 평원’ 지역을 벗어나기 이전까지

    파란 창이 둥둥 떠다녔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럼에도 퀘스트 창은 이물질처럼 여전히 눈앞에 남아 있었다.

    아니, 선물을….

    물론 받기만 하는 건 당연히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강제할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게다가 보상이나 페널티도 아리송했다. 저것만 보고는 어떤 건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실패하는 것보다는 성공하는 게 더 낫겠지.’

    성공 보상에 1회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이것도 내가 지금까지 받은 보상처럼 사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인 듯했다.

    “그러면 이제 짐 풀고 쉬자. 내일 떠날 거니까.”

    박율이 창가에서 슬쩍 떨어져서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율이 형. 잠깐만요.”

    박율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박율이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감싸 쥔 손목이 단단했다. 박율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연녹색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을 담았다.

    아, 너무 다급했다. 퀘스트를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잡고 있던 박율의 손목을 슬쩍 놓았다. 그리고 바로 위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박율이 내 손을 빤히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건 아니에요.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박율의 소매를 살짝 들어 올렸다. 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박율이 내 손길을 따라서 팔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 이렇게 있어요, 형.”

    박율의 손목을 놓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꽃이라면 수두룩했다. 내리는 꽃송이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어어, 야. 조심해.”

    민주혁이 한 팔로 내 몸을 받치듯이 감싸 안았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떨어질 리가 있을까? 민주혁은 다소 날 애처럼 챙기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단단히 감긴 민주혁의 팔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꽃송이를 잡아챘다.

    박율의 손바닥 위로 그걸 사뿐히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내 눈앞에는 퀘스트가 성공했다는 퀘스트 창이 뜨지 않았다.

    왜지? 이걸로는 부족한가?

    그렇다면 조금 더 노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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