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서서히 다가오는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깜깜한 정신 속에서 생각했다.
역시 미래시 스킬이 써지는 게 맞았구나. 꽤 오랜만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 거지? 조금 긴장됐다.
후욱.
내 쪽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한겨울처럼 차가운 바람이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지난번 미래시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뿌연 시야에 저 멀리서 반짝 빛나는 붉은 빛이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발이 보였다. 뒷모습이었다.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흐른 듯 너른 등이 더 단단해 보였다.
그 사람이 기다란 검을 치켜들었다. 방금 봤던 붉은빛은 검에 박혀 있는 보석에서 빛나는 것인 듯했다. 높이 솟아오른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순간.
화악.
정신이 들었다.
「<미래시 중급> 스킬 사용!」
눈앞에 파란 창이 깜빡였다. 나는 라엔의 품에 안기듯이 기대서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 피가 라엔의 옷을 검붉게 더럽히고 있었다.
“허억, 콜록…. 형, 옷….”
라엔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급하게 몸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있어요.”
라엔의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렸다. 조용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라엔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차분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에 힘 풀어요, 이한.”
닿아 오는 손길과는 달리 라엔의 목소리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순간 정말로 몸에 힘이 풀렸다. 라엔에게로 스르륵 몸을 기댔다.
“지금 어디가 안 좋아요?”
“…괜찮, 욱…. 흐으, 괜찮아요.”
“……말하지 마요.”
정말 괜찮았다. 피를 토하는 중이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말을 더 잇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시간을 재고 있어요. 보통 얼마나 지나야 멈추나요?”
피를 토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말해 뒀기 때문에 이 상황 자체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언제쯤 멈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각혈하는 양이 상당한데. 몇 분만 더 기다려 보고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면 하견을 불러올게요.”
어, 그건 안 되는데. 라엔을 향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라엔과 눈이 딱 맞았다. 라엔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라엔이 숨을 살짝 들이켰다. 비릿한 피 냄새를 덮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가까이에서 나는 듯했다.
라엔이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내 뒷머리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꾹 눌렀다.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왜 그래요, 이한. 고개는 들지 말고요. 아직 피가 안 멈췄잖아요.”
“라엔 형….”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라엔의 몸이 흠칫 떨리는 듯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세게 눌렀나요?”
내 뒷머리를 눌렀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라엔이 사과하는 것처럼 내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아니요, 그건 괜찮아요. 그냥, 이건 말하지 말아 줬으면 해서요.”
이제 피도 거의 멈춰 갔다.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고 있을 때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혈했다는 걸, 말하지 말아요? 왜요?”
“이제 내일이면 출발한다면서요.”
“…그게 지금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했다. 또 내 몸 상태를 걱정하면서 나를 여기에 두고 가려고 할지도 몰랐으니까. 라엔에게 말하기 위해 고개를 다시 들었다. 라엔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잠깐만요, 이한. 왜 울어요.”
라엔이 다급하게 내 눈가를 쓸었다. 라엔의 손끝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우는 거 아니에요.”
곧바로 대답했다. 피를 토하느라고 잠깐 눈물이 고였던 것 같다.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역류해 오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단호하게 말했으나 라엔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엔이 입가를 가린 내 소매를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주위로 클린 마법을 쓰며 말을 이었다.
“이한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라엔이 말하지 않아 준다면 이 상황에 대해 굳이 더 해명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고마워요, 형.”
“그러니까 울지 마요.”
우는 건 항상 라엔이었는데. 지금도 라엔이 더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어쨌거나 순조롭게 함께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라엔이 나를 부축하듯이 옆에서 조심히 붙잡았다.
“걸을 수 있겠어요?”
“아파서 피를 뱉는 건 아니에요.”
내 어깨를 잡은 라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를 뱉는데 어떻게 몸이…. 아니,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어디 가려는 거예요?”
“내일 떠난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다들 일정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형도 가서 함께 얘기해야 하잖아요. 나도 같이 가요.”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긍정이었다. 지금 라엔도 가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라엔은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혀 놓으려고 했지만, 내가 확고하게 의사를 내비치자 결국에는 같이 내려가기로 했다. 다들 1층 홀에 있을 거라고 했다.
‘아까 본 미래시는 뭐였을까.’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다행히도 가까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박율의 모습을 보니 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았는데.
미래시 스킬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발동되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흐리게 보였기 때문에 장소도 시간도 알 수 없었다. 박율의 단단해 보이는 뒷모습과 반짝 빛났던 날카로운 검만이 생생했다. 미래시로 본 건 입 밖에 낼 수 없으니 이걸 알아내는 건 나의 역할이었다.
고민에 빠진 채로 계단을 내려가니 1층까지 금방이었다.
“같이 내려왔구나.”
다들 1층에 모여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빛나는 지도 위에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 정리됐나요?”
“…응.”
“그런데 이한아,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네. 괜찮아?”
몸을 흠칫 떨었다. 괜찮다고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다들 시선이 나에게로 향해 있지 않았다. 내 뒤에 선 라엔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라엔 형?”
뒤를 휙 돌았다. 라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동시에 내 뒤로 의자가 하나 휙 끌려 왔다. 민주혁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앉아서 들어, 선이한.”
“다들 서 있는데?”
“…앉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송하견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리에 풀썩 앉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에 손에 쓴 향이 나는 뜨거운 차도 들려 있는 채였다.
“그래. 이것도 마시면서 듣자.”
박율이 유리잔을 내 입가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 라엔이 뭔가 낌새를 준 게 틀림없었다. 말하지 않기로 했던 건 정말 목소리만 안 내겠다는 거였구나.
라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갈 곳은 땅의 중심지예요. 거기서 각 마을로 연락을 넣을 거예요.”
“마물이 다른 데로 스며든다는 연락이요?”
“네. 마물이 스며들었을 경우에는 내 마법으로 감지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밤이 내린 숲에서 확인해 보니 다른 지역에도 균열이 열렸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상황이 변했다는 말을 서둘러서 전해야 해요.”
그런 거라면 확실히 심각한 일이었다. 시스템이 말했던 폐허 같은 세상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걸까?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가는 곳은 위험한 지역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한아.”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물론 연락을 넣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균열을 닫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위험할 수밖에 없겠지만.
“라엔 형은 땅 전체에 감지 마법을 걸어 둔 건가요?”
“아니요. 균열이 열릴 가능성이 큰 외곽 지역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만요.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지만요.”
라엔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주변 마을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 대비할 수 있도록 연락은 꼭 넣어 둬야 해요.”
“규모가 큰 마을은 연락이 닿았는데, 여기서 작은 마을까지 연락을 넣기는 쉽지 않다고 했었지, 라엔아.”
“리더 형 말이 맞아요. 여기서 연락을 다 돌리면 좋을 텐데, 내가 아직 부족해서 거기까지는….”
박율이 단호한 목소리로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맞아요. 절대 아닙니다, 라엔 형님. 감지 마법은 형님이 제일 잘하시지 않습니까. 형님이 아니었으면 마을을 하나하나 돌아봐야 했을 겁니다.”
“…네. 열심히 해서 금방 끝낼게요.”
라엔이 민망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지? 라엔은 아카데미에 다닐 때부터 뛰어났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옆에서 송하견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라엔. 네가 핵심이야.”
“그런 말을 바란 건 아니었어요, 하견.”
“…늘 진담이야.”
라엔이 다시 차분하게 지도의 중심을 손으로 짚었다. 조그만 꽃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 평원에는 항상 꽃이 깔려 있어요. 꽃은 한 송이도 자라나지 않지만요.”
“네? 어떻게요?”
“꽃이 비처럼 쏟아지거든요. 이한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보자, 더 말해 줄 게 있었나?”
“…아. 선이한도 궁금해했어.”
“어? 뭐를, 하견아?”
“…뒤틀린 장소.”
거기까지 말한 송하견이 박율과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바로 말을 이었다.
“이한아, 너도 숲에 해가 뜨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라는 걸 인식했구나.”
정확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은 어떻게 짧은 단어만 듣고 바로 이해한 거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들 긴 말 없이도 대화가 됐다.
‘잠깐.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야?’
다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뭘 묻고 싶은지 먼저 알아채 줬던 것 같다. 나도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왠지 심장이 쿵 뛰는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정신 차리자. 그런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 이한이도… 장소가 뒤틀려 있다는 걸 알아챘구나.”
박율이 조용하게 내뱉는 혼잣말 앞으로 민주혁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야, 선이한. 너 그러면 이번에 갈 곳도 신기해하겠다.”
“그래? 하긴, 꽃이 비처럼 내린다고 했으니까.”
“어. 너도 좋아할 것 같아.”
밝게 웃는 민주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러면 이제 정리하고 올라가자. 내일 일찍 떠날 거니까.”
“네, 박율 형님!”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떠나는구나.
내가 이렇게 여러 장소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새하얀 풍경만 내리 보던 신전에서의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오늘 밤은 잠을 잘 못 이루지 않을까?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생각과 상황은 일치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늘 이랬다.
내일,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