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거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민주혁이 내 머리칼을 헝클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기다렸어.”
어느새 종이봉투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민주혁이 내 손목을 감싸고 나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따라와. 1층으로 가자.”
따라가는 게 아니라 거의 딸려 가는 거였다. 민주혁의 단단한 손안에서 달랑거리는 내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쩌면 민주혁은 생각보다 힘이 센 걸지도 몰랐다. 내가 약한 건 아니니까.
민주혁은 계단을 내려가서 1층 복도의 구석에 있는 방문 앞에 섰다.
“이런 데도 있었어?”
“몰랐어? 하긴, 작은 방이니까.”
민주혁이 방문을 달칵 열었다.
조그만 창 안으로 푸른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커다란 이젤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등받이 없는 동그란 나무 의자가 있었다.
묘한 향기가 났다. 오래된 책을 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눅눅한 흙길을 걷는 것 같기도 한 향기.
민주혁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물감 냄새 많이 나? 나름 환기하긴 했는데.”
“아니, 별로 안 나. 그리고 괜찮아.”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바람이 이쪽으로 살랑 불어왔다. 내 옷자락이 조그맣게 흔들리며 몸을 스쳤다. 민주혁이 내 손에서 종이봉투를 부드럽게 빼내며 말을 이었다.
“벌써 봄이네. 날이 선선하다.”
민주혁의 말이 맞았다. 어느덧 봄이었다.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도 금세 녹았다. 가시지 않을 것만 같던 추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 민주혁.”
“시간은 항상 빨랐어.”
“나는 아니었는데.”
흘러가는 시간은 하나하나 녹아들듯이 피부에 새겨졌다. 느릿하게 흘러 더 길게 느껴지던, 멍하게 흘러가기만 했던 모든 시간.
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다. 조금 심심할 때도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가끔 그때 생각이 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구나 싶어서.
“신기한 것 같아. 다 금방 지나가 버려서.”
“그렇구나.”
민주혁이 뭔가를 더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가라앉은 듯 보였다.
민주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빨라서 아쉽지는 않아?”
“별로 그렇지는 않아.”
“…그래?”
민주혁이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아쉬운데.”
민주혁이 한 손으로 내 턱을 가볍게 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이 딱 맞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말갛게 담겨 있었다.
민주혁이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민주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천천히 이어졌다.
“봐, 벌써 우리 둘 다 한 살씩 더 먹었잖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열여덟의 선이한이고….”
민주혁의 입가에 차분하게 호선이 그려졌다. 조금 아쉽다는 듯이 웃은 채로 민주혁이 말을 마쳤다.
“열일곱의 선이한은 이제 없잖아.”
괜히 긴장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는가 했는데. 민주혁의 손을 붙잡아서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쉬워?”
“당연히 아쉽지. 이제는 열일곱 살의 선이한을 그릴 수가 없을 테니까.”
“…나?”
“어. 그려 줄까 했는데, 네가 싫으면 말고.”
싫지 않았다.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민주혁이 내 머리 위로 손을 턱 얹어서 세차게 젓고 있던 고개를 멈췄다.
“이제 일주일쯤 후면 다시 떠날 거니까, 그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겠다.”
“어디로 가는데?”
“그건 아직 정하고 있어. 생각해 놓은 장소는 몇 있긴 한데…. 아, 너도 같이 얘기할래?”
“아니, 괜찮아.”
어차피 나는 아는 곳도 없으니까 같이 얘기한다고 해도 도움도 안 될 터였다. 가만히 생각하던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그래. 정해지면 바로 얘기할게. 그러면 내일부터 그리기 시작해야겠다.”
“오늘은?”
“오늘은…. 그림 소개. 별거 없긴 하지만.”
민주혁이 방 저편으로 걸어갔다. 천이 덮인 그림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민주혁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새하얀 천이 한순간에 위로 솟아올랐다.
“와. 민주혁, 다 네가 그린 거야?”
그 앞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았다. 풍경 그림이었다. 두텁게 발린 물감 위로 붓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했다. 눈앞에 그 장소가 있는 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잘 그렸다….”
“뭐야. 오늘은 솔직하네.”
민주혁이 내 등을 팡 쳤다. 나는 솔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민주혁을 살짝 흘겨보다가 다시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린 거야?”
“제대로 시작한 건 3년쯤 전부터?”
“용사 서약을 맺은 다음부터네.”
“…그렇지.”
눈앞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림에는 숲이 그려져 있었다.
온통 푸르른 숲이었다. 바로 위에 펼쳐진 하늘은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구석진 저 멀리로는 얼핏 회색빛 구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까, 너는 왜 용사 서약을 맺은 거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민주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민주혁의 표정을 채 살피기도 전에 내 머리 위로 손이 툭 얹어졌다. 팔에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선이한. 너는 왜 우리와 합류한 건데?”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지금 모두와 함께하는 이유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조금 곤란했다.
시스템이 눈앞에 생겨났으니까? 아니면 스승님이 미래를 봤다고 했으니까? 둘 다 그다지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망설이고 있는 사이 민주혁이 말을 이었다.
“억지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나중에 말해 줘.”
민주혁이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내게로 양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것 같았다.
그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민주혁이 내 손등을 가만히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별 이유 없어. 그냥 그렇게 되던데?”
“무슨 뜻이야?”
“용사 서약을 맺겠다는 건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했거든.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아니더라. 어떻게 결정을 한순간에 내릴 수가 있겠어.”
민주혁이 나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몸이 번쩍 들리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떨어지는 이유를 짚기가 어려울 뿐이지. 이유가 될 만한 건 한참 전부터 차근차근 쌓아 왔을 테니까.”
민주혁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아, 거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잖아.”
아직 열어 놓은 창문에서 겨울과 봄의 중간 즈음에 걸쳐 있는 미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민주혁의 갈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올라가자. 내일 일어나면 내 방으로 와.”
“방에 없으면?”
“그러면 아마 여기 옆에 방어 마법 훈련실에 있을 거야. 거기 문은 절대 먼저 열지 말고, 꼭 노크만 해. 알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민주혁이 내 등을 슬슬 밀면서 화실 밖으로 나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화실 안의 공기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옅은 향기가 뚝 끊겼다.
선명히 남은 건 내 등을 짚고 있는 민주혁의 단단한 손길뿐이었다.
◇
민주혁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여섯 날이 흘렀다.
그 말은 이제 내일이면 일주일째가 된다는 것이고, 곧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민주혁도 바쁠 테니까 오랜 시간을 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틈틈이 시간을 내줬다. 물론 민주혁은 그 시간 동안 장난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림은 언제 보여 줄 거야?
-나는 보여 준다고 한 적 없는데.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얼굴을 보고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혁의 말은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긍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선이한. 왜 그런 표정이야. 당연히 장난이지.
-어어. 그렇구나.
-그래도 진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나중에 제대로 그린 걸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런 대답을 들으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서 물감까지는 쓸 수 없다고 했으니까.
-제대로 그린 그림이어서가 아니라 네 그림이어서 좋은 건데. 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말하니 민주혁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얼굴을 했다.
뿌듯하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그려 주는 그림인데 싫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결정은 민주혁의 몫이니까.
아무튼 그래서, 이제 나는 내 몫을 해야 했다. 내일 떠나기 위한 짐을 잘 싸 뒀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헐렁한 가방 안을 다시 한번 뒤적여 봤다. 완벽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니 문이 살짝 열렸다. 라엔이었다.
“이한. 짐 정리하고 있었어요?”
“네. 이제 다 끝냈어요.”
라엔이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가방이 라엔의 손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법으로 넣어 둔 것 같았다.
“고마워요, 형.”
가볍게 고개를 저은 라엔이 내가 앉은 침대 옆으로 풀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라엔 형. 무슨 일로 왔어요?”
“음…, 담아 준 마법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나 해서요.”
“며칠 전에 새로 주지 않았어요?”
지금 품 안에 라엔이 준 마법 시전용 종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잠깐 잊어버렸나?
라엔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당황한 것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채였다. 설마 자기가 그사이에 그걸 잊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네요.”
“네. 그래도 고마워요.”
잠깐 생각하던 라엔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내일 어디로 갈 건지 얘기해 주려고요.”
“어디로 가는데요?”
“이 땅의 중심지로 이동할 거예요. 넓은 평원이에요.”
“중심지면 사람도 많은가요?”
“아니요. 사람은 한 명도 살지 않아요. 거기에는 꽃이 비처럼….”
라엔의 말이 점점 흐릿하게 들렸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건, 언젠가 느꼈던 적 있는….
라엔의 팔을 급하게 붙들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라엔의 팔뚝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듯했다.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라엔 형…. 저, 잠깐만….”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