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그 이후로도 계속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이 뚫린 것처럼 내리던 눈은 오늘이 되자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누군가 발자국을 주욱 남기며 걸어 나왔다. 아침 햇살에 밝게 빛나는 금색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얼어붙은 정원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꽃잎을 숨죽여 놓았던 차가운 눈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하얀 세상 속에서 색색의 꽃잎이 제 빛깔을 드러내었다.
‘정말 오늘에서야 나왔네.’
박율은 어제 종일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안에 뭐가 있기에 그러는 건지 궁금했지만, 다들 지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알지 못한다고 했다.
-왜 안 들어가 봤어요?
-리더 형이 원하지 않아서요.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이유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탁자에 놓았던 벨벳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제 이걸 전해 주러 가야 했다.
1층으로 내려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눈 냄새가 났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차가운 향기였다. 쌓인 눈이 겨울 햇살에 반짝였다.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박율에게로 다가갔다.
“아, 이한아. 잘 잤어?”
내 기척을 알아챈 박율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박율의 주위로 봄처럼 따뜻한 바람이 연하게 불고 있었다. 이걸로 눈을 녹이고 있는 듯했다.
“네. 율이 형은요?”
“형도 잘 잤지. 하룻밤 사이에 눈이 많이 쌓였네.”
“그렇네요. 어제 종일 오더라고요.”
박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물어봐도 될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율이 형은 어제 계속 지하실에 있었다면서요. 눈 오는 것도 못 봤겠네요.”
“형이 거기서 뭘 했는지가 궁금하구나.”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정확했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나는 말을 티 나게 하는 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박율이 눈치가 빠르거나.
“지금은 말고. 나중에 알려 줄게.”
박율이 이렇게 말한다면 더 물어봐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었다.
가져왔던 상자를 박율에게 내밀었다. 박율이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조각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고는 품에 조심히 넣었다.
“고마워.”
박율이 마치 잘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 머리칼을 헝클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한아. 네가 고른 조각도 지금 가지고 있어?”
품에서 조각을 꺼내서 박율의 손에 올려놓았다. 박율이 조각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공중으로 조각이 떠올랐다. 위쪽에 조그만 구멍이 뚫리더니 그 안으로 기다랗고 얇은 끈이 끼워졌다.
박율이 그걸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손을 뻗었다. 문득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옆의 정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박율이 조각을 내 목에 살짝 걸었다. 스치는 손이 델 듯이 뜨거웠다. 그 온도가 너무 선명해서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율이 형. 손… 뜨거워요.”
숨을 옅게 들이켜는 소리가 귓가에 잠깐 들린 것 같았다. 박율의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내 손바닥 위로 목에 걸린 조각을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눈을 녹이느라고 그랬나 보다.”
박율이 내 손 위에 놓인 조각을 손끝으로 차분하게 두드렸다. 조각이 목에 걸고 다니기 알맞은 크기로 서서히 줄어들었다.
“세 번 두드리면 크기를 바꿀 수 있어.”
이해했냐고 묻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박율과 시선을 마주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갛게 웃는 박율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형. 내년에도 같은 선물을 주는 건가요?”
“그래.”
“내후년에도요?”
박율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말을 끝낼까 하다가 지금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물어볼 상황이 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것처럼 최대한 평탄한 목소리를 냈다.
“그 이후로도 계속이요?”
박율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용사 임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함께할 수 있는 걸까? 긴장한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박율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남아 있을 거야.”
이번에도 박율은 내가 뭘 물어보고 싶었던 건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아마 레데오에 계속 남아 있는다는 거겠지. 그런 대답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이한이한테는 이게 첫 번째 선물이네.”
“네. 고마워요, 형.”
“그래. 잘 간직해 줘.”
“꼭 그럴게요. 그런데 내년이면 사라지잖아요.”
“맞아. 들었구나.”
“왜 사라지게 만들어요? 그대로 계속 간직해도 되잖아요.”
박율이 내 손 위에 놓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내 옷깃을 천천히 들춰냈다. 안쪽에 얇은 옷을 하나 덧대어 입었음에도 겨울의 찬 공기가 훌쩍 들어왔다.
시린 바람에 몸이 살짝 떨렸다. 박율은 들춰진 내 옷깃 안으로 조각을 쏙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옷깃을 여몄다.
“이한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해 줘.”
“이것도 나중에 알려 줄 거예요?”
박율이 내 가슴께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목에 걸려 있는 조각이 그 부근에서 달랑이면서 딱딱하게 닿아 왔다.
“그래.”
박율이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었다. 내리쬐는 햇살이 박율에게로 쏟아졌다. 주위가 밝게 빛나서 오히려 빛이 산란하는 물가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꽃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눈이 다 녹아서 꽃잎 위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 날이 추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기는 발아래로 쌓인 눈이 뽀드득거리며 밟혔다.
옆에서 발을 맞춰 오는 박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박율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곱게 접어 웃은 채였다. 늘 그랬듯이.
◇
새해를 맞이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날씨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나는 박율에게 선물을 전해 준 그날 이후로는 한동안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날도 아침에…, 아니. 점심에 눈이 번쩍 떠졌고, 방 안은 이미 노란 햇살로 물들어 있었다.
착잡함을 안고 가만히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고요한 방 안에 공기처럼 자연스레 스며든 소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펜촉이 노트를 차분하게 긁는 소리였다.
-하견 형.
-…깼네.
송하견은 내가 갑자기 목소리를 냈는데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느릿하게 말을 받았다. 종이가 사락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겹쳐졌다.
-형, 오늘은 연구실에 안 갔네요.
-…응.
-바쁜 거 아니었어요?
-…안 바빠.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어떤 걸 믿어야 하는 걸까. 나는 행동을 믿는 쪽이었다. 뭔가를 쉴 새 없이 하는 걸 보니 송하견은 바쁜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송하견이 의자에 앉은 채 내 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송하견의 뒤쪽에서 환한 햇살이 비쳤다.
-전부, 물어봐.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그런 나를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햇살에 비치는 먼지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천천히 흔들리며 빛나는 점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체력을 보충해 주는 약초 같은 건 없나요?
-있어.
그러면 그것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 송하견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탁자에.
고개를 살짝 돌려서 탁자를 봤다.
보랏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꽂혀 있는 흰색 막대가 어느새 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은은한 풀 향기가 퍼져 나갔다.
-이 중에서 어느 거예요?
-…바닥이 동그란 거.
-다 그런데요…?
-응.
맙소사. 약초의 효과를 빌린 체력이 이 정도였던 거라니.
-…여러 가지 섞은 거야. 왜?
-체력이 안 돼서 늦게 일어나는 건가 해서요.
-…처음이었다면서.
-네?
-멀리 다니는 거.
그건 그렇긴 했다. 밤이 내린 숲에서 내가 뭔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신전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몇 배는 움직인 거였다.
-여독 때문에, 당연한 거야. 휴식이 필요하니까.
송하견이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안심됐다.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물론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한 건 아니었다. 어딘가로 다녀올 때마다 계속 이렇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루빨리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는데, 바로 오늘, 웬일인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새파란 햇살을 맞이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좋은 징조였다. 슬슬 여독이 다 풀린 걸지도 몰랐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옆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송하견의 부지런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은 먼 듯했다.
그렇다면 송하견은 연구실로 갔을 테고, 라엔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박율은… 잘 모르겠다. 박율은 내가 늦게까지 잘 때면 점심 식사를 가지고 올라와서 깨워 주곤 했는데, 이걸로는 박율이 언제쯤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주혁은 항상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고 했으니까….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쪽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쇼!”
문을 벌컥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이쪽으로 훅 불어왔다. 민주혁이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어, 선이한이네. 벌써 점심이 다 지났었나.”
“너….”
“농담이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오늘은 안 피곤해? 일단 들어와.”
앞으로 민주혁에게는 반드시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민주혁의 방은 생각보다 잘 정돈된 느낌이 났다. 방금 막 꺼내 놓은 듯한 외출복이 의자에 걸려 있었다.
“민주혁, 어디 나가려고?”
“아니. 이미 다녀왔어.”
민주혁이 걸음을 옮겨서 외출복을 집어 들었다. 곧 공중으로 떠오른 옷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팔랑거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단정하게 쭉 펴졌다. 바람이 내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주혁이 옷을 옷장 안에 걸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쉽다. 내가 좀 더 늦게 출발했으면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어디 다녀왔는데?”
“화방에.”
민주혁이 바스락거리는 종이봉투를 이쪽으로 가져왔다. 안에는 동그란 통에 담긴 물감이 서너 개 들어 있었다.
“그림 그리는 거 원래 좋아해?”
“어? 알고 있었어? 그냥 취미로.”
그림을 보고 싶다고 말해도 될까 고민하고 있는데 민주혁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깜빡이는 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어?”
씩 웃은 채였다.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