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새로운 한 해의 시작
라엔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얼굴 바로 옆으로 스쳤다.
“올해도 잘 부탁해요.”
어느새 라엔의 로브가 내 어깨 위로 도톰하게 덮여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엔의 샛노란 눈동자가 아침에도 빛날 별처럼 반짝였다.
몇 가닥 흘러내린 라엔의 머리칼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떠오르는 태양에 녹아들듯이.
“이한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율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내 모습을 곧게 담았다.
“같이 돌아가자.”
박율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채도 높은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박율의 바로 뒤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붉은 면적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먼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새하얗게 내리는 눈발 사이로 박율이 내게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이었다. 그 위로 내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박율이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
“네. 돌아가요.”
내 목소리와 함께 장소가 휙 바뀌었다. 눈앞에 레데오의 대문이 보였다. 공기 중에 옅은 꽃향기가 퍼져 있었다.
끼익.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의 흐드러진 꽃 위로 흰 눈송이가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꽃잎 하나하나가 생생하고 맑았다. 찬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해의 시작은 그렇게까지 추운 것 같지는 않다고.
신전 밖에서 맞이하는 첫눈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
레데오 안으로 들어왔다. 훈훈한 공기가 몸을 덥혔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뻥 뚫린 투명한 창문 위로 눈이 차곡차곡 떨어지고 있었다.
민주혁이 내 목에서 목도리를 다시 풀어냈다. 시원한 바람 향기가 스치듯이 났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쪽의 탁자 위에 흰색 벨벳 상자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커다란 창 앞에 놓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가져가.”
“네?”
“리더 형이 준비한 거예요. 매년 첫날에 항상 선물을 준비해 줬거든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상자에 투명하고 반짝이는 육각기둥 모양의 조각이 각각 있었다. 안에 금색 꽃이 한 송이씩 들어 있었다.
“아까 봤던 조각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맞아요. 같은 거예요. 만든 지 일 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거라서요.”
“그래서 율이 형이 매년 선물하는 거예요?”
라엔이 그 조각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조각이 가루가 돼서 흩어진 이유가 이거였구나.
“왜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사라지게 만드는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옆에서 민주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박율 형님도 낭만을 중요시하셔서 그래.”
“너도 참 한결같다, 민주혁.”
“정말이야. 사라지더라도 새로운 의미로 다시 생겨나는 거니까.”
평소와 같은 말투였음에도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같은 거라도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잖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민주혁의 말을 듣고 보니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았다. 박율은 생각보다 더 낭만적인 사람인 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 사이로 라엔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더 형에게 한 해의 처음은 의미 있는 날이에요. 나는 그래서라고 생각해요.”
“왜 의미 있는 날이에요?”
“리더 형이 용사로 선택받은 게 해의 첫날이니까요.”
라엔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라엔이 입술을 잘근 물었다.
하염없이 휘몰아치는 눈발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엔이 생각을 정리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옅은 웃음을 지은 채였다.
“매번 주혁이하고 얘기했는데 결정이 안 나더라고요. 이한은 어떻게 생각해요?”
“선이한. 내 말이 더 타당하지?”
민주혁이 기대하는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민주혁을 향해 가볍게 웃어 주고 송하견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견 형은요?”
“…글쎄. 박율 형은 둘 다 맞다고 했어.”
송하견의 생각을 물어본 거였는데. 내가 더 질문하기 전에 송하견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송하견이 조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안에 반짝이는 빛 가루가 빼곡하게 박혔다. 송하견이 그걸 민주혁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송하견 형님.”
민주혁이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감정하는 것처럼 팔을 쭉 뻗어서 조각을 가만히 살폈다. 고민하듯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리더 형이 우리에게는 따로 선물을 준비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라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송하견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박율 형, 단호하니까.”
“맞아요. 한번 말한 것에 대해서는 확고하니까요.”
확실히 박율은 그런 면이 있었다. 민주혁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이건 받아 주셔서 다행입니다.”
민주혁이 여전히 조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우리가 그렇게 받기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하니까, 그때부터는 아예 하나씩 더 준비해 주시잖습니까.”
“그래요. 따로 준비하지 말고 인챈트만 좀 더 해서 돌려주라고요.”
아. 그래서 조각이 다섯 개 있는 거였구나. 하나는 다시 돌려주라고.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부담 갖지 말라고 마음 써 주는 게 더 크긴 하겠지만요.”
“그렇게 신경 써 주시는 게 더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다시 받기만 하는 거잖아요.”
…그게 선물의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어떤 마음도 안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이 살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계속 주고받는 거니까요.”
라엔이 나를 스치듯이 바라봤다. 그 말에 대해 더 생각을 더 잇기 전에 민주혁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조각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표면에 눈꽃 모양의 그림이 하나둘 새겨졌다. 꼭 그 안에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 바깥 풍경처럼.
“매년 다른 걸 새기는 거야?”
“어, 맞아.”
“작년에는 뭘 새겼는데?”
“뭐일 것 같아?”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오는 건 대답이었으면 좋겠다. 똑같은 질문이 아니라.
“글쎄. 꽃?”
“박율 형님이 좋아하시긴 하지. 그러니까 그건 마지막이야.”
“…마지막?”
민주혁이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내 뺨을 죽 늘렸다.
“뭘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용사 임기가 끝나는 날 말한 거지.”
아무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 또 방심했다. 다음번에는 상시 긴장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마음에 다짐을 새기며 민주혁에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율이 형은 왜 안 와? 어디 갔는지 알아?”
“지금은 지하실에요.”
대답이 라엔에게서 들려왔다. 라엔이 조각을 손에 꾹 쥐었다가 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내일쯤 나올 거예요. 새해 첫날에는 항상 그랬거든요.”
“왜요?”
라엔이 그건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조각을 쥐여 줬다. 조각이 연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따끈했다.
“따뜻한 것 같아요.”
“맞아요. 방금 내가 마법을 걸어 뒀거든요. 여름에는 시원해질 거예요.”
그러면 여름에는 조각이 푸른색으로 변하는 걸까? 신기했다. 마법으로 이렇게 뭐든 가능한 거라면,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은 인생의 절반쯤을 손해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시스템도 내가 잃어버린 인생의 반절을 채워 주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물론 정작 나에게 도움 되는 건 딱히 없었지만.
“리더 형에게 전해 주는 건 이한이 해 주세요.”
“맞아. 제일 중요한 역할이야, 선이한.”
송하견이 조각을 벨벳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아서 내 손에 들려 줬다. 그러고는 다른 상자 하나를 내 품에 더 안겨 줬다.
“…이건 너 가져.”
상자를 두 개나 들었는데도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송하견이 가만히 바라봤다. 곧 품 안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어느새 상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올라가서 줄게.”
“괜찮아요. 내가 들게요.”
“응. …가자.”
내가 방금 들은 대답은 뭐였지? 분명히 내 말에 긍정하는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여전히 공중에 뜬 채 살짝씩 흔들리는 상자 두 개를 올려다봤다. 어쩔 수 없었다. 저것들은 내가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땅으로 내려앉지 않을 듯했다.
결국 두 손을 텅 비운 채로 계단을 올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송하견은 그제야 상자를 침대 옆의 탁자에 내려놓아 주었다.
“…잘 자.”
“음, 지금 아침인데요.”
“오래 걸었으니까.”
송하견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오래 걸은 것도 아니었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졸리면, 그냥 쉬고.”
송하견이 내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천천히 밀었다. 침대에 풀썩 앉았다.
“…무슨 일 있으면 연구실로 내려와.”
송하견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가라앉은 눈이었다. 송하견이 내게로 허리를 숙였다. 단정한 얼굴이 내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코앞에서 우뚝 멈췄다. 숨소리마저 들릴 거리였다. 송하견이 그 자세 그대로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그리고 느릿한 손길로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려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열은 안 나는데. 아프면 말해.”
“……네.”
멍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송하견이 미끄러지듯이 멀어졌다.
“갈게.”
그렇게 말한 송하견이 훌쩍 방문을 나섰다. 금세 눈앞의 방문이 닫혀 있었다.
송하견이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이는 건 처음 본 것 같았다. 가만히 보면 느린 건지 빠른 건지 모를 사람이었다.
탁자에 놓인 상자를 하나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차락.
커튼을 활짝 열었다. 바깥에 쌓인 눈이 명암도 없이 희었다. 아직 눈송이가 허공에 꽃잎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오늘이 다 가기 전까지는 쭉 이렇게 쏟아질 것이다.
딱딱한 창틀에 몸을 기대서 걸터앉았다. 창 안으로 스며 오는 냉기가 옷 안으로도 서서히 퍼져 나갔다.
달각.
상자를 열고 투명한 조각을 손바닥 위로 올렸다. 안에 담긴 금색 꽃은 조그맣지만 또렷한 색깔이었다.
내년에는 사라질 조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이렇게나 선명한데.
‘어떤 마음이었을까.’
박율은 어떤 마음으로 매년 사라지는 물건을 선물해 온 걸까. 그리고 다들 어떤 마음으로 언젠가 사라질 선물을 받아 온 걸까.
조각이 햇살에 비쳐서 반짝 빛났다. 하늘을 유영하는 눈송이 하나하나에 햇빛이 담겼다. 꼭 빛 가루가 땅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눈이 부셨다. 겨울 햇살이 몸을 데울 정도로 뜨거웠다.
‘내일 박율이 나온다고 했었지.’
빛이 닿지 않는 지하실에서, 어느 때보다 빛나는 아침으로.
오늘의 태양이 떨어지고 내일이 밝아 오는 건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