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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43화 (43/150)

043화.

시간은 이렇게나 빨라서

좁은 공간이었다. 나무 바닥에서는 찬 공기가 올라왔다. 먼지 냄새가 났다.

사선으로 난 천장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위쪽으로 커다란 창이 뚫려 있었다. 집어삼킬 듯이 새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앞으로 아무거나 만지지 않을게요.”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말로요.”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나를 돌려보내 주지는 않았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 당황스러웠다. 그림을 살짝 만진다고 해서 이렇게 처음 보는 곳에 똑 떨어질 줄은 몰랐다.

옆에 둥둥 떠 있는 등불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아까 박율이 띄워 놓은 것이었다. 이것까지 같이 이동해 와서 다행이었다.

끼익.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 걸음을 채 걷지 않았는데 여기를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발견한 것은 구석에서 먼지 쌓이던 주머니 하나였다. 그 안에 새하얀 씨앗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나갈 수 있는 문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갇혔다.’

그걸 깨달은 순간 덜걱 공포가 밀려왔다. 옆에 떠 있는 등불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걸 끌어와서 품에 안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지만 선명하게 밝았다.

숨을 깊게 들이켜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소매로 눈가를 쓸었다. 그래. 들어온 것도 내가 했으니까 나가는 것도 내 몫이었다. 일은 저지른 사람이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할 수가 있지? 떨리는 손을 들어서 천장의 창문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닿는 유리가 차가웠다.

텅 빈 어둠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안고 있는 등불의 빛이 조금 밝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내렸다. 확실히 밝아져 있었다.

화악.

불시에 노란빛이 맑게 뿜어져 나왔다.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눈을 채 뜨지 않았을 때,

똑똑.

위쪽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몸이 흠칫 떨렸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누군가인가? 아니면, 박율인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망설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이 환했다. 바로 앞에 금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나를 향한 연한 녹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박율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한 손을 맞대고 있었다.

호선을 그린 박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기다려.

입 모양을 보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박율이 내 눈앞에서 잠깐 사라졌다. 그리고 곧 내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한 팔로 내 허리를 껴안듯이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몸이 번쩍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박율에게 들린 채 창밖으로 나온 채였다.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율이 형.”

“이한아. 많이 놀랐어?”

박율이 비스듬한 창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림에 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발동된 것 같아.”

박율은 여전히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안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더운 것 같았다. 생각보다 경사면이 가파르지 않아서 이제 놓아도 괜찮은데.

“시전자가 없는데 어떻게 마법이 발동됐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박율의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렸다. 박율은 나를 안고 있는 걸 잊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형. 이제 놓아줘도 돼요.”

“그래?”

박율의 손이 스르르 멀어졌다. 동시에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여기 꽤 높은데.”

높은가? 앞에 보이는 하늘이 온통 새까매서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저 한참 밑으로 칙칙한 색의 조그만 나무들이 빽빽하게 보였다.

잠깐. 조그만 나무?

“아니요, 놓지 마요. 잘못 생각했어요.”

몸을 급하게 틀어서 박율을 마주 봤다. 박율의 옷을 살짝 잡았다. 무서운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높으니까 굳이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을 뿐이었다.

박율의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잡고 있었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손길이 이제야 느껴졌다. 언제 다시 잡고 있었지?

박율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봤다. 박율의 눈이 곱게 휘어 있었다. 내 반응이 그렇게나 즐거웠구나.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요.”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말을 믿는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박율이 내 등허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그러면 형이 찾아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

“형이 너를 안 찾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아니에요. 그냥 내가 혼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눈이 왜 이렇게 부었을까.”

박율이 내 눈가를 한 손으로 살짝 쓸었다. 그러고는 나를 힘주어 안았다.

“이제 내려가자. 다들 슬슬 돌아올 것 같네.”

바람이 살갗을 쓸었다.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제 보니 내가 있었던 곳은 저택의 가장 위층이었다. 어쩐지 아래에서 볼 때 2층까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아 보였다.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

바닥에 발이 닿았다. 박율이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살짝 정리했다.

끼익.

곧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들 돌아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내려왔구나.

“…다녀왔어.”

“전부 확인하고 왔어요. 균열은 모두 닫혀 있었어요.”

“다행이다. 그러면 여기만 잠깐 둘러보고 떠나자.”

“바로 출발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같이 확인할 게 있어서. 일단 들어가자.”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의 방문을 열고 그림 앞에 섰다. 민주혁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 주인이 직접 그린 그림인 것 같습니다.”

그림이 취미라더니 그런 것도 아는 걸까?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그림을 바라보는 민주혁에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알아?”

“글쎄? 그냥 분위기가.”

그렇구나.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충분한 이유가 됐다. 직감이 정답일 때가 생각보다 많으니까.

민주혁이 그림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누가 그렸는지 서명이 없네.”

“주혁아. 그 그림에 걸려 있는 마법도 확인해 봤어?”

“이동 마법 말입니까? 시전자의 마나에만 반응하는 거라서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 마법이 발동됐어. 한 번뿐이긴 하지만.”

“…어떻게?”

송하견이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라엔이 손을 까딱였다. 그림 위로 옅은 빛이 반짝 빛났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아요. 주혁이 말한 것처럼 시전자의 마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껍데기뿐인 마법이에요.”

“그렇지? 그러면 지금으로선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네.”

박율이 손으로 그림을 덧그리듯 살짝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몸을 이쪽으로 빙글 돌렸다.

“알아볼 게 있으면 나중에 다시 오는 걸로 하자.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계단을 내려갔다. 고요한 건물 안에 계단을 짚는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누군가 매일 바쁘게 오르내렸을 계단에서 한참은 밟지 않은 듯한 낡은 삐걱거림이 들렸다.

앞서 나간 모두를 따라서 문밖으로 발걸음을 떼려다가 뒤를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홀이 보였다. 천장 높은 곳에 투명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가면 이곳은 완전히 어둠에 잠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쪽 귀에 폭신한 솜털 같은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렸다. 송하견이었다. 귀로 손을 가져다 댔더니 복슬복슬하고 동글한 감촉이 느껴졌다. 귀마개를 씌워 준 듯했다. 마법을 걸어 둔 건지 소리가 하나도 막히지 않고 잘 들렸다.

“고마워요, 하견 형.”

“…응. 가자.”

송하견이 내 손목을 잡고 훌쩍 끌어당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빼곡했던 나무가 점차 듬성듬성 보였다. 숲의 초입부에 거의 다다른 듯했다.

옆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눈이 오겠네요.”

“벌써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한 해가 끝나고 다음 해의 첫 번째 태양이 떠오를 때면 늘 새하얀 눈이 내렸다. 지난 일은 다 덮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듯이.

‘신전에 있을 때도 해의 첫날에 늘 눈을 맞았지.’

내가 지냈던 별관 앞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길이었다. 그 건물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소복이 쌓이는 눈을 바라봤다. 가끔 그 위에 손자국을 찍기도 했다.

내가 남긴 선명한 자국 위에 또 눈이 쌓였다. 그러면 그 위로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때까지 차가운 눈이 손바닥 아래서 찬찬히 녹아내렸다.

손이 빨갛게 물들 때쯤이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추운 겨울이었다. 한 해의 시작은 늘 사무치도록 추웠다.

“시간이 빠르네요, 라엔 형.”

또 이렇게 일 년이 지나가는구나.

눈이 내리고 해가 바뀌면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봄이 올 테니까, 이 겨울이 끝나고 날이 풀리는 것도 머지않았다. 라엔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같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이한. 소중한 시간은 빨리 항상 지나가 버리니까요.”

라엔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살포시 감쌌다.

“그래도 다행이죠. 아직 함께할 날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라엔이 나를 바라보며 맑게 웃었다. 라엔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퐁.

언젠가 들었던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얇은 장막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찬 바람이 훅 불어왔다.

눈을 떴다. 주위가 밝았다. 저 멀리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별이 촘촘하게 박힌 푸른 새벽을 붉은 태양이 밀어 내고 있었다.

늘 새까만 하늘만 보다가 마주한 말간 하늘이 낯설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뗐다. 어느새 조금 쌓인 눈이 발아래로 사박거리며 밟혔다. 코끝에 작은 눈송이가 슬쩍 내려앉아서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벌써 이렇게….”

시간은 정말 이렇게나 빨랐다. 어느새 한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앞에서 걷던 민주혁이 내게로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뜨겁고 단단한 손으로 내 양 뺨을 살짝 감쌌다가 놓았다. 볼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듯 데워졌다.

민주혁의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옅게 휘날렸다. 태양 빛이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꼭 그 모습처럼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이한, 이거 봐.”

민주혁이 품에서 투명한 조각을 하나 꺼냈다. 육각기둥 모양의 조각 안에는 조그만 금색 꽃이 담겨 있었다. 민주혁의 손 위에 놓인 조각이 서서히 작은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주변이 반짝이며 빛났다. 내리는 눈송이도, 흩날리는 금색 가루도 모두 빛났다. 모든 것들이 이렇게나 선명했다. 너무 생경한 순간이었다.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 누군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몸을 흠칫 떨었다.

“하견 형?”

송하견이 내 손목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꾹 쥔 내 손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느릿하고 차분한 손길에 힘이 저절로 풀렸다.

떠오르는 태양에 주변이 밝았음에도 송하견의 눈동자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것처럼 가라앉아 보였다. 송하견이 나를 가만히 그 눈 안에 담았다.

“…자.”

송하견이 내 손 위에 조각을 올려놓았다. 민주혁이 꺼낸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빛이 서서히 흩어져서 사라졌다.

“이게 뭐예요?”

그렇게 말했을 때 어깨 위로 묵직한 것이 덮이는 느낌이 났다. 달콤한 향기가 주변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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