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기억하지 못해도
민주혁의 시선을 따라 다시 저택을 올려다봤다.
“그렇네. 조용하다.”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주혁의 말이 맞았다.
세월의 흔적은 묻은 듯 보였지만, 세월의 풍파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택은 웅장한 분위기를 간직한 채 어둠 속에서도 제 존재를 묵직하게 드러내었다.
끼익.
박율이 대문을 밀어 냈다. 낡고 녹슨 듯한 소리가 나며 대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박율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다녀올게.”
뒤에서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나?
“리더 형하고 있어요, 이한. 우리는 균열이 전부 닫혀 있는지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올게요. 다녀올게요, 리더 형.”
“선이한. 길 잃어버리지 말고 형님 옆에 잘 있어. 박율 형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다들 한순간에 훅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저택 안에서 길을 잃어버릴 리가 있을까? 민주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한아. 그러면 들어갈까.”
박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박율이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네, 율이 형.”
무성히 자라난 풀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건물에는 커다란 문이 나 있었다. 고풍스러운 무늬가 양옆으로 대칭되게 새겨져 있었다.
덜컹.
문은 정말로 굳게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박율이 내 옆에서 허공에 휙, 하고 뭔가를 만들어 냈다. 조그만 등불이었다. 검은색의 틀에 손잡이까지 제대로 달려 있었다.
공중에 둥둥 떠서 노란 불빛을 흘리는 등불의 손잡이를 박율이 가볍게 잡았다. 그러고는 그걸 문 쪽으로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여기 있네.”
등불이 밝힌 곳에 열쇠 구멍이 하나 선명하게 뚫려 있었다.
열쇠를 손에 쥐었다. 어쩐지 긴장됐다. 혹시 맞지 않는 열쇠면 어떡하지? 흔들리는 눈으로 박율을 올려다보았다.
“율이 형. 이거…. 안 들어가면 어떡해요?”
내 목소리를 들은 박율이 몸을 덜컥 굳히더니 나를 바라봤다. 등불의 빛이 어른거리는 연녹색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어쩌면 박율도 나와 같은 걸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쇠가 안 들어간다면 결국 모두가 돌아왔을 때 바깥에서 맞이하게 될 테니까.
아무래도 그러면 조금 민망하겠지. 차라리 다 같이 있을 때 확인할 걸 그랬나.
“…이한아.”
박율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박율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갛게 웃었다.
박율이 열쇠를 든 내 손목을 찬찬히 감싸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얼핏 비쳤다. 닿아 오는 손길에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가 있는 듯했다. 내 손목이 꾹 눌렸다.
박율이 말을 고르는 것처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맞는 열쇠일 거야.”
그러고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천천히 열쇠 구멍으로 가져다 댔다.
달칵, 하고 열쇠가 알맞게 들어갔다. 열쇠를 부드럽게 돌리자 잠금이 풀리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봐. 열렸지?”
박율이 손을 순식간에 떼어 내고는 문을 밀어 냈다.
끼이익.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홀이 안쪽으로 보였다. 바닥에 와인색의 도톰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여기, 레데오하고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똑같이 넓으니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박율이 건물 안으로 성큼 들어가서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는 순간,
[고마워.]
짧은 목소리가 반짝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처음부터 이걸 바랐던 거였구나.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으로 박율이 등불 하나를 더 띄워 줬다. 그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자 박율이 말을 이었다.
“손으로 들지 않아도 괜찮아. 계속 떠 있을 거거든.”
“율이 형은 왜 들고 있어요?”
“가끔은 직접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생각해 보면 박율은 요리를 할 때도 늘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그것도 다 마법으로 하는 게 아니었나?
“그러면 지금까지 요리 같은 것도 형이 직접 하는 거였어요? 마법이 아니고요?”
“웬만한 건 그랬지.”
“왜요? 마법을 쓰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맞아. 편하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겠지.”
박율이 걸음을 옮기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느리게 흘러가는 과정이 더 의미 있을 때도 있더라. 나중에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것들일 테니까.”
넓은 건물 안에 박율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튕기듯 퍼졌다.
문득 정원에서 매일같이 꽃잎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던 것이 떠올랐다. 물뿌리개에서 천천히 쏟아지는 물방울을 보면서 박율은 늘 이런 생각을 해 왔던 걸까.
박율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이한이도 나중에 형이랑 요리해 볼래?”
“어…. 네?”
갑자기? 내가 처음에 요리 얘기를 꺼내서 그런가 보다. 이런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요리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신전에서 있을 때는 늘 비슷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박율이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앞으로도 형이 해 줄게. 이한이는 잘 먹기만 하자.”
앞으로도…. 그 말은 언제까지를 의미하는 걸까. 용사 임기가 끝나고 헤어지기 전까지? 아니면, 그 이후로도?
궁금했지만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벌써 끝을 물어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결국 차올랐던 질문은 걷어 내고 두 번째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항상 맛있었어요.”
“그래. 맛있었다니까 좋네.”
“나중에 알려 주세요.”
“그러면 더 좋고.”
건물 안에 주욱 나 있는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손으로 훑었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손을 스쳤다. 그 아래 보이지 않았던 빼곡한 나뭇결이 그제야 드러났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방문이 네 개 보였다. 계단은 위로 더 이어져 있지 않았다. 밖에서 봤을 때는 이것보다 높아 보였는데.
달칵.
첫 번째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방이었다. 침대와 책장처럼 흔히 쓸 만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 옅은 먼지 냄새가 났다.
박율이 책상에 걸터앉듯이 기대서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랍 안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율이 입을 열었다.
“궁금했거든. 오랫동안 발길이 닿지 않은 저택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박율이 서랍 안에서 작은 노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갈색 가죽으로 싸인 겉면이 자글자글하게 갈라진 채 낡아 보였다. 종이를 사락사락 넘기는 소리 위로 박율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다른 것들은 다 그대로 있구나.”
박율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것들이 먼지만 털어 내면 당장이라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멀쩡히 자리에 있었다.
“정말요. 누가 여기에 살았던 흔적이 아직도 선명한 것 같아요.”
노트를 넘기던 박율의 손이 멈췄다. 곧은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한아. 너는 네가 떠난 자리에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어?”
이번 질문도 갑작스러웠다. 전부터 종종 짐작했지만, 박율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물어보는 편인 듯했다.
내가 떠난 자리라고 하면 신전을 말하는 건가? 한동안 잊고 있던 휑한 방이 떠올랐다.
지금 그 방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떠나자마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말끔히 정리했을까? 아니면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아서 아직 그대로 먼지만 쌓이고 있을까?
뭐든 조금 씁쓸한 것 같았다.
다른 신관님들께는 바라지도 않았다. 스승님은, 한 번쯤은 내가 없는 그 방에서 나를 떠올리셨을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기억하실까?
잘 모르겠다. 나에게는 스승님뿐이었지만 스승님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이유가 뭐야?”
“나를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나으니까요.”
“기억에 남아야만 의미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
“네.”
박율이 노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먼지가 살짝 일었다.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얼굴에 꼭 씁쓰름한 차를 마신 것처럼 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형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박율이 무릎을 굽혀서 나와 눈을 맞췄다. 연한 녹색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들어찼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거면 의미가 있는 걸까? 말의 의미가 이해될 듯 말 듯했다. 박율의 목소리가 달래는 것처럼 천천히 이어졌다.
“그리고 이한이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라엔도, 하견이도, 주혁이도, 다들.”
“율이 형은요?”
“당연히 형도 그렇고.”
박율이 내 머리칼을 살짝 쓸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 아래로 박율의 목소리가 스치듯이 깔렸다.
“그런데 이한이는 형을 기억해 줄까 모르겠네.”
“기억할 거예요.”
박율이 문가에 잠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내게로 등을 휙 돌렸다. 박율이 손에 쥔 등불에서 노란빛이 퍼져 나왔다. 환하게 웃는 박율의 얼굴 위로 그 빛이 말갛게 비쳤다.
“이제 나가자.”
그렇게 말한 박율이 방문 밖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도 따라서 나가려다가 방금까지 박율이 보고 있던 노트 생각이 났다.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노트를 펼쳤다. 누렇게 바랜 종이가 손끝에 거칠하게 닿아 왔다.
그 안에는 텅 빈 줄만 빼곡하게 그어져 있었다. 무엇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이한아, 여기 좀 와 봐.”
복도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칵, 방문을 닫고 나왔다.
박율이 나를 부른 곳은 바로 옆방이었다.
“와…. 이런 그림은 처음 봐요.”
방 벽면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새까만 밤에 잠긴 널찍한 캔버스 위에 붉은 태양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지? 주혁이가 보면 좋아하겠다.”
“민주혁이 왜요?”
“주혁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거든. 다음에 한번 보여 달라고 해 봐.”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말이나 꺼내 봐야겠다 싶었다.
캔버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물감이 한 붓 한 붓 정갈하게 그어져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그림이었나 봐요.”
“그랬을 것 같네. 이렇게 벽을 다 메울 정도로 커다란 그림을 방 안에 걸어 놓았을 정도니까.”
“그런데 왜 여기서 살았던 걸까요. 해가 들지 않는 곳인데도요.”
“여기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을 수도 있지.”
그렇다면 장소가 뒤틀린 이후로 여길 떠난 걸까? 더 이상 해가 뜨지 않으니까?
“그러면 이 저택이 생각보다 오래됐을 수도 있겠네요.”
장소가 뒤틀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고 했으니까 그럴 가능성이 컸다.
빨갛게 타오르는 동그란 해가 꼭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생생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딱딱하게 굳은 물감이 손끝에 닿았다.
“어, 잠깐만. 그게 왜…”
박율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동시에,
후욱.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떴다.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뭐? 아니, 여기가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