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그 자리가 쓸쓸해 보여서
지직거리던 상태 창은 한순간에 눈앞에서 저절로 사라졌다. 암흑이었다.
동시에 조금 떨어진 왼편의 허공에서 푸른빛이 동그랗게 반짝였다. 부풀어 오르며 빵빵해지던 빛은 곧이어 펑 터지듯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래. 저게 힌트란 말이지.’
열 몇 걸음을 크게 걸어서 다다른 곳은 풀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는 풀숲이었다. 마른 풀을 헤쳤다. 눈앞에 보인 것은, 볼록하고 주먹 두 개 정도 크기만 한….
“무덤?”
아니,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크기도 자그마하니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처음 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에 얇은 나뭇가지가 십자가 모양으로 헐겁게 묶인 채 꽂혀 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옆에는 조그마한 나무 함이 놓여 있었다. 바랜 듯 보이는 표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손으로 겉면을 쓸어 냈다. 수분이 다 마른 흙이 바스러지며 툭툭 흩어졌다.
달칵.
그 안에는 납작한 금색 열쇠가 있었다.
열쇠는 녹슬지도 않은 채 반질반질했다. 잡는 부분의 중앙에는 하얀색의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푸른빛이 열쇠를 감싸고 있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하긴 했지만.
‘…이것도 힌트구나.’
확실히 평범한 열쇠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 그 목소리는 이걸 어디에 써야 하는지는 더 정보를 주지 않았다. 질문만 던지고 답은 주지 않는다니. 삶은 이렇게나 의문투성이다.
생각을 끊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더 지체하면 박율과 라엔이 눈치챌지도 몰랐다. 걸음을 한 발짝 옮기다가 멈칫했다.
‘아무도 보지 못할 자리.’
봉긋한 흙더미가 어쩐지 눈에 밟혔다.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자리가 왠지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았다.
낮게 자란 작은 꽃 한 송이를 꺾어서 그 앞에 놓았다. 나름 멀쩡한 축에 속하는 꽃이었음에도 이곳의 모든 식물이 그렇듯 약간은 시들어 있었다.
밤공기가 찼다. 여기는 항상 밤일 테니까 평생을 쌀쌀한 날씨인 걸까. 사무치듯 차가운 장소였다. 어쩌면 그래서 별것 아닌 것조차 쓸쓸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밟히는 자그만 풀들이 살얼음처럼 바스러졌다.
◇
다시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어른거리는 모닥불의 불빛이 멀리서 보였다.
박율과 라엔이 앉아 있는 곳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움직이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
“어, 이한아.”
…놀라라. 박율이 정확히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연한 녹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났다.
라엔도 내 쪽으로 몸을 틀고는 나를 바라봤다. 라엔의 손에 둥그런 모양의 플라스크가 들려 있었다.
플라스크 안에는 투명한 분홍색의 액체가 회오리치듯 빙빙 돌고 있었다. 언젠가 똑같은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그쪽에 시선을 두고 있자 라엔이 플라스크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이한? 언제 일어났어요?”
걸음을 옮겨서 나도 그 옆으로 앉았다.
“방금 일어났어요. 형들은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아닌 것 같은데요.”
“어…. 네?”
“이한아.”
박율이 내게로 손을 천천히 뻗어 왔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건지 눈치챈 건가?
“볼이 빨갛게 얼었길래. 많이 추워?”
내 뺨에 박율의 손등이 살짝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긴장한 것이 무색했다. 박율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살갗에 잠깐 닿았던 온도가 새겨지듯 선명하게 남았다.
일단은 열쇠를 모두에게 보여 주고 같이 얘기해 보려던 참이었다. 다들 나보다는 알고 있는 게 많을 테니까, 열쇠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 찾아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수상해 보이겠지.’
우연히 열쇠를 주웠다는 말이 얼마나 어색하게 들릴지 뻔했다.
특히 박율은…. 라엔이 부르는 것처럼 리더니까, 아직 나를 조금은 경계하는 듯 보였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는 특히나 그럴 것이다.
그래도 숨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품에서 나무 함을 꺼내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 걷고 와서 그런가 봐요. 춥지는 않아요.”
“겨울인데 춥지. 가까이 와서 앉아. 그런데 그건 뭐야?”
“…걷다가 주웠어요. 풀숲 구석쯤에서요.”
박율의 손에서 나무 함이 달칵 열렸다.
“열쇠? 하나도 안 낡았네.”
박율이 열쇠를 꺼내서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순간 라엔이 재빠르게 목소리를 냈다.
“리더 형, 방금 봤어요?”
“어? 뭐를?”
“푸른빛…. 잠깐 주위로 반짝였던 것 같은데….”
라엔이 열쇠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그걸 살폈다.
라엔은 마나를 잘 감지하는 편이라더니, 어쩌면 그게 아니라 그냥 감각이 예민한 걸지도 몰랐다. 치료할 때를 제외하고는 시스템의 빛을 아무도 인식할 수 없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라엔이 확신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박율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걷다가 우연히…”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내게로 곧게 향한 박율의 시선이 어쩐지 따갑게 느껴지는 듯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박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을 더 이으려는 순간,
후욱.
바로 옆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송하견과 민주혁이 옆에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거의 정리됐어.”
박율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고생했어.”
이럴 때 재빨리 변명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우연한 발견이었다는 걸 믿어 줄 수는 없는 걸까? 원래 세상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일보다 없는 일이 훨씬 많은 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민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 형님. 그건 뭡니까?”
“주혁. 이거 보여요?”
“열쇠 아닙니까?”
“다른 특별한 건 없어 보이나요?”
“세상에 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여서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린 민주혁을, 라엔이 그와 대조되는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익숙하다는 듯 보였다.
라엔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거 말고요.”
“…? 반짝반짝합니다.”
민주혁의 표정이 아리송해 보였다. 송하견도 마찬가지로 그 빛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라엔이 상황을 설명하니 송하견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
물론 느릿한 말투 때문에 그렇게 신기하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민주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관해 둔 상자는 낡았는데 열쇠는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마법을 걸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 주혁아. 그리고 꽤 정교한 마법 같아. 분석할 수가 없네.”
나를 바라본 민주혁이 대수롭지 않은 걸 물어보는 것처럼 얘기를 꺼냈다.
“야, 선이한. 이거 어디서 찾은 거야?”
“그냥 떨어져 있었어…요.”
박율을 흘끗 보며 망설이듯 말을 마쳤다. 박율이 내 머리를 헝클이며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랬구나. 그것보다, 이 열쇠를 쓸 만한 곳은 거기밖에 없는 것 같아.”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건가? 다행이긴 했지만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까는 분명히 뭔가를 더 물어볼 것 같았는데.
송하견이 공중에 빛으로 된 지도를 띄웠다. 그러고는 한 부분을 짚었다.
“…여기. 동쪽 3구역.”
“음, 나가는 길이니까 걸어서 이동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러면 조금 쉬었다가 출발하자.”
“아, 저는 지금도 괜찮습니다.”
“…나도.”
내게로 시선이 몰렸다. 어, 내 의견도 필요한 거였나?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요.”
“정말요? 더 쉬었다 가도 괜찮아요, 이한. 서두를 필요 없어요.”
“그래, 선이한. 근데 안 추워?”
민주혁이 도톰한 목도리 하나를 공중에 만들어 내서 내 목에 느슨하게 감아 주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민주혁은 나한테 뭘 감아 놓는 걸 좋아하는 듯싶다.
“안 추워. 그래도 고마워.”
민주혁이 씩 웃더니 목도리를 가뿐히 끼워 넣어서 매듭을 지었다. 한쪽만 동그랗게 말린 리본 모양이었다.
이렇게 묶는 건 처음 보는데. 어쩌면 민주혁은 손재주가 좋은 걸지도 몰랐다. 목에 감긴 목도리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 이한아. 어디 보자.”
박율이 내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내 안색을 확인하는 것처럼 찬찬히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심을 담아 박율을 바라봤다. 곧 박율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정리하고 이동하자.”
박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송하견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택으로 가는 거야.”
의외였다. 송하견이 이렇게 먼저 설명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에 그런 것도 있어요?”
“…응.”
그리고 송하견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옆에서 라엔이 말을 이었다.
“다니다가 발견했어요. 오래된 저택인 것 같은데 문은 단단히 잠겨 있더라고요.”
“그러면 이 열쇠로 열릴 수도 있겠네요, 형.”
“맞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정리하고 올게요.”
라엔이 내 머리칼을 살짝 쓸고는 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텐트 앞에 선 박율이 손을 부드럽게 까딱였다. 텐트가 안에서 빨아 들이는 것처럼 쭈글쭈글 구겨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송하견은 끌어왔던 통나무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라엔과 민주혁도 주변에 쳐 놓은 방어 마법을 해제하고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민주혁이 손을 가볍게 딱, 튕겼다.
모닥불이 한순간에 꺼졌다. 나무가 타오르는 타닥타닥 소리가 멈췄다. 끊어질 듯이 가느다란 연기가 새까만 어둠 속으로 점차 사그라들었다.
화악.
그리고 주변이 은은하게 밝아졌다. 송하견이 하얀 상자를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연한 빛이 서서히 번졌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았다.
“이제 가자.”
이곳에 남은 것은 나무가 타올랐던 냄새와 깊은 어둠뿐이었다. 발걸음을 뗐다.
◇
얼마간 걷자, 눈앞에 새까만 창살로 이어진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여기예요. 도착했어요.”
거대한 저택이었다. 벽면을 메운 어두운 색의 벽돌이 군데군데 조그맣게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로 덩굴이 파고들며 기어올라 있었다.
먼지가 쌓인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창문이 보였다. 양쪽 지붕 꼭대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했다. 바로 위에 또렷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내 어깨에 민주혁의 손이 툭 얹어졌다. 민주혁의 시선이 높이 들린 채였다. 민주혁이 저택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꼭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