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가까이에
연한 갈색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침대에 누운 나를 민주혁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야, 민주혁. 잘 잤어?”
민주혁이 잠기운을 몰아내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더니 무릎 위에 덮어 놓은 담요를 보고 입을 열었다.
“선이한. 너, 이거 언제….”
“너는 왜 침대에서 안 자고 거기서 자?”
잠깐 자는 거라도 편하게 자는 게 나을 텐데. 걱정되는 마음에 나름 진지하게 물어봤지만 민주혁은 가벼운 목소리로 슬쩍 넘기듯이 대답했다.
“안 잤는데?”
아주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들었어?”
“…어?”
“그런데 왜, 대답 안 해 줬어…?”
멍하니 말했는데 민주혁이 내 목소리를 듣고 몸을 흠칫 떨었다.
민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주혁의 어깨에서 담요가 스륵 흘러내렸다. 침대에 누운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당황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왜? 뭐라고 했는데?”
민주혁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쪽으로 침대가 푹 꺼졌다. 민주혁이 내 이마에 손을 뻗어서 열을 재듯이 가만히 댔다. 민주혁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못 들었어. 어디 아파? 안 좋은 꿈 꿨어?”
나와 눈을 맞춰 오는 민주혁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냥 조금 놀릴 생각이었을 뿐이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내 이마에 올려진 민주혁의 단단한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민주혁의 몸이 잠깐 굳는 듯했다.
“아니. 사실 별거 아니야. 근데 잠깐만 이리로 와 봐.”
누워 있는 침대에서 한 바퀴 크게 굴러서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민주혁은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안 누울 거야?”
“내가 왜… 누워야 하는데?”
“침대에서 자라고.”
민주혁이 할 말을 잃은 듯 세차게 흔들리는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생각을 읽는 능력 같은 건 없는데?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면 내가 가?”
“어디를 가. 그냥 더 누워 있어, 선이한.”
“나 방금 일어났어.”
“그래. 그러니까 더 쉬어. 아프면 나 깨우고.”
민주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내 머리를 한 번 헝클인 민주혁이 반대편에 있는 침대로 가서 털썩 누웠다. 다리를 반 정도 밖으로 내려서 바닥에 발을 댄 채로 대강 누운 모양새였다.
이따금 나한테 고집 있다고 뭐라 하더니, 이제 보니 정말 고집 있는 사람은 민주혁이었다. 민주혁은 스스로의 행동을 먼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민주혁이 누운 곳으로 다가갔다. 바로 앞에 서니 민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어, 왜?”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늘 장난스러운 표정이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나도 마저 웃어 주며 민주혁을 부드럽게 밀어 한 바퀴 굴렸다.
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민주혁은 내 손길을 따라 몸을 옮겼다.
“야, 민주혁. 잘 자.”
이불을 끌어와서 민주혁의 위로 덮었다. 민주혁은 나를 이불로 동여맸지만 나는 똑같이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내가 봐준 거다.
민주혁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아니, 지금 왜 자기가 봐준다는 듯한 표정이지? 살짝 억울함을 느끼고 있을 때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선이한.”
“뭐가?”
아까 민주혁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민주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냥.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는데?”
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민주혁이 내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지금 자라고 눕혀 준 건데.
아까 상태를 봤을 때 그렇게 잠깐 잤다고 풀릴 피로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민주혁의 고개를 정면으로 부드럽게 돌려 줬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살짝 덮었다.
민주혁이 혼잣말처럼 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누 향기. 클린 마법에 그런 것도 있었나.”
“무슨 클린 마법?”
“아니야. 그래서?”
적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민주혁도 내가 다시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 줬으니, 나도 민주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번에도 내가 봐주기로 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잠도 안 올 테니까. 눈가를 덮었던 손을 떼어 내며 말을 이었다.
“좋은 거 아니냐고 물어봤어.”
“어떤 게?”
사실대로 말하는 건 적어도 지금 할 일은 아니었다. 민주혁은 내가 악몽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으니까.
민주혁을 설득하는 건 나중에 할 일이었다. 지금은 잘 시간이었다. 그러니 뭉뚱그려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냥, 이 모든 게.”
“지금도 좋아?”
민주혁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나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좋아.”
“그래. 나도.”
너는 뭐가 좋은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을 더 열지는 않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민주혁도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민주혁은 그새 다시 잠들어 있었다.
잠든 나를 보는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편안해 보이는 민주혁의 얼굴을 보니 나도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민주혁이 덮고 있는 이불을 쓸었다. 손안에 푹신하고 부드러운 천이 감겨 왔다.
밖은 여전히 고요한 밤일 것이다. 어둡고 쓸쓸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
그러나 이곳은 어둡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같은 밤이지만 이렇게나 달랐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날이 부쩍 추워졌다.
하루하루를 생각해 보면 시간이 참 느린데, 지난 일을 한번에 돌이켜 보면 이렇게 빠를 수가 없는 것 같다. 벌써 올해가 끝나 가고 있었다.
차락.
텐트 입구의 천을 조심스레 열었다. 들키지 않고 나가야 했다.
지난번에 내가 악몽을 꾸고 목에 상처를 낸 이후로 다들 걱정이 과했다. 그래서 같이 있을 때나 내가 잘 때 옆에서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그러면 조금 문제가 있었다.
‘치료하기 게이지.’
다들 잔 상처를 많이 달고 오다 보니 치료하기 게이지가 꽤 차게 됐다. 이걸 소모하려면 피를 뱉어야 했는데 그건 별로 보이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은 작은 것에도 걱정을 그렇게나 하는데, 피를 뱉는 모습을 보이는 건 상상만으로도 큰일일 듯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잘 때는 혼자 있겠다고 단단히 말해 뒀다. 몰래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공기 정화 마법 같은 건 없나.’
그게 있으면 텐트 안에서 피를 뱉어도 될 텐데. 그렇지만 라엔에게 그 마법에 관해 물어보거나 종이에 담아 달라고 말하면 분명 눈치챌 것이 틀림없었다. 라엔은 감이 좋은 편이니까.
텐트 밖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찬 공기가 몸을 스쳤다.
저 멀리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모닥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도. 로브를 걸친 옆모습과 그 대각선에 앉은 밝은 금발의 뒷모습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은 웬일인지 라엔과 박율이 둘 다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둘이 뭔가 대화라도 나누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텐트 뒤편으로 빙 돌아서 조금 떨어진 구석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 진행 중!」
허공에 파란 상태 창이 생겼다. 이와 대비되는 붉은 피가 발치로 뚝뚝 원을 그렸다.
허리를 숙였다. 콜록, 하고 침착하게 피를 뱉어 냈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어렵지 않았다. 치료하기 게이지의 붉은 부분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몇 분이면 끝날 터였다.
게이지를 비워 내니까 안심이 됐다. 품에서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꺼내고 있을 때, 머릿속에 뭔가가 반짝 스쳐 지나갔다.
[열쇠.]
어? 무슨 열쇠? 내가 생각한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찰나 떠올랐다가 사라진 그것은 글자 같기도 했고 조그만 목소리 같기도 했다.
거의 멎은 피를 소매로 훔치며 자세를 폈다. 곧이어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에.]
쥐어 짜내듯이 힘겨운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시스템인가? 아닌데. 시스템이라고 하기에는 느낌이 달랐다.
저번에 게이지 비워 내기 튜토리얼을 했을 때도 머릿속에 문장이 새겨졌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글자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그것도 미약하고, 사그라들 듯이 조그만 목소리.
갑자기 공기가 확 차가워진 것 같았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암흑이었다.
‘주변에 뭔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눈을 꾹 감고 숨을 들이켰다. 아리듯이 차가운 공기가 몸속으로 화악 들어와서 퍼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면 됐다. 이게 시스템의 목소리든, 아니면 다른 어떤… 무언가의 목소리든. 다를 건 없었다.
고민은 나중에. 우선 움직여야 했다.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진전되는 건 없다. 목소리가 알린 건 열쇠가 가까이에 있다는 거였으니까 그걸 찾으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퀘스트는 뜨지 않았지만 어딘가 간절했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열쇠를 어떻게 찾지?’
가까이라고 하는 건 범위가 너무 넓었다. 주위에 넓게 펼쳐진 풀숲과 키 큰 나무들이 빼곡했다. 힌트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품속을 뒤졌다. 일단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찢어서 흩뿌려진 피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른 마법을 찬찬히 살펴봤다.
기본적인 마법은 여러 종류 있었지만, 열쇠처럼 작은 물건을 찾을 때 적당해 보이는 건 없었다.
‘아, 맞다. 지난번에 받은 보상.’
용사님을 찾아라 퀘스트를 할 때 빛의 길이 라엔에게로 안내를 했었다. 그 퀘스트를 성공하고 받은 보상은 지금 못 쓰는 건가?
생각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 사용하시겠습니까?
1) 용사 민주혁
2) 용사 라엔
3) 용사 송하견
4) 선택받은 용사 박율
음…. 아무래도 용사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보상인 것 같았다. 사용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자 상태 창은 다시 보상 목록 화면을 보여 줬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다른 보상을 죽 훑어보고 있을 때,
지직.
상태 창이 흔들렸다. 군데군데 화면이 깨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깜빡였다. 마치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