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내게 기대 줬으면
아직 잠에서는 완전히 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선이한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크게 방울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아래 보이는 하얀 목에는 벌써 붉은 핏방울이 선명히 맺혀 있었다. 손을 빠르게 떼어 냈는데도 얼마나 세게 긁어내렸는지 살갗이 꽤 깊게 찢어져 있었다.
“선이한. 야, 일어나.”
잡고 있던 가느다란 손목을 놓고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릴 수가 있나?
울어서인지 벌써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조심스레 쓸었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방울이 내 손을 적셔 왔다.
“꿈이야. 이제 괜찮아.”
선이한을 마주 안아서 등을 다독였다. 선이한이 내게로 힘없이 기대 왔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멍해 보였는데 여린 몸에서는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땀이 식어 차가워진 선이한의 옷을 마법으로 데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잠결일 때 물어보는 편이 나았다. 나중에는 분명 말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
“무슨 꿈이었어?”
“…나.”
선이한이 어물거리듯 말을 이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사그라드는 목소리였다. 거기까지 말한 선이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내게 기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닿아 오는 이마가 아까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모르겠어.”
“괜찮아. 울지 마. 너 더 울면 열 오른다, 선이한.”
“……안 울어….”
정신도 못 차렸는데 이렇게 말한다고? 아무래도 무조건 괜찮다는 쪽으로 말하는 건 습관인 게 틀림없었다.
더 질문해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선이한의 등을 두드렸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선이한의 몸이 순간 흠칫 굳었다.
“야, 선이한. 일어났어?”
“…어?”
내게 기댔던 몸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선이한이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 조금은 잠이 덜 깬 듯 보였지만 이전보다는 또렷해진 눈동자였다. 붉은 기가 도는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목, 안 아파?”
그렇게 묻자 선이한이 한 손으로 자기 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맺혀 있던 피가 선이한의 손에 옅게 묻어났다.
선이한이 피로 물든 자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손을 가져다 대려는 선이한의 손목을 재빨리 잡아챘다.
“만지지 말고.”
“안 아파. 근데 왜…?”
나를 향한 눈동자가 당혹스럽다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예 기억을 못 하고 있구나.
선이한에게 상황을 알려 주는 게 나은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까맣게 잊은 거라면 그냥 단순한 꿈이 아닐지도 몰랐다. 잊고 싶어서 깊숙이 묻어 둔 기억이거나….
그렇지만 목에 난 상처를 설명하려면 간략한 상황이라도 말해 줘야 했다.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침착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선이한이 멍하게 입을 열었다.
“…아하.”
아하? 그게 끝이야? 선이한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자리에 천천히 누웠다.
“아니, 선이한. 잠깐 일어나 봐.”
“조금만 더 자고….”
“그래. 얼마 안 걸려. 상처만 치료하고 자.”
놀라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덤덤한 반응은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보면 선이한은 정작 본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꼬박꼬박 치료 마법을 써 줄 정도로 신경 쓰면서도.
선이한을 다시 일으켜 앉히고 치료에 필요한 것들을 소환했다. 공중에 뜬 약병을 선이한이 가만히 올려다봤다.
조금씩 굳어 가는 피를 닦아 내자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위에 약을 조심히 바르고 하얀 붕대를 둘러 감았다. 선이한의 가느다란 목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꽤 따가울 텐데도 선이한은 작은 찡그림조차 없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내내 나를 바라보던 선이한이 반쯤 잠긴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표정이 왜…. 나는 괜찮아. …기억도 안 나.”
기억을 못 하니까 문제였다. 그리고 그걸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과거의 시간은 그저 스치듯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먹구름처럼 묵직하게 머리 위를 떠다니며 그 무게로 사람을 짓누른다. 그 일을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에서 버거운 감정이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다. 아픔이나, 후회나, 그런 것들. 그럴 때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젖어 들며 한참을 무너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침잠하는 시간 속에서 그 이유조차 찾지 못한다면 그건 얼마나 생경한 공포일까. 어쩌면 선이한은 그래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걸까.
착잡함을 안고 선이한을 바라봤다. 선이한이 여전히 내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랐어…?”
“선이한. 너 지금 뭐가 중요한지 모르지.”
내 말을 들은 선이한이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 고민할 일이 아닐 텐데.
선이한이 자기에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건, 은연중에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덮어 둔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이제는 그 기억의 타래에서 시작점조차 찾지 못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 이유도 알 수 없는 뒤섞인 감정에 결국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한참을 열심히 고민하던 선이한이 아리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민주혁. 너도 졸려…?”
“어. 그냥 자라, 자.”
그렇게 오래 생각한 대답이 겨우 이거라면 알 만했다. 자기 걱정을 하는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구나.
선이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서 눌렀다. 선이한이 내 손길을 따라 저항 없이 자리에 풀썩 누웠다. 나를 말갛게 올려다보는 눈은 아직도 눈물이 고인 것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선이한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안 놀랐어?”
“…응.”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선이한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식은땀에 젖었던 머리칼이 어느새 보송해져 있었다.
“그래. 잘 자라, 선이한.”
“…너도.”
선이한의 목에 감긴 붕대가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담담한 얼굴로 혼자서 무너져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에게서 눈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켜켜이 쌓인 지나간 시간을 걷어 낼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내게도 지나간 시간은 너무 무거웠으니까.
한밤중의 악몽도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도 낯설지 않았다. 지금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심지어 그때 내 옆에는 기댈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참을 괴로워했고,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선이한은, 신전에서 손을 뻗을 누군가가 있었을까.
기댈 곳이 하나라도 있다면 괴롭더라도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선이한이 언젠가 흘러넘친 기억을 기어코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내가 선이한의 기댈 곳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전까지 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과거의 시간에 젖어 들어가는 네 옆에서 있을 테니까. 몇 번이고 너를 받쳐 줄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그 시간을 홀로 견뎌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든 선이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어쩐지 마음이 울렁였다. 아직도 손끝에 선명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울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이 잔상을 남긴 것처럼.
◇
“이거 언제 풀어 줄 거야?”
이불에 돌돌 말린 선이한이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이한은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로도 잘 때는 혼자 있겠다고 꿋꿋이 주장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자러 들어갈 때마다 나를 침대에 눕혀서 재우려고 했다. 다른 형님들한테도 이러는지 모르겠다.
선이한의 볼을 살짝 찔렀다. 따끈하고 말랑한 뺨이 폭 들어갔다.
“야, 민주혁.”
이불에 말려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선이한이 나름대로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시도하는 모습은 칭찬할 만했다.
선이한의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이제 곧 잠들 듯싶었다. 그만 놀릴 때가 된 것이다.
하기야 자는 동안 옆에 사람이 있는다는 게 부담될 수도 있었다. 선이한이 싫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중간중간 와서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선이한을 말아 놓았던 이불을 풀어서 단정하게 덮어 줬다. 그러자 잠기운 묻은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있고 싶으면 있어. 사실 별로 상관은 없는데….”
선이한이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뭐가 재미있다고 옆에 있어. 너는 언제 자? …안 피곤해?”
웅얼거리듯이 말을 마친 선이한은 이내 완전히 잠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항상 순식간에 잠드는 걸까.
다시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선이한이 옆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니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잠결이긴 했지만.
“재미로 있는 거 아닌데.”
늦은 대답을 뱉었다. 들어 주는 이 없는 작은 목소리가 선이한의 고른 숨소리와 조용히 섞였다. 선이한의 얇은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기다리는 건 언제나 자신 있었다. 네가 먼저 기대 올 때까지,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
한참이 지나고, 선이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자서 그런지 몸이 개운했다. 내 몸에 돌돌 말려 있었던 이불도 가지런히 덮여 있는 채였다. 민주혁이 결국 풀어 줬구나.
‘잠깐. 민주혁?’
시선을 돌렸다. 민주혁이 침대 바로 옆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였다. 잠깐 잠든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바로 옆에 있었던 거야? 침대가 두 개나 있는데 왜 쓰질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자면 더 피곤할 텐데.’
그래도 깨울 수는 없었다. 많이 피곤해 보였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자게 두는 편이 나았다.
탁자에 놓인 담요를 펼쳐서 민주혁의 어깨와 무릎 위로 하나씩 살짝 덮었다. 평소라면 벌써 잠에서 깨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래도 피로가 많이 쌓인 듯했다.
민주혁이 차분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가 적막 속에 스며들었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서 민주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민주혁은 꿈도 꾸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표정이었다.
‘내가 악몽을 꿨다고 했었지.’
나는 정말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닌가? 악몽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이미 다 잊은 거라면 더 이상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손을 들어 목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그 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아물어 가는 상처의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손끝에 살갗이 쓸리는데도 아픔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도.’
그것도 좋은 거였다. 어떤 상처도 내게 아픔을 줄 수 없다는 거니까. 물론 시스템의 페널티는 제외하고.
“안 그래, 민주혁? 좋은 거잖아.”
속삭이듯 조용히 내뱉었다. 민주혁은 여전히 잠든 채였다.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내 질문이 허공에서 빙 맴돌다 흩어졌다.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도, 느낄 수 없는 고통도. 내게 나쁜 일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건데 너는 왜 그렇게 아픈 듯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스르르 미끄러져서 침대에 풀썩 누웠다. 등 뒤로 닿아 오는 이불이 여전히 푹신했다. 민주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민주혁이 눈을 번쩍 떴다. 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