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잠들고 나면
라엔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더 노력할게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라엔의 어깨에 로브를 둘렀다. 바람에 한 번 펄럭인 로브가 라엔에게로 부드럽게 덮였다. 이제야 좀 마음이 편했다.
라엔은 내가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일 때부터 왠지 조금 굳은 듯 보였다. 숨을 천천히 들이켠 라엔이 텅 빈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더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지금도 충분하니까요.”
라엔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라엔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충분해요.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올려다보는 라엔의 얼굴에 흩어질 것처럼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 안에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어쩌면 라엔은 은연중에 세상을 구하는 걸 욕심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긴 그럴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매번 용사를 선택해 왔다는 건 누구도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는 거니까, 이번 대에서 그걸 해낸다는 게 욕심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건 욕심이 아니야. 이번에는 나도 있고.’
물론 나는 옆에서 돕는 것밖에 못하겠지만, 그래도. 당신들은 나와 달리 직접 나아가는 사람들이니까. 모든 것이 가능성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한계를 그어 둬서는 안 됐다.
“라엔 형. 정말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네, 이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라엔이 입술을 짓씹었다. 눌린 입술에 피가 쏠려서 붉은 기가 비칠 무렵, 라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요?”
나를 바라보는 라엔의 표정이 묘했다. 마치 내가 알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눈빛만은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방금까지 이어졌던 대화라면 그런 의미밖에는 없을 텐데. 망설이며 대답했다.
“세상을 구하는 걸…. 말하는 거 아니었어요?”
라엔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손을 꾹 감싸 쥐었던 라엔의 손에서 고무줄이 끊어지듯 힘이 탁 풀렸다.
“…그렇구나.”
그런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라엔이 고개를 가뿐하게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이제껏 본 라엔의 표정 중에서 가장 맑은 웃음이었다.
“알고 있었네요. 이한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꼭 구해 낼게요.”
내 등 뒤에서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타닥타닥 울렸다. 주위가 더 밝아진 듯했다. 라엔의 머리칼이 타오르듯이 붉게 빛났다. 얼굴도 옅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삐거덕거리는 대화였으나 나도 만족했고 라엔도 만족했으니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모닥불의 열기가 내 등을 서서히 데웠다. 겨울의 더운 밤이 지나고 있었다.
◇
시간이 그럭저럭 흘렀다.
다들 바쁘게 이곳저곳 다녀왔고, 길게는 며칠씩 자리를 비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여기에 꼭 한 명씩은 남았다.
‘나 때문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쓸 리가 없었다. 들어 보니 각자 맡은 포지션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 명이라도 빠지면 전력 손실이 클 것이었다.
그래도 다들 어느 정도의 마법은 쓸 수 있다고 했다. 포지션을 나눈 건 주력해서 쓰는 마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한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는 혼자서 다녀올 때도 많았는걸.
박율이 내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곱게 접어 웃는 연한 녹색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피곤함도 묻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박율이 가장 바쁠 텐데도.
박율은 전방에서의 공격과 전투 후 마물을 완벽히 처리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했다.
라엔은 전 방위로 공격 마법을 넓게 쓰고, 송하견은 주로 마물의 움직임을 분석하여 기록한다고 했다. 틈새를 비집고 가까이 접근하는 마물을 공격하는 역할도 맡는다고 한다.
그리고 민주혁은 방어를 담당한다고 했다. 주위로 방어 마법을 두르는 동시에, 마물을 붙잡아 두는 포획 마법도 쓴다고 했다.
…붙잡아 두는, 포획 마법.
“야, 민주혁.”
바로 옆에 있는 민주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은 나를 이불로 돌돌 말아서 침대에 눕혀 놓은 채, 그 옆의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민주혁에게 말을 이었다.
“이거 언제 풀어 줄 거야?”
민주혁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서 씨익 웃었다.
“너 잠들면.”
가벼운 말투였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날 낌새도 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완전히 장난인 것은 아닌 듯했다.
물론 지금 내가 딱히 불편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포근한 느낌으로 이불에 감싸 놓을 수가 있지? 그래도 계속 이렇게 있기에는 기분이 조금 그랬다.
떨리는 목소리로 민주혁에게 물었다.
“…왜?”
“이유가 뭐일 것 같아?”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나를 다급하게 깨우던 민주혁의 목소리와 내 손목을 잡아 오던 단단한 손길이 아직 생생했다.
“그거 때문이면 나 잠들고 나서도 안 풀어 줄 거잖아.”
“어, 바로 알았네. 며칠만 이렇게 자자, 선이한.”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왜? 혹시 좀 답답해?”
“아니, 그건 아닌데….”
“다행이네. 신경 썼거든.”
대체 뭘 신경 썼다는 걸까. 설마 이것도 포획 마법 비슷한 건가?
아무리 애써도 이불을 풀어낼 수 없는 걸 보니 신빙성은 꽤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까지 썼을 리는 없었다.
“야, 민주혁. 이거 혹시 마법….”
“어? 뭐가?”
평소처럼 가볍게 웃는 민주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마법일 리… 없겠지? 포획 마법에 잡혀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 묘한데.
가끔은 알지 못하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었다.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주제를 바꿔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럴 일 없어, 민주혁.”
“어떻게 확신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니까.”
“너 기억도 못 했잖아, 선이한.”
“그러니까 괜찮은 거 아니야?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민주혁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내 이마를 손끝으로 한 번 콕 찍었다.
“네가 그 말만 안 했어도 걱정의 반은 덜었을 거야.”
내 목 쪽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풀어 줄 테니까 자는 동안 옆에 있어도 돼?”
“너, 처음부터 이게 본론이었지?”
“…많이 컸네, 선이한. 그래서 대답은?”
나와 눈을 맞추고 키득 웃은 민주혁이 다시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목에 붕대 감은 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볼 때마다 표정을 굳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민주혁이 지금 이러는 건, 다 며칠 전의 일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상황인지도 다 알지 못했다. 내가 잠에서 완전히 깨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민주혁은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대략 말해 주는 내용을 들어 보니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뭐, 자다가 가끔 나쁜 꿈도 꾸고 그러는 거지. 어떻게 늘 좋은 꿈만 꿀 수 있을까.
물론 민주혁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은 민주혁이 텐트에 남아 있기로 한 날이었다.
민주혁은 피곤해 보이는 선이한을 침대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모닥불 옆의 통나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민주혁이 기지개를 쭉 켜며 뒤로 미끄러지듯 누웠다. 별도 하나 박히지 않은 밤하늘이 눈에 담겼다.
‘선이한, 항상 금방 지치는 것 같네.’
지금껏 몇 번을 기절하듯 잠들었던 선이한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체력이 안 좋은 건가 싶었는데 가만 보니 몸도 썩 멀쩡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스스로는 절대 인정을 하지 않으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방금도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놀랐었다.
선이한은 자기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를 못했다. 몸 상태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자기가 스치듯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밤에 혼자 있는 게 싫다고 하더니, ‘자는 동안 옆에 있을까?’ 물어보니 거기에도 또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는 상황을 슬쩍 넘기려고까지 했다.
-잠깐, 민주혁. 어딜 가? 너도 자.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선이한이 내 옷깃을 조용히 붙잡았다. 고요한 목소리에는 고집 있는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재빨리 빠져나왔다. 선이한은 저번에도 나를 잠들게 해 놓고 자기는 쏙 빠져나간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지금쯤 잠들었으려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굴에 찬 공기가 스치듯이 닿아 왔다. 잠깐 나른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송하견 형님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선이한이 잘 때 가끔 열이 오른다고. 그래서 송하견 형님이 같은 방을 쓸 때는 새벽에 종종 방에 올라가 봤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텐트에서 혼자 각혈하는 걸 박율 형님이 봤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선이한은 혼자 둘 수가 없었다.
슬슬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로 걸음을 옮겼다.
사락.
텐트 입구의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훈훈한 공기가 순식간에 몸을 데웠다.
선이한은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채로.
“야, 선이한! 일어나 봐.”
재빨리 선이한을 흔들어 깨웠다. 선이한의 가벼운 몸이 내 손길을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잠이 깊이 든 것 같았다.
선이한의 목을 조심히 받치고 일으켜 앉혔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어디 많이 아픈 건가? 이마를 짚어 봤지만 그렇게 뜨거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항상 피곤해하는 건가?
“콜록.”
그때 선이한이 막혔던 숨을 터트리듯이 작게 기침을 뱉었다.
잠에서 깼나 싶었는데 곧 고개가 푹 숙여졌다. 땀에 살짝 젖은 새까만 머리칼이 아래로 흔들렸다.
끊어질 듯한 속삭임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왜요? 왜, 나….”
“선이한, 정신 차려 봐.”
선이한이 손을 천천히 들어서 자기 목 쪽으로 가져다 댔다. 호흡이 점차 울먹이는 것처럼 거칠어졌다. 잠겨 가는 듯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헉, 흐으. …아직, 잠깐만요.”
벅찬 숨을 들이켠 선이한이 순간 목을 쥐어뜯으며 긁어내렸다. 눈 깜짝할 새였다. 꼭 누군가 숨통을 막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해 보였다.
선이한의 손을 잡아채듯 떼어 냈다. 가느다란 손목이 손안에 감겨 왔다. 마음이 철렁했다. 힘없이 떨어져 나온 손끝에 벌써 피가 배어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이한이 고개를 내 쪽으로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멍한 얼굴이었다. 아침을 담은 것처럼 파랗게 빛났던 눈동자가 초점이 맞지 않은 채로 흐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