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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32화 (32/150)

032화.

너의 운명은 어떤 것이기에

선이한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가자.”

선이한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인 것 같았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환했다. 눈이 부셨다.

저절로 감겼던 눈을 금방 다시 뜨자, 아직도 홀로 빛나는 듯한 선이한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선이한은 웃고 있었다. 안심했다는 듯, 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한 웃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어쩐지 선이한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닿지 않을 것처럼. 그럴 리 없는데도.

사락.

선이한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에 감겼다. 새까만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였다. 선이한이 고개를 올려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맑은 눈동자에 거울처럼 담긴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껏 내 표정이 굳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보다 더 진한 웃음을 얼굴에 그려 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한아. 너의 운명은, 어떤 것이기에.’

아직 죽을 수 없다고 말하던 선이한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치기 어린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근거 없는 믿음도 아니었다.

선이한은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듯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지금은 무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아니면 설마,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있어서….

철렁 떨어지는 마음에도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속으로 가만히 말을 삼키는 나를 선이한이 흔들림 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선이한에게 묻고 싶었다. 너도 너의 운명을 보았느냐고.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어?’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내리눌렀다.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선이한이 내게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해 줄 수 없을 것이었다. 물론 선이한이 물어볼 일도 없겠지만.

‘너도 너의 운명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렇게 다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고.

그렇게 한참을 무너져 있다가, 결국에는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어쩌면, 선이한에게서 가끔 느꼈던 기이한 감각은….’

내가 신전에서 용사로 선택받았을 때, 머릿속에 내리꽂히던 신의 목소리는 어딘가 섬뜩하고 오싹했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선이한에게서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그날의 어두운 방 안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서. 내게 덧씌워진 운명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선이한이 운명을 봤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비춰서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나도 그 순간을 선이한에게 투영한 것일 수 있다. 신전에서 지내 온 선이한의 반듯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휩쓸리고, 이따금 드러내는 위태로운 모습에 마음이 잠시 흔들려서.

‘…혹은 누군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길 바라는 것뿐일 수도 있고.’

선이한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때론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여도 애써 티를 안 내는 너라면, 너는 정말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사는 걸 테니까.

그러니 너도 정말로 네 운명을 봤다면,

‘옆에서 지켜볼게, 이한아.’

너의 모든 선택과, 네가 옮기는 모든 걸음을.

처음으로 누군가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그만큼 그 운명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도, 그럼에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용사로 선택받았을 때, 딱 지금 선이한의 나이였지.’

선이한은 그때의 나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일어서는 것도 나아가는 것도 결국 스스로의 몫임을 알지만, 선이한의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아니, 있고 싶었다. 적어도 선이한이 그 시간마저 홀로 감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암흑 속에서도 옆에서 발맞추어 걷는 소리가 들린다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길 테니까.

…내게 허락되는 날까지만이라도.

생각의 굴레가 끊겼다. 다행히 선이한은 내 잠깐의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내 바로 앞에 선이한이 여전히 꼿꼿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기듯이 담았다. 꼭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선이한의 새하얀 옷자락이 옅게 휘날리는 것 같았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을 텐데도.

창 안으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이 선이한을 감싸듯이 비추었다.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아릴 듯이 환했다. 나는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모두와 함께 밤이 내린 숲에 도착한 후였다. 다들 숲을 돌아보러 떠나고 나와 선이한만이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이한아, 졸려?”

내 목소리를 들은 선이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손으로 코코아가 담긴 유리컵을 꼭 쥔 채 꾸벅 졸던 중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선이한의 눈이 거의 잠들 것처럼 풀려 있었다.

질문을 이해하는 듯 한참을 멍하니 있던 선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기운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조금, 졸린 것 같아요.”

이제는 알았다. 선이한의 ‘조금’이라는 말은 ‘꽤 많이 그렇다’는 말로 해석해야 했다. 선이한의 손에서 미끄러질 것처럼 기울어져 있는 유리컵을 부드럽게 빼냈다.

자러 갈 거냐고 물어보자 선이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여기서 재울 뻔했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선이한과 텐트로 걸음을 옮겼다.

“율이 형, 여기 생각보다….”

텐트 안으로 들어온 선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하듯 말했다. 걸어오는 잠깐 사이에 잠이 깬 건지 또렷한 목소리였다.

안아서 데려올 걸 그랬나. 아까는 바로 잠들 것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래도 침대에 누우면 금방 잘 터였다. 잠이 많은 편인 것 같았으니까. 선이한은 언제나 가장 일찍 잠들고 가장 늦게 일어났다.

라엔은 제외였다. 밤에 잠든 시간보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괜찮은 건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너무 쉽게 잠드는 것도 걱정이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에 감싸인 선이한의 여린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 줄지 물어보았으나 선이한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역시 무의식적인 부분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꺼내서 짚어 줄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알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푹 쉬어.”

생각에 빠져서 멍하니 있던 선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바라봤다.

다행이다. 금방 잠들겠네. 작게 웃으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훅 불어왔다. 하늘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 그 아래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흰 연기가 하늘로 구불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작은 불빛이었지만 환했다. 어둡지만, 그렇기에 더 빛나는 겨울이었다.

걸음을 옮겨 단정하게 다듬은 통나무에 걸터앉았다. 바로 앞에서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무가 타는 냄새가 차가운 공기에 은은하게 스며 있었다. 나는 이 냄새가 싫지 않았다.

손을 내저어 마시멜로를 구웠던 막대와 선이한이 마셨던 코코아 잔을 정리했다. 달콤한 향이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커다란 마시멜로를 입 안 가득 넣은 채 화들짝 놀랐던 선이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지.

자고 있을 선이한을 고려해 소리 내지 않고 웃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용사가 되며 첨예해진 본능은 피 냄새가 나는 방향을 좇았다.

‘균열? 아니, 아니다. 이 방향은….’

텐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입구의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 낸 순간,

“이한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공기 중에 비릿한 피 냄새가 연하게 퍼져 있었다. 흰 소매를 붉게 물들인 선이한이 보였다.

선이한의 고개가 살짝 들려 있었다.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멍한 눈빛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선이한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에는 멍한 빛이 사라지고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입가를 막고 있는 선이한의 소매가 시야에 또렷하게 담겼다. 피로 물든 면적이 상당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선이한이 다른 쪽 손을 들어 입가를 한 번 더 감쌌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상황인 양 담담해 보였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이건 내 심장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선이한에게로 다급히 다가갔다. 선이한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율이 형.”

“고개 숙이고 있어.”

피를 토하는데 고개를 들고 있다니. 선이한이 전에도 각혈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건가.’

선이한이 거듭 말했던 것이 있다. 자신은 멀쩡하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였나? 지금 괜찮은 상태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피를 토하는데 몸 상태가 괜찮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선이한의 가느다란 목을 지그시 눌러 고개를 아래로 향하게 했다. 닿아 오는 피부가 차가웠다. 온기 하나 없는 등을 천천히 쓸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냐고 물으니 선이한이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한참의 간격을 두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마주한 얼굴에 그려진 표정이 의연해 보였다.

“나는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계속 같이 있을 거라는 건, 이 순간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조금 더 먼 미래를 말하는 걸까. 그 말의 속뜻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선이한의 목소리가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꼭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이한아, 너는….”

나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차오르는 물음을 삼켰다. 적어도 지금 물어볼 건 아니었다.

자연스레 말을 돌리며 선이한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각혈은 멈췄으나 여전히 안색이 파리했다.

자리에 누운 선이한이 몽롱하게 풀린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고는 곧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적막 속으로 조용하게 울렸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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