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아직 죽을 수 없으니까
박율의 손끝이 스치는 순간 옅은 빛이 반짝 퍼졌다. 피로 끈적했던 입가가 말끔해진 것이 느껴졌다. 박율의 손이 스르르 멀어졌다.
바닥과 소매를 물들였던 피도 사라진 상태였다. 클린 마법을 써 준 듯했다. 어느새 막대 게이지도 다 비워진 채였다.
“이한아. 너는….”
박율은 말을 더 잇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닫았다. 늘 침착하게, 하지만 주저 없이 입을 열고 지시하던 박율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박율이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많이 놀랐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물론 피를 토하는 모습을 박율에게 들켜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봤자 괜히 걱정시키는 일만 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 화제를 넘겨야 했다.
박율이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불을 톡톡 두드렸다. 푹신한 이불이 박율의 손길을 따라 옴폭 파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박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금 잘래?”
피로하긴 했다. 정신적으로. 그래도 졸리지는 않은데. 말없이 박율과 시선을 마주했다. 박율이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살짝 까딱였다.
두툼한 이불이 훅 펼쳐지며 바람이 살랑 불었다. 순간 꽃향기가 스치듯 난 것 같았다.
이렇게 이불까지 펴 주니 눕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 자고 싶었던 건 아니다. 박율이 가기 전까지 그냥 누워 있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더 나았다. 그래야 걱정을 좀 덜 테니까.
꾸물대며 자리에 눕는 내 위로 박율이 이불을 사뿐히 덮었다.
“잘 자, 이한아.”
박율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머리에 닿는 베개가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불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정말 잠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 생각보다 피로가 쌓였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많은 일이 있기는 했으니까.
내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은은한 꽃향기가 주위에 퍼져 있었다. 몽롱한 정신에 박율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기절하듯 잠드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
하얀 얼굴로 가만히 잠든 선이한의 모습을, 박율은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이름을 불러 왔던 선이한의 말간 목소리를 떠올렸다.
-율이 형.
첫 만남이었다. 가을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는 옷자락과 빛나는 듯한 연한 푸른색의 눈동자. 선이한은 차분하고 고요한 물빛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을 담아내었다.
새롭게 합류할 거라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선이한에 대해서 몇날을 고민했다. 신전 측에서 전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짧은 말은 당연하게도 선이한을 바로 선 안에 들여놓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선이한을 마주하니 아직 어리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사실 내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처음부터 선이한이 아니었던 것이다. 열일곱, 세상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할 나이. 선이한은 그저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등 떠밀려 이곳까지 온 것일 테니까.
불현듯 언젠가의 용사 서약이 떠올랐다. 민주혁도, 송하견도, 라엔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용사 서약 같은 건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용사는 한 사람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럼에도 결국에는 이렇게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언제나 모질었고, 그보다 더 가혹한 건,
‘운명이라는 것.’
그래, 운명은 늘 가혹하고 차가웠다.
내가 이번 대의 용사로 선택되어 신전에 불려 갔던 날이었다. 홀로 걸어 들어갔던 새벽의 새까만 방. 그날 신이라는 존재가 보여 준 건 나의, 그리고 세상의 운명이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검붉게 죽은 하늘,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커다랗게 열린 수많은 균열, 그리고 그 아래 홀로 서 있는 내 모습.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맥동하는 심장을 짓이기는 순간, 시시각각 다가오던 멸망의 순간은 그저 한순간 꿈이었다는 것처럼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흩날려 사라진다.
그렇게 유지되어 온, 그리고 유지되어 갈 평화. 가루가 되어 흩어졌던 검은 신전 안으로 흘러 들어가서 새것처럼 생겨나고, 그다음의 고비를 넘기기 위해 검 손잡이를 쥐어야 할 누군가를 다시금 택한다.
그간 신의 존재를 딱히 믿어 왔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정해진 미래.’
잘 짜인 체스 판.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장기말. 그리고 결국에 도달하게 될,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말.
그 모든 것을 세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큰 줄기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게 더 잔인했다. 중간 과정이 어떻든 결말만은 확실히 정해져 있다는 것 같아서.
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래서 마지막에는 결국 어떻게 끝날 것인지. 그런 운명을 알게 된 순간,
‘…왜?’
내가 느낀 건 기이한 허망함이었다. 깊은 절망은 오히려 공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누구한테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따질 존재가 없었다. 이제 막 존재를 알게 된 신에게 닿을 방법은 없고, 그렇다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해 봤자 새까만 공허를 떠안을 사람만 늘어날 뿐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가만히 주저앉았다. 눈을 찡그리듯 감았다. 머릿속에 새겨지듯 떠오르는 것들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일이구나.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비가 온다고 한들 그 비를 멈추게 할 방법은 없다. 아무리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연을 조절할 수는 없다.
운명도 비슷하겠지. 내리는 비를 멈추지 못하는 것에 무력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운명 앞에선 제 자신의 무력함도 모르고 그저 끌려가 버린다는 게 다를 뿐.
그러니까 그렇게 특별할 일도 다를 일도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그어진 길 위를 끌려가듯 걸어가는 존재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몸을 다시 일으키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결 차분해진 마음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누군가 이 운명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게 나인 편이 어쩌면 나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데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선이한은, 어떻게…?’
치료 마법 같은 건 없다는 라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이 다치고 고통받는 것도 모두 그 운명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니까. 운명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선이한은 정말 치료 마법을 썼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분명히 선이한 역시 운명을 걷는 존재가 맞을 터였다. 모두가 그렇듯이.
그럼에도 세상의 규칙을 벗어난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한아.”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선이한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손을 들어 뺨을 천천히 쓸었다. 잠든 채여서 그런지 닿아 오는 말랑한 뺨이 따뜻했다.
선이한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같이 올 생각은 없었는데.’
새까만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지난 일이 다시금 생생하게 그려졌다.
◇
“방해되지 않을게요.”
선이한이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밤이 내린 숲으로 떠나기 전,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했을 때였다. 선이한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선이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던 선이한이 순간 말갛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맺었다.
“다치거나 해도 괜찮으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손끝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선이한의 얼굴에 더욱 환한 웃음이 그려졌다.
“나는 치료 마법을 쓸 수 있잖아요.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더 안전해요.”
단단한 목소리였다. 선이한의 바로 뒤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선이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민주혁에게 닿았다.
“방어 마법이 있다는 건 알아요. 지금까지 잘해 왔다는 것도, 다 알아요.”
그렇게 말한 선이한은 씁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내가 같이 가면 만약의 상황이라도 괜찮으니까.”
선이한에게로 향한 민주혁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이한의 말이 옳았다. 게다가 방어 마법을 쓰는 건 주로 민주혁의 역할이었다. 민주혁도 부담이 클 터였다.
그런데 그 만약의 상황이라는 것에, 선이한 자신의 상황도 포함되어 있는 걸까? 선이한은 자신이 다치거나 상처 입는 경우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선이한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요.”
민주혁이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여전히 선이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민주혁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선이한의 말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릿하게 이어졌다. 선이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송하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선이한이 소매를 조그맣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송하견이 말없이 눈에 담았다.
“여기는 너무 넓고.”
혼자 남겨지는 밤은 싫으니까, 하고 이어지는 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들렸다. 선이한의 눈동자가 멍하니 흐려져 있었다. 말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순간 몸을 흠칫 떤 선이한의 눈에 다시 초점이 맞았다. 순식간에 침착해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온 선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선이한의 곧은 시선이 라엔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맞았다.
“지난번에 내 상처도 금방 아물었잖아요.”
라엔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환했음에도 라엔의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선이한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 마법은 나한테 못 쓰지만, 큰 상처는 저절로 치료되나 봐요.”
다행이죠, 하고 말을 잇는 선이한의 얼굴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정말로 다행이라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나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저절로 치료되는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이번만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다음번에는 다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후유증 없이 완벽히 치료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이한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할 수 있지?
어지러운 생각 속으로 선이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율이 형.”
선이한의 뒤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눈이 부실 듯 밝았다. 선이한은 그보다 더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을 담아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나에게 시선을 맞춰 오는 선이한을 바라봤다. 선이한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어요.”
무슨 말이야? 순간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선이한의 말이 이해되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내 표정을 살핀 선이한이 뭔가 깨달은 것처럼 아, 하고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한참 동안은요. 음, 설명하긴 어려운데….”
잠깐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선이한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괜찮을 거라는 말이에요.”
선이한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듯 평소처럼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요. 그러니까.”
“그래, 이한아.”
선이한의 시선이 내게로 불쑥 향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그러나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내게서 어떤 말을 들을지 짐작하고 있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