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계속 함께
박율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맑게 웃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잖아, 이한아. 바꿀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게 나으니까.”
그건 맞았다. 지나간 일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중요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닿아 오는 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은 훈훈했다.
손에 들린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여전히 따뜻했다. 박율이 몇 개 넣어 준 마시멜로가 그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 깊은 달콤함이 느껴졌다.
단 걸 먹어서 그런지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듯했다. 옆에서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졸려?”
별로 졸린 건 아니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맞다. 치료하기 게이지.’
깨어나자마자 미뤄 뒀던 상태 창을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앞으로도 치료하기를 쓸 텐데, 게이지가 다 차기 전에 비워 내는 방법을 미리 알아 둬야 했다.
자러 들어간다고 말하고 혼자 있을 때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공에 떠 있는 글자를 읽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졸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박율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코코아를 부드럽게 가져가며 말했다.
“그럼 자러 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서 박율의 뒤를 따라 걸었다.
모닥불 앞에서 벗어나니 찬 공기가 훅 끼쳐 왔다. 겨울이었다. 한 해의 끝자락이 성큼 다가왔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발아래로 조그맣게 자란 풀이 얼어붙은 듯 사박거리며 밟혔다.
박율을 따라 천을 걷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을 걸어 놓은 건지 공기가 따뜻했다.
안쪽은 생각보다 아주 넓었다. 입구 바로 옆에 놓인 스탠드가 커다란 공간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텐트의 양쪽 끝에는 침대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충분히 잘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그 위에는 푹신해 보이는 하얀 이불이 말려 있었다. 거의 방 하나를 통째로 옮겨 놓은 수준이었다.
“율이 형, 여기 생각보다….”
“그래, 이한아. 넓지?”
박율이 멈춰선 나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힘 좀 써 봤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였다. 박율이 나를 그대로 침대에 앉혔다.
“편하게 자.”
그렇게 말한 박율이 허리를 숙여 내게 시선을 맞춰 왔다.
“같이 있어 줄까?”
아니요? 그러면 여기 들어온 이유가 없는데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박율이 잠깐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가서 바로 앞에 있을게.”
“네, 율이 형.”
박율이 내 머리를 스치듯이 쓰다듬고는 걸음을 옮겼다.
“불은 켜 놓을게. 괜찮지?”
입구 옆에서 스탠드를 가리키며 묻는 박율에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작은 스탠드 하나로 이 넓은 공간이 환해진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마법 스탠드인가? 그럴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마법이 아니더라도 원래 빛은 어둠을 덮으니까. 설령 그 어둠이 아무리 커다랗고 깊을지라도.
“그래. 푹 쉬어.”
박율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갑자기 낯선 장소에 와서 피곤했겠다, 그렇게 말을 이으며 박율이 손을 가볍게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사락, 하고 입구의 천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율의 말처럼 처음 와 보는 생경한 장소였다. 그럼에도 딱히 힘들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다들 이렇게나 생각해 주니까.’
텐트 안에 있는 침대도, 이불도. 모두 방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바닥 구석에는 보랏빛 풀꽃이 몇 송이 놓여 있었다. 송하견의 방에 옅게 배어 있던 것과 비슷한 향이 퍼져 있었다.
이 숲에 도착한 이후로 다들 내 상태를 살피는 시선을 보내왔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괜찮다는 말을 직접 전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괜찮다는 말을 직접 했는데도 그게 전해지지 않았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해 봤자 다들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그냥 행동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지금은 저렇게 신경을 쓰겠지만 내가 정말 괜찮아 보이면 머지않아 관심을 돌릴 터였다. 앞으로 내가 멀쩡한 모습만 잘 보여 주면 됐다.
그래도 이 잠깐의 친절이 싫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익숙한 공간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좀 편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슬슬 상태 창을 확인해 볼까.’
마음도 차분해졌고 박율이 나간 후 시간도 꽤 흘렀으니 이제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튜토리얼!>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
막대 게이지를 터치하세요!」
이 외에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바로 옆쪽으로 막대 게이지가 떠올라 있었다. 검붉은 색이 조금 차 있었다.
손을 뻗어 막대 게이지가 있는 곳에 가져다 댔다.
퐁, 하는 맑은 소리가 귓가에 얼핏 울린 것도 같았다. 물로 된 얇은 장막을 통과하는 듯한 묘한 느낌이 나며 손가락이 막대 게이지를 통과했다. 동시에,
“욱.”
속에서부터 피가 울컥 차올랐다. 급하게 입을 막았다. 쏟아지는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잠깐만.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한 게 몇 분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시스템은 내가 바라는 걸 어떻게든 방해하려는 것 같았다.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위쪽에서 띠링,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올렸다. 상태 창 위에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튜토리얼!> 완료!」
발랄해 보이는 느낌표가 갑자기 거슬려 보였다. 피만 뱉게 해 놓고 무슨 튜토리얼 완료야? 따지듯이 생각한 순간 머리가 지끈 울렸다.
언젠가 겪었던 적 있는 두통이었다. 처음 상태 창을 본 날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두통이 찰나의 순간 스치듯 사그라들었다.
고통이 가신 자리에 낯선 정보가 차올랐다. 꼭 남이 내 머릿속을 멋대로 헤집어서 넣어 놓은 것처럼 불쾌한 감각이었다.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정보의 파편 속에서 간신히 한 문장을 건져 내었다.
「치료하기 게이지를 터치하면 비워 낼 수 있다.」
그리고 소모하는 만큼 각혈하게 되는 거겠지. 내가 피를 토하는 만큼 치료하기 게이지의 붉은 색이 줄어들고 있었다.
대가 없이 게이지를 비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각혈하게 된다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이라는 쿨타임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아직 울컥 차오르는 피를 익숙하게 받아 내며 침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이불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경험이 있어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역시 모든 경험과 배움은 의미가 있는 것이 맞다. 어떤 방식으로든.
아래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가 아직 남아 있었나 생각하고 있을 때, 다음 문장이 머릿속에 입력되듯 떠올랐다.
「원한다면 중간에 멈출 수 있다.」
어, 그럼 일단 멈춘 다음에 생각할까? 뭐든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됐다.
일단 피를 토하는 건 멈춰 놓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한 다음에 계속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눈앞에 새로운 상태 창이 생겼다.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
중단하기 / 계속하기」
속으로 대답하려는 순간, 반짝 지나가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는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다.」
이게 핵심 정보 아니야? 하마터면 오늘의 기회를 날릴 뻔했다. 그럼 그렇지.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 같은 게 내게 주어질 리가 없었다.
라엔의 의심 퀘스트 때도 그랬다.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떠올려 보면 아직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어쩐지 시스템이 나를 몰아붙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의도가 어쨌든 내 고난을 바라는 거라면 성공이었다.
“콜록.”
입가의 피를 소매로 가볍게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 막대 게이지가 걸렸다. 붉은색이 절반쯤 닳아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멈추겠네. 피 냄새는 어떻게 뺄지 고민하는 순간, 텐트 입구의 천이 사락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시선을 옮겼다. 굳은 듯이 서 있는 박율이 보였다.
손을 조용히 들어 입가를 한 번 더 감쌌다. 이렇게 하면 소매에 묻은 피가 좀 덜 보이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박율이 이쪽으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박율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개 숙이고 있어.”
박율이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감쌌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닿아 오는 손이 왠지 뜨겁게 느껴졌다.
“삼키지 말고 뱉자.”
그렇게 말한 박율이 입가를 막고 있던 내 손을 잡아서 아래로 내렸다. 붉게 물든 소매에 박율의 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손길에 몸에 온기가 퍼졌다.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서서히 적시고 있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아니었다. 그렇지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박율은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당장이라도 나를 다시 용사들의 숙소에 데려다 놓을 기세였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예상에 없었다. 박율이 갑자기 들어올 줄 알았으면 아까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내는 걸 그만뒀을 것이다.
지금은 그만둬 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박율이 다 봤으니까. 그리고 피를 토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율이 형.”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박율을 마주 보았다. 흔들림 없는 연녹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나는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한순간 박율의 눈이 크게 뜨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를 데려다 놓으려고 말을 꺼낸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당신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신들을 도와야만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과 나를 옥죄는 퀘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세상을 구할 능력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세상을 구하고 있는 당신들을 치료할 능력은 있었다.
‘그리고 정말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박율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가 됐다. 아프다면 쉬는 것이 당연했다. 박율도 알고, 나 역시도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율은 내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러니 박율에게는 억지처럼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돌아갈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박율은 어딘가 단호한 구석이 있었으니 여기서는 나도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이한아.”
박율이 여러 감정이 섞인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박율이 한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 바로 아래를 천천히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