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운명처럼
한참을 지나서 송하견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노트에 뭔가를 적으며 주변을 꼼꼼히 돌아보더니 이제야 일이 끝난 듯했다. 송하견이 쓴 모노클에 불길이 비쳐 어른거렸다.
“…이 주변에 위험한 건 없어.”
“고생하셨습니다, 하견 형님!”
“응. 너도.”
민주혁이 벌떡 일어서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한번 돌아보고 와도 될 것 같습니다.”
라엔도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서 다시 앉혔다.
“이한이는 형이랑 여기 있자.”
박율이 내 어깨를 다독였다. 앞에서 송하견이 고개를 휙 돌려 나와 박율을 바라봤다.
“…다녀올게.”
그러고는 라엔이랑 민주혁과 함께 휙 사라졌다.
순식간에 텅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박율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아. 너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박율이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박율은 환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시선을 둔 채였다. 불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한참을 생각하던 박율이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
무엇을?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박율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내게로 시선을 맞춰 왔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박율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앞을 바라봤다. 연녹색 눈동자에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담겼다.
“궁금한 게 많았지.”
지금 말 돌린 건가? …아닌가? 표정이 평소와 같아서 아리송했다.
사실 나를 경계해서 한 질문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었다. 언젠가 생각했듯 박율이 나를 경계하는 건 정당했고, 심지어 그럼에도 박율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이 따뜻했으니까.
이 다정함이 거짓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미 충분했다.
박율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부터 말해 줘야 할까.”
무릎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박율에게 말을 꺼냈다.
“율이 형. 저번에 라엔 형이 말해 준 적이 있어요. 용사가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는다고요.”
“맞아. 라엔이가 잘 얘기해 줬구나.”
“그런데 균열이 왜 생기는 건데요? 그건 알 수 없나요?”
균열이 생기는 원인을 안다면 처음부터 그 원인을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박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그건 아직 연구하는 중이긴 한데, 세상의 균형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균형? 저번에 들었던 법칙과 비슷한 느낌인 걸까? 내 얼굴을 살핀 박율이 살짝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선이 있으면 악도 있으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딘가의 힘이 약해졌거나 혹은 강해져서 그런 것일 가능성도 있어.”
“아…. 그런 거였군요.”
“응. 그러니까 일단은 눈앞의 세상을 구하는 게 먼저야.”
환하게 웃은 박율이 내 손목을 감싸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른 쪽 손으로 내 손바닥을 쓸어 올리듯 쭉 폈다.
“용사는 5년에 한 번씩 선택돼.”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를 배경으로 박율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용사가 주기적으로 선택되는 거였구나. 이건 처음 알았다.
박율은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였다. 박율이 이렇게 잡고 있으니 내 손이 작아 보였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크다고 해서 내가 작은 건 아니니까.
박율이 내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접으며 말했다.
“올해가 다 차면, 형이 이번 대의 용사로 선택된 지 3년이 돼.”
아직 펼쳐져 있는 손가락이 두 개 남아 있었다. 박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2년 남은 거예요?”
박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박율과의 용사 서약을 맺은 것이기에 같은 기간이 남아 있는 거라고 했다.
나무가 타오르는 매캐한 냄새가 주변에 옅게 퍼져 있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저 그런 냄새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저 그런 시간이었다.
그때가 되면 모두와 헤어지게 되겠지? 세상을 구하고 나면 시스템이 준 능력도 사라질 테니까. 같이 지낼 시간이 2년 남았다고 생각하니 그건 조금 아쉽긴 한 것 같았다.
나머지 손가락을 모두 접으며 박율에게 물었다.
“5년이 다 지나면 어떻게 되는데요, 율이 형?”
“다음 대의 용사가 선택되겠지.”
담담하게 말한 박율이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내려 주었다.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었는데.
“형은요? 더 이상 용사가 아닌 건가요?”
“글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중요한 게 아닌데요?”
“별 의미 없을 테니까.”
그런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박율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형이 그 이후로도 용사든 아니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맞지?”
그건 그랬다. 용사든 아니든 박율은 박율이었다.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다음 대의 용사가 선택된다는 건 여전히 세상을 구하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박율이 이번 대의 용사라는 걸 보니 이전에도 선택받은 용사가 여럿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을 다 구하지 못했는데도 5년이 지나면 새로운 용사를 선택하는 이유가 뭘까.
잠깐, 애초에 용사를 선택하는 건 누구지?
“용사는 누가 선택하는 건데요?”
“신전에서.”
숨을 들이켠 박율이 다음 말을 천천히 이었다. 평소와 같이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어쩐지 그 아래로 초연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선택하는 거야, 이한아. 운명처럼.”
박율의 얼굴 앞으로 모닥불의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내게로 고개를 돌린 박율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운명처럼.’
왠지 그 말이 머릿속에 한 번 더 울리는 것 같았다.
◇
하늘이 온통 깜깜해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체감상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다들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은 더 남았다고 했다. 숲이 넓어서 둘러보는 데만 해도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박율은 내게 포근한 담요를 덮어 주고 손에 코코아를 들려 줬다. 불 바로 앞에 있어서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이한아. 아까 주혁이가 낭만이라고 했었지.”
어떻게 들었지? 멀리 있던 것 같았는데.
박율이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그 앞으로 기다란 막대기 여러 개와 잼을 담을 때 쓰는 것처럼 생긴 커다란 유리병이 생겨났다. 유리병 안에는 흰색의 동글동글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동그란 덩어리가 유리병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막대기에 차근차근 꽂혔다. 말랑해 보였다.
“이것도 마음에 들 거야. 주혁이도 정말 좋아했거든.”
웃음기 스민 목소리로 말한 박율이 이건 비밀이라는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막대기를 모닥불 옆에 꽂아 놓은 박율이 잠시 후에 하나를 빼 왔다. 약간 그을린 듯한 흰색 덩어리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그걸 잠깐 식힌 박율이 가장 위쪽에 있는 걸 입에 넣었다. 이제 안 뜨겁다, 그렇게 말하며 막대기 끝으로 하나를 살짝 빼내어 내게 내밀었다.
“마시멜로. 먹어 본 적 있어?”
고개를 저었다. 박율이 내 입 안에 그걸 조심스럽게 넣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순식간에 스르르 녹아내려 온몸에 달콤함이 퍼져 나갔다. 구름을 먹는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것도 있다니.
생경한 놀라움에 굳어 있는데 박율이 내 앞으로 빠르게 손을 받쳐 왔다.
“뜨거워?”
설마 지금 뜨거우면 자기 손에 뱉으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박율의 손을 잡아서 부드럽게 내렸다. 내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한 박율에게 입을 열었다.
“맛있어서요. 그래서 놀랐어요.”
다행이다, 그렇게 대답하며 박율이 맑게 웃었다. 그 웃음도,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따뜻함도. 모두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박율이 하나씩 입에 넣어 주는 마시멜로를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잔잔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는 밤이 내린 숲이야. 해가 뜨지 않아서 계속 이렇게 어두울 거야.”
정말 해가 뜨지 않는 장소라니 신기했다.
박율은 그래서 여기에 가장 먼저 온 거라고 했다. 어둡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균열이 열린 채 오래 방치된다면 가장 위험할 장소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도 균열이 열려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이한이는 한동안 형을 못 볼지도 모르겠네, 하고 가볍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아쉽다는 것처럼 들렸다.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마물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용사뿐이거든.”
박율이 공중에 기다란 검 하나를 소환했다. 언젠가 미래시에서 박율이 이 검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검의 칼날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금색 손잡이의 중앙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붉은 보석 안에 순간 어두운 빛이 어른거린 것 같았다. 아닌가? 다시 확인하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바로 앞의 모닥불 때문에 잘못 본 걸지도 몰랐다.
“이 검으로 찔러야만 마물을 완벽히 처리할 수 있어.”
이어지는 박율의 말에 집중했다. 선택받은 용사만이 쓸 수 있는 검이라고 덧붙이며, 박율이 손을 휘 내저었다. 검이 사라졌다.
“용사로 선택받을 때 받은 검이에요?”
“맞아. 이전 대부터 계속 쓰던 거야.”
그렇구나. 그러면 용사 임기가 끝나는 날에 검도 반납해야 하는 걸까? 좀 이상하지만 그게 전통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이 형. 세상을 위해서 용사들만 싸우는 이유가 이거예요?”
“그렇지. 선택받은 용사만이 마무리를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옆에서 도울 수는 있잖아요. 라엔 형이랑 하견 형이랑 민주혁처럼요.”
“사실, 균열은 거의 외곽 지역에 생기거든. 다행이지?”
“네, 다행이에요. 그런데요?”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어.”
그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박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그러니까…. 오래 방치돼서 마물이 멀리 퍼지지 않는 이상은 보통 안전할 거야.”
“……관계없는 일이니까 관심도 없다는 말이네요.”
“각자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당연하니까. 용사로 선택받은 이후로 형의 눈앞에는 조금 더 커다란 세상이 보이는 것뿐이지. 용사 서약을 맺은 다들 마찬가지고.”
박율은 왜 이렇게까지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스스로 선택해서 용사가 된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형이 용사가 된 건 신이 선택했기 때문이잖아요.”
“맞아.”
“율이 형은 용사로 선택받은 게 억울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