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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7화 (27/150)

027화.

그때 다시 말해 줄게

내 뺨에 닿은 박율의 손이 찼다. 그 위로 내 손을 가져다 댔다. 치료하기를 쓰니 박율의 상처가 아물어 가며 다시 핏방울이 도르르 흘러내렸다.

“방금 일어났어요. 나는 괜찮아요, 율이 형.”

형은 안 괜찮아 보이지만요, 하는 말은 삼켰다. 옆에서 라엔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더 형, 앞으로는 같이 움직이겠다고 했잖아요.”

“그래, 라엔아. 앞으로는 그렇게 하자.”

“…박율 형.”

송하견이 박율을 빤히 바라봤다. 박율이 웃음기 스민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간 걸 알기 전에 금방 돌아오려고 했는데, 걱정했구나.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다녀온 거야.”

“그래도 갈 때 얘기해 주지 그랬어요, 리더 형. 혼자 갔다가 혹시…. 아니, 나라도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라엔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라엔이 다쳤던 날 이후로 단독 행동을 하지 않기로 모두가 약속한 것 같았다. 그리고 라엔은 혼자 움직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깊이 실감한 듯했고.

지난번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살아난 거니까 그럴 만했다. 이제는 혼자 위험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박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형이 잘못 생각했어. 이제는 꼭 그렇게 할게.”

라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박율이 내게로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이한아. 너도 걱정했어?”

여전히 눈을 접어서 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슨 상황인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다쳐서 오는 건….

“걱정돼요.”

걱정은 항상 하고 있었다. 박율도,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매번 험하게 다쳐서 오는데 몸이 남아날까 싶었다.

박율은 내 대답을 듣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순간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고 입을 열었다.

“나도 걱정돼, 이한아.”

박율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봄처럼 연한 녹색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또렷하게 담겼다.

“일어나서 다행이다.”

박율이 금방 표정을 풀었다. 다시 맑은 웃음을 입가에 그린 박율이 내 머리를 헤집었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들, 왜 그렇게까지 내게 신경 쓰는 걸까. 내가 받기에는 너무 지나친 걱정이었다.

물론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걸 모르니까 깨어나지 않는 모습에 놀라기는 했겠지. 그래도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꼭 내가 속이고 있는 것 같잖아.’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건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쉽게 믿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계속 이런 상황일 수밖에 없나? 옅은 죄책감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요, 율이 형.”

이건 진심이었다.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서 최대한 밝게 웃으며 박율을 올려다보았다. 박율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중에,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되면.”

박율이 눈꼬리를 더욱 곱게 접어 웃었다.

“그때 다시 말해 줄게.”

환하게 웃는 표정이 조금 쓰린 듯이 보였다.

하늘이 푸르게 밝아 오고 있었다. 커다란 창 안으로 맑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도 내려오지 않은 민주혁을 보러 방으로 올라갔다. 민주혁은 여전히 내 침대에서 곤히 잠든 채였다.

박율은 민주혁이 깨어 있으면 데려오고, 자고 있으면 좀 더 자게 두라고 했다.

민주혁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인 것 같았는데. 이번에 많이 피곤했나. 늘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표정이 연하게 풀려 있어서 차분해 보였다.

파란 햇살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손끝에 닿는 머리칼이 부드러웠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민주혁.”

동시에 민주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 모습에 흠칫 놀랐다.

민주혁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기운 하나 묻지 않은 또렷한 눈동자가 내게로 곧게 향했다.

“선이한, 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민주혁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려서 내 뺨을 주욱 늘렸다.

아, 진짜. 민주혁이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커다란 손을 재빠르게 떼어 냈다.

민주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야, 선이한. 밥은 먹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혁이 겉옷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 하나를 꺼내더니 포장지를 벗겨 냈다. 그러고는 그걸 내 입에 넣어 줬다. 달콤했다. 이번 건 딸기 맛이었다.

입 안에서 사탕을 달각 굴리다가 민주혁의 앞으로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민주혁이 키득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내게 물었다.

“맛있어?”

“어. 맛있네.”

민주혁이 내 손 위로 사탕을 후두둑 쏟아 냈다. 아니, 대체 저 작은 주머니 안에 사탕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 거야.

이렇게까지 많이 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잘 먹기야 하겠지만.

나머지는 품에 넣고 하나만 꺼내 들었다. 사탕 포장지를 벗겨서 민주혁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민주혁이 당황한 것처럼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 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나를 봐도 소용없었다. 원래 뭔가를 줄 때는 그만큼 돌려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였다.

…잠깐. 지금껏 모두에게서 받은 만큼 돌려주려면,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침을 꼴깍 삼켰다. 재빨리 생각을 털어 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충분한 거 아닐까. 크기보다는 노력이 중요한 거니까.

민주혁은 여전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혹시 사탕 같은 걸 별로 안 좋아하나. 매번 가지고 있기에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안 좋아해? 그러면 괜찮고.”

“아니?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종이 포장지를 다시 감아 놓으려고 하는데 민주혁이 내 손에 들린 사탕을 재빨리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웃더니 순식간에 쏙 빼 갔다.

“…맛있네.”

민주혁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려 가볍게 헝클였다. 기지개를 쭉 켠 민주혁이 입을 열었다.

“내려가자. 형님들은 아래에 있지?”

계단을 내려가니 아직 다들 1층에 있었다. 커다란 지도를 공중에 띄워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앞까지 다가가자, 나와 민주혁을 본 라엔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출발해야 할지도 몰라요.”

어디로요? 갑자기요? 당황을 속으로 삼키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송하견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송하견이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송하견에게 자세한 설명까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음. 그래, 고개라도 끄덕여 준 게 어딜까 싶었다.

나와 민주혁의 앞으로 박율이 나뭇가지 하나를 소환했다. 군데군데 타고 남은 재처럼 회색빛으로 물든 부분이 있었다.

“주혁아, 봐.”

박율이 그걸 툭 건드렸다.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회색 가루가 되어 녹아내렸다.

흩어지는 가루가 창 안으로 환하게 내려앉은 햇살에 반짝였다. 나뭇가지는 눈을 깜빡인 찰나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옆에서 민주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율 형님. 이건….”

박율이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나뭇가지는 나와 라엔이 갔었던 숲에서 방금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마물이 다른 곳으로 스며들 수 있는 게 확실해졌다고 한다.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 해요.”

라엔의 말에 송하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지도 한구석을 가리켰다.

“…우선은, 여기.”

나무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민주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저도 형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지체된다면 가장 위험할 장소이지 않습니까.”

“그래. 마물이 멀리 퍼질수록 찾기가 곤란하겠지. 해가 뜨지 않아서 항상 어두운 숲이니까.”

“중심부로 텔레포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다니기가 편할 테니까요.”

“그게 좋겠다. 서둘러야겠네. 장소가 꽤 넓으니까.”

“…응. 그리고 박율 형. 도착해서 먼저 돌아보는 건, 우리가….”

내가 채 이해하기도 전에 대화가 빠르게 흘러갔다. 내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에는 뭐든 익숙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한 번 놓친 내용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오가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는 있었다.

궁금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런 질문을 꺼낼 때도 아니었다. 다들 바쁜 상황에서 내 궁금증만 해소할 순 없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나중에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면 천천히 알려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친절한 사람들이니까.

문득, 이런 사람들만 용사가 되는 걸까 궁금해졌다. 다정함을 지닌 사람들. 세상을 위한 대가 없는 희생에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에 뛰어드는 다정함일 테니까.

그런 거라면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시스템이 말했던 것처럼, 그건 정당한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할 것이다. 하고 싶었다.

뭐, 그래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치료하는 것뿐이긴 했다. 이것도 생색낼 만한 건 아니었고. 페널티가 조금 번거로울 뿐이지 힘든 건 아니었으니까.

당찬 포부와 달리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소박하다는 걸 자각하자, 민망함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순간 앞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어…. 왜요?”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다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등 뒤에 있는 커다란 창에서 들어온 햇살이 모두의 얼굴을 말갛게 비췄다.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이한아.”

고개를 끄덕였다. 박율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떠나야 할 것 같아.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돌아오도록 노력할게.”

박율이 망설이듯 다음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 줄래?”

한 번 곱씹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나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왜? 내가 당신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치지 않을 만큼 안전한 장소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혹시 내가 방해돼서?’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나는 마법을 못 쓰니까 전투할 때 나까지 보호하려면 아무래도 성가시긴 하겠지.

그래도 딱히 보호는 필요 없었다. 나는 다치더라도 아프지 않고, 설령 크게 상처를 입더라도 죽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라엔의 부상을 가져오고 나서도 이렇게 멀쩡했다. 아까 봤을 때 살짝 흉이 져 있기는 했는데, 고작 이걸로 끝난다는 거니까 훨씬 좋았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잘 얘기하면 다들 생각을 바꿀 터였다.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방해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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