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이제 안 바빠
조금 진정한 라엔이 방 안에 다시 불을 환하게 밝혔다. 정신이 흐트러져서 마법 사용이 잠깐 불안정했다고 한다. 말을 잇는 라엔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음, 딱히 민망해할 일은 아닌데.
언젠가 민주혁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라엔은 천재라고. 타고난 마나양도 많고 본인도 노력했기에 학년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한다. 아카데미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였다고 한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엔이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훅, 하고 사라졌다. 그러고는 금세 다시 나타났다. 손에 작은 그릇을 든 채였다.
“괜찮으면 조금 먹어요, 이한. 무리하진 말고요.”
내가 깨어났을 때를 위해서 박율이 매일같이 미음을 만들어 뒀다고 했다. 오랜만에 먹는 박율의 요리가 따뜻하고 맛있었다.
라엔은 몇 번이나 내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멀쩡하다고 대답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라엔은 안 졸린가? 민주혁은 치료하자마자 잠들었는데.
“라엔 형. 피곤하지 않아요?”
“이한, 지금 졸려요? 자러 갈래요?”
“……아니요, 나 말고요. 형은 안 피곤한가 해서요.”
“아, 나는 원래 잠이 많이 없어요.”
라엔이 점심 늦게 식당에 내려올 때가 꽤 있었는데. 그건 늦잠을 자서가 아니었나?
뭐, 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지 싶었다. 딱히 더 파고들 만한 일은 아니었다.
“형. 하견 형은 지금 연구실에 있을까요?”
슬슬 송하견과 박율도 치료해 줘야겠다 싶었다. 여기서 연구실이 더 가까우니까 지금은 송하견에게 먼저 가면 될 것 같았다.
연구실 위치는 송하견이 알려 준 적이 있었다. 내가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선이한. 몸이 안 좋으면, 내려와. …언제든.
물론 몸이 안 좋을 일이 딱히 없었기에 가 본 적은 없었다.
“하견은 연구실에 있어요. 거기로 갈 건가요?”
“네. 어딘지 알아요. 혼자 갈게요.”
“음…. 알았어요. 그러면 나는 리더 형에게 말을 전하고 올게요.”
라엔이 바닥에 흐트러진 종이를 마법으로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복도가 깜깜했다.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라엔은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추어 왔다.
아니, 잠깐만.
“라엔 형, 다녀온다면서요.”
“…….”
라엔이 말없이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러고는 설핏 웃었다. 내 머리 위로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다녀올게요.”
라엔이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주먹만 한 구체가 생겨나더니 내 주위로 둥실 흘러왔다.
눈덩이처럼 새하얀 구체에서 연한 빛이 번져 나왔다.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앞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송하견이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원형인 걸 보니, 빛 마법을 담는 물체의 모양이 여러 가지인 듯했다. 신기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쓸어내린 라엔이 복도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다시 발걸음을 뗐다. 잠깐이지만 홀로 걷는 복도가 어쩐지 더 썰렁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벌써 겨울이 와서 그런가.
연구실은 금방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렸다. 안에서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끼익.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모노클을 쓴 채 흰색 가운을 입은 송하견의 모습이 보였다. 두꺼운 파일철을 한 손에 든 채 펜을 쥐고 있었다.
방 안에는 복도와 똑같이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둥그런 수정구에서 하얀빛이 연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연구실 안에서 유일했다.
송하견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모습에 빛이 어른거렸다. 한쪽으로 길게 내려뜨려 묶은 짙은 보랏빛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의 색과 똑 닮아 있었다.
“선이한?”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송하견은 다급하다고 할 정도로 내게 미끄러지듯 훅 다가왔다. 부드러운 풀 향기가 주위에 스며들었다.
송하견이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나와 눈을 맞춰 왔다.
“…아픈 데는?”
느릿하게 건네져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송하견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으나 어쩐지 걱정 어린 기색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마에 닿아 오는 손이 서늘했다. 문득, 송하견은 겨울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처럼 소리 없이 고요한 사람.
그럼에도 마냥 차갑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내 열을 재는 듯한 송하견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 창을 보며 치료하기를 썼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송하견을 감쌌던 푸른빛이 내게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순간 송하견의 눈에 초점이 풀린 듯했다.
“하견 형?”
살짝 비틀거리는 송하견을 급하게 붙들었다. 송하견도 민주혁처럼 피로가 풀려서 잠이 오는 듯했다.
송하견이 멍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하견 형, 졸려요?”
“…아니. 고마워.”
송하견이 모노클 아래로 눈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바르게 서더니 한 손을 휘 내저었다. 책상 앞으로 커다란 의자가 생겨났다.
“앉아.”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송하견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순식간에 의자에 풀썩 앉았다. 푹신했다.
송하견이 펜 끝으로 수정구를 가볍게 두드렸다. 주위로 흰색 빛무리가 더 넓게 퍼졌다. 송하견을 올려다봤다.
“형, 지금 바빠요?”
그렇다면 괜히 방해되고 싶지는 않았다. 박율이 있을 온실 정원에나 가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송하견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 안 바빠.”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송하견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곧게 담겼다.
어쩐지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꼭 내가 옆에 있으니까 바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나도 안다.
나는 이게 문제였다. 신전에 있으면서 스승님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본 일이 까마득했으니까, 자꾸 작은 시선 하나에도 과한 방향으로 생각을 트는 것이었다.
사람과 교류하는 일이 이래서 중요하다. 아직도 나는 적당한 마음이라는 걸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까지 다가가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내게 어디까지 다가오려 하는지.
혼자서 괜한 생각을 한 게 민망해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하견 형. 아까 위층에서 민주혁하고 만났어요.”
“응. 민주혁, 항상 가 있더라.”
“방금은 라엔 형하고 만나고 왔고요.”
“아. 그래서….”
송하견이 내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 떠 있던 구체의 빛이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내가 무사히 도착했으니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보였다.
송하견이 손바닥을 펼쳐서 그 아래로 가져다 대자 구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걸 책상에 데굴 굴린 송하견이 바로 옆에 놓인 수정구를 두드렸다. 앞쪽으로 밝게 빛나는 지도가 떠올랐다.
송하견이 쓰고 있는 모노클에 빛이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송하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변이 일어나고 있어.”
그동안은 마물이 원형 그대로 유지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번에 나와 라엔이 다녀온 곳에 있었던 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고 했다.
만약 마물이 다른 곳으로 스며들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면, 지금까지처럼 라엔의 마법으로만 감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위험한 지역부터 차근차근 돌아봐야 할 것 같다며, 송하견이 말을 마쳤다.
송하견의 기다란 손가락이 지도의 한 부분에 닿았다. 그곳에 붉은색으로 엑스 표시가 그어졌다.
언젠가 미래시에서 송하견이 비슷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내가 본 미래가 실제로 일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앞날이 다 정해져 있다는 것 같아서 찝찝하기도 했다.
애초에 미래를 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도 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불현듯 라엔의 일이 떠올라서 소름이 오싹 돋았다. 몸이 살짝 떨렸다.
일어나지 않게 막을 일이라고 해도 당신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는 건 싫었다. 선명하게 붉은 표시가 남아 있는 지도에서 시선을 뗐다. 송하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이한.”
송하견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거지?
“지금, 추워?”
느릿하게 건네져 오는 질문은 여전히 맥락을 알 수 없었다. 별로 춥지도 덥지도 않았으므로 바로 고개를 저었다.
송하견이 말없이 내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더니 공중에 커다란 베개와 담요를 소환했다. 그걸 잡아챈 송하견이 담요를 내게 감싸듯이 덮었다. 품에 안겨 주는 베개가 푹신했다.
‘그런데 나 방금 안 춥다고 말한 거 아니었나?’
이 정도면 내 의사 표현이 명확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송하견이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따뜻했으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평화로웠다. 송하견이 건넨 따뜻한 차는 조금 씁쓰름한 맛이었지만 마시다 보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멍하니 차를 홀짝이고 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송하견이 말하는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급히 뛰어온 듯 보이는 라엔이 서 있었다.
“하견, 혹시 리더 형 어디 있는지 알아요?”
다급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젓는 송하견의 표정도 진지해진 것 같아 보였다.
“혼자서 간 거면 위험한데….”
라엔이 불안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지하실도, 가 봤어?”
라엔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갑자기 뒤로 고개를 휙 돌렸다.
“텔레포트.”
중얼거리듯 말한 라엔이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라엔의 금안이 반짝 빛나는 듯 보였다.
창밖의 하늘에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환한 빛이 조금씩 밀려 들어왔다. 라엔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리더 형의 마나예요.”
방을 박차듯이 나간 라엔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새벽 같은 아침이었다. 1층의 커다란 홀에 해가 뜨기 직전의 푸른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멀리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리더 형!”
라엔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박율이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깥의 찬 기운이 훅 끼쳐 왔다. 그 아래로 옅은 꽃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박율이 라엔과 송하견을 안심시키듯 마주 보며 고개를 한 번씩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한아, 일어났구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박율이 눈꼬리를 접어 연하게 웃었다. 눈 바로 아래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상처에서 피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박율이 확인하듯 한 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