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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5화 (25/150)
  • 025화.

    당신을 믿고 있으니까

    그래도 선택지 중에서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연구실은 송하견, 온실 정원은 박율이 있을 만한 장소였다.

    그러면 화실이나 서재? 둘 중 어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방으로 찾아갈 때마다 라엔이 늘 책이나 종이를 보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서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원래 이런 건 직감을 따라야 한다. 결정을 내린 순간 눈앞에 파란 빛 알갱이가 죽 늘어섰다.

    「‘서재’로 안내합니다.」

    상태 창의 친절한 설명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길도 찾아 주는 거였구나. 참 편리한 퀘스트구나 싶었다.

    방을 나서서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에는 온통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에서 빛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빛은 1층으로 내려가서, 복도의 끝 즈음에 있는 작은 방문 앞에서 끊겼다. 문틈으로 옅은 주황색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후에 조심스레 열었다.

    달칵.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서재는 주황색의 아늑한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옆에 놓인 커다란 책장에는 두꺼운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바로 정면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반투명하고 얇은 흰색 커튼이 살짝 걷혀 있었다.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채 새카맣고 고요했다.

    “…이한?”

    흔들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이 창에서 등을 돌린 채 이쪽을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다쳤는지 한쪽 눈에 하얀 안대를 쓰고 있는 채였다.

    바로 앞에 있는 책상 위에는 어질러진 책과 열린 잉크병이 가득했다.

    후두둑.

    공중에 떠 있던 수십 장의 종이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위로 불빛이 스며들었다.

    “이한.”

    라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다가,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흩어진 종이가 발아래서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는데도 라엔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라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금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반짝이는 듯했다.

    이내 투명한 눈물방울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렸다.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 안에 빛이 연하게 담겼다. 라엔의 시선이 나에게로 곧게 향하고 있었다.

    문득, 보름달 같은 눈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고요히 빛나는 달처럼, 라엔은 밝은 금색 눈동자에 내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한 발자국 라엔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엔의 요동치는 시선이 내 모습을 좇았다.

    라엔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쩐지 방을 밝히는 전등의 불빛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다가오지 마요.”

    속삭이듯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라엔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지?

    의문스러움에 라엔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라엔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어요, 이한.”

    갑자기? 그러나 라엔의 표정은 진지했다. 라엔은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마치 고백하듯이 내뱉었다. 결연한 목소리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언젠가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커다란 방. 어린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손을 마주 잡은 채 눈을 맞춰 왔던….

    누구였지? 내게 무슨 말을 했지? 흐릿한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이한. 그게 무엇이든.”

    상념을 뚫고 라엔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게 어떤 기억이든지 이미 잊은 거라면 지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니까. 이어지는 라엔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전부, 믿을게요.”

    계속 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라엔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세게 눌러 닦았다.

    자각하지 못하는 듯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라엔을 바라보다가, 눈동자를 살짝 옆으로 굴렸다. 아까 확인을 미뤄 뒀던 상태 창이 다시 보였다.

    「페널티 ‘간헐적 코피’가 지속 시간 ‘3주’ 동안 유지됩니다.」

    퀘스트가 실패했다는 알림과 함께 페널티가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곱씹어 읽었다.

    바로 옆에는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 있었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Ⅴ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간헐적 각혈 3개월 페널티

    제한 시간: 3개월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시작되었는지 제한 시간이 이미 흐르고 있는 채였다. 이 퀘스트는 이미 성공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이건 어떻게 해야 끝나는 퀘스트인 걸까.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내게 조심스럽게 건네져 오는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믿으니까, 그러니까 더는 그러지 마요.”

    뭐를요? 하고 물을 뻔했으나, 경계하듯이 천천히 물러나는 라엔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가져오기를 말하는 거구나.

    라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놀랄 만했다.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고 내가 갑자기 쓰러진 거니까. 정신을 잃은 사람을 들쳐 메고 데려와야 했으니 번거롭기도 했겠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라엔 형.”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라엔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불빛이 흐릿하게 어두워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계속 이렇게 피할 거예요?”

    라엔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꺼낼 수 있는 말은 마땅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는데, 이건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가져오기를 사용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긴 했다. 치료하기 게이지가 다 차기 전에 비워 내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아직 확인은 못 했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라는 게 꼭 마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꺼낼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라엔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형.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뒤로 천천히 물러나던 라엔이 자리에 덜컥 멈췄다.

    라엔의 바로 뒤에 커다란 창이 있었다. 새카만 밤이 꼭 텅 빈 공간처럼 섬뜩하게 어두웠다.

    그 바로 앞에 선 라엔의 모습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빛나는 금안을 크게 뜬 채로 굳은 모습이, 꼭 어둠 속으로 사라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라엔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더 물러날 곳이 없는 라엔의 등이 차가운 창문에 닿았다.

    “…이한. 하지, 말아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라엔이 내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밀어내는 듯한 손길이었다.

    방 안의 불빛이 거의 깜빡이듯이 흔들렸다. 그 아래 선 라엔의 모습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잠시만요, 하는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으나 라엔의 뺨에 내 손이 닿는 것이 먼저였다.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라엔’

    치료하기 / 가져오기」

    치료하기를 선택하자 푸른빛이 라엔의 눈가를 감쌌다. 안대를 쓴 왼쪽 눈이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어냈다. 부드럽게 풀린 흰색 안대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힘없이 내려앉던 안대가 눈꽃처럼 가볍게 톡, 하고 바닥에 닿은 순간.

    화악.

    라엔의 눈가에서 맴돌던 빛이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방 안을 깜빡이며 밝히던 주황색의 불빛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고요한 어둠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라엔의 금색 눈동자만이 바로 앞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 나를 오롯이 담아낸 채로.

    “라엔 형.”

    작게 웃으며 라엔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봐요, 괜찮잖아요.”

    라엔이 웃음기 스민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여전히 입술을 짓씹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였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안심했다는 듯 보이기도 했고, 마음이 무척이나 쓰리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안대를 풀어낸 라엔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 냈다. 그래도 저번처럼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한.”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왠지 잠긴 듯이 먹먹하게 들렸다.

    라엔이 내 손목을 살짝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무너지듯 내게 기대 왔다. 나를 단단히 감싸 안은 라엔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밀려 들어왔다.

    짧게 묶은 붉은 머리칼이 몇 가닥 풀렸다. 스르르 흘러내린 머리칼이 스치듯이 내게 닿았다. 어쩐지 방 안이 조금 더워진 것 같았다.

    내 목덜미 바로 옆에 머리를 기댄 채로, 라엔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내 얼굴 바로 옆에서 들렸다.

    “계속 말했었죠.”

    라엔이 벅찬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힘겹게 내뱉는 다음 말은 라엔에게서 몇 번이고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그건 괜찮지 않은 거예요.”

    라엔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의 흔적조차 없었으나, 왠지 아직도 라엔이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닿아 오는 몸에서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라엔은 어쩌면 서글서글한 민주혁이나 차분한 송하견보다도 더 여린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괜찮다는 데도 이렇게나 걱정을 하지.

    “정말 괜찮아요, 라엔 형.”

    내 말을 들은 라엔이 매달리듯 나를 세게 안았다. 아까보다 더 큰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하는 것 같다.

    라엔의 너른 등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라엔 형이 이게 괜찮지 않은 거라고 한다면.”

    라엔의 바로 뒤로는 여전히 텅 빈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짓누르듯 무거운 밤이었으나 이것마저도 괜찮았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나를 그렇게나 걱정하고 있다면….

    “그러면 고민해 볼게요. 잘은 모르겠지만요. 그러니까 형이 알려 주세요.”

    웃으면서 말을 마쳤다. 라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든, 알려 줄게요. 그리고 믿을게요. 이한이 내게 말하는 것 전부 다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라엔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 말이 진심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이 퀘스트는 끝나지 않는 걸까.’

    깜빡.

    바로 옆에서 라엔의 의심 퀘스트의 제한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건 라엔의 누구에 대한, 무엇에 대한 의심일까. 애초에 나에 대한 의심이라는 건 맞나? 아니면 혹시,

    띠링.

    갑작스레 들려오는 맑은 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눈앞에 뒤늦게 퀘스트 창이 떴다.

    <돌발! 퀘스트> 용사님 찾기, 성공!

    성공 보상으로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내가 확인하자마자 퀘스트 창은 훅 꺼져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밖에 새카만 밤이 지나고 있었다. 텅 빈 어둠을 몰아낸 보랏빛 새벽이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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