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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4화 (24/150)

024화.

기다리고 있었어

“선이한.”

고요한 방 안에 민주혁의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침대 옆의 탁자에 작은 등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어둠 속에 스민 빛이 침대에 가만히 누운 창백한 얼굴을 밝혔다.

“…언제 일어나?”

떨리듯 흘러나온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하얀 얼굴을,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아 한참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 모습이 차갑게 식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올리니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미지근한 온기에, 지난날 내 손에 닿았던 지나치게 뜨거웠던 열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처음 만난 날 이곳으로 오는 마차에서였다. 열이 오른 뺨의 생경한 온도와 서서히 잠겨 가던 선이한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 그 위태로웠던 모습마저도.

“곧 일주일이 지나.”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가. 평소답지 않게 생각이 바로 말로 나왔다. 열이 올라 잠긴 목소리라도 좋으니, 선이한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눈을 꾹 감았다. 물론 선이한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선이한은 뭐든 중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수없이 곱씹었던 후회 한 조각이 머릿속에 다시 화두로 던져졌다. 어쩌면, 내가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었더라면, 그때 모두가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선이한이 덮은 이불을 천천히 쓸었다. 푹신한 이불이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천이 시야에 담겼다.

이불을 꾹 말아 쥐었다. 선이한이 이보다 더 희었던 옷을 온통 붉게 물들인 채 돌아왔던 그 날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쨍그랑.

기억의 파편 속에서, 유리잔이 부서져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다시 울리는 듯했다.

눈앞에 피로 물든 두 인영이 있었다. 한 사람은 축 늘어진 채 로브에 감싸여 안겨 있었다. 그를 붙잡듯이 품에 안은 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한은, 나를 치료했어요.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이한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용사 서약을 맺을 때부터 우리는 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이한은 용사가 아니었다. 심지어 따져 보자면 우리와 만난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사이였다.

치료 마법을 써 주는 것과 상처를 자기 몸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건 결이 다른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이한은, 왜 그렇게까지….

“…야, 선이한.”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내며 다시금 선이한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일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며 지레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선이한의 목소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직접 듣고 싶었다.

여전히 고요하게 눈을 감은 선이한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일어날 거지?”

선이한의 가느다란 손을 단단히 잡았다. 닿아 오는 미지근한 온기 위로 내 이마를 대었다.

“알아. 그래도 빨리 일어나.”

외상도 없으니까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얇은 피부 아래로 맥박의 울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라엔 형님이 매일 다녀가고 있는 거 모르지?”

라엔 형님은 어디선가 흉터에 바르는 연고를 구해 왔다.

형님이 말하지 않았기에 그 흉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이한의 주위로 하루도 빠짐없이 달콤한 연고 향이 옅게 퍼져 있었다.

“송하견 형님도 매번 뭔가 가져오고 있어. 아마 탁자 보면 놀랄걸.”

시선을 탁자 위로 돌렸다. 투명한 유리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안에는 각각 색이 조금씩 다른 보랏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유리병에는 흰색 막대가 한두 개씩 꽂혀 있었다. 방 전체에 풀 향기가 은은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었다.

“박율 형님은 너 몸 상하지 않게 매일 신경 쓰고 있고.”

박율 형님은 하루에 한 번씩 와서 선이한의 상체를 일으키고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을 몇 스푼 떠서 입에 흘려 넣었다. 어느 정도는 기력을 보충해 줄 수 있도록 만든 약이라고 했다.

“다들 네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모두 바빴다. 마물이 다른 무언가에 스며드는 건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신중하게 조사해야 했다.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면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심각한 건 선이한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애가 탔다.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없는 잘 시간마저 쪼개 가며 선이한에게 매일 잠깐씩이라도 얼굴을 비추는 거겠지.

선이한의 손을 쓸어내리듯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나? 나는 뭐 없어.”

일어나면 입에 사탕이나 넣어 줄게, 지난번에 잘 먹었다면서. 그렇게 말하며 겉옷 주머니를 톡톡 쳤다. 안에 막대 사탕이 두둑이 들어 있었다.

사실 단 걸 딱히 찾아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걸 먹어 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마주 잡은 선이한의 손 위로 얼굴을 기댔다. 선이한에게서는 포근하고 따뜻한, 마치 비누처럼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그래도, 나도…. 기다리고 있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이한의 손을 계속 잡고 있어서일까, 어쩐지 닿아 오는 온기가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조용히 열렸다. 투명한 물빛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났다.

눈을 뜨니 어두운 방 안에 누운 채였다.

내 위로 이불이 덮여 있었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무래도 라엔이 나를 잘 챙겨서 데려와 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잠에서 막 깨어나 몽롱한 와중에 상태 창 몇 개가 한꺼번에 들이밀어졌다. 적어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좀 나중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모든 상태 창이 휘리릭 사라졌다. 눈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대강 훑어봤을 때 긴박한 건 없어 보였으니 천천히 확인해도 괜찮았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팔이 묵직했다.

눈을 굴려 옆을 봤다. 은은한 불빛에 빛나는 갈색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민주혁이 내 팔에 기대듯이 고개를 묻고 있는 채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 됐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밤중인 걸 보니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몸 상태도 괜찮았다. 이래서 사람이 잠을 자야 한다. 웬만한 건 자고 일어나면 나으니까.

“…민.”

민주혁, 하고 말을 제대로 잇기 전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을 뱉는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잔뜩 갈라져 있었다. 뭐지?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나?

어쩐지 여기 온 첫날이 생각났다. 그때는 하루가 훌쩍 지나 있었는데.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이한?”

민주혁이 벌떡 일어서 있었다. 아래로 의자가 나뒹굴었다. 민주혁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대답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목이 건조해서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민주혁을 바라본 채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민주혁이 힘이 풀린 듯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야, 선이한.”

민주혁이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이해는 갔다. 마지막에 본 모습이 내가 피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을 테니까. 물론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상처는 어떻게 된 거지?’

가져오기를 했으니 내게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을 텐데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민주혁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닿아 오는 손이 떨리는 듯했다.

내 몸을 느릿하게 일으킨 민주혁이 등 뒤로 푹신한 베개 몇 개를 받쳐 주었다.

“마셔.”

민주혁이 유리잔에 물을 따라서 내 손에 쥐여 줬다. 몇 모금 마시니 목이 훨씬 편해진 것 같았다.

내가 물을 다 마신 걸 확인한 민주혁이 유리잔을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주일은 안 됐어.”

“어?”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주일? 뭐가? 설마.

“내가 잠들어 있던 게?”

민주혁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었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민주혁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야, 민주혁. 잠깐만 이리 와 봐.”

“왜? 어디 안 좋아?”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민주혁이 재빠르게 침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민주혁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나도 손을 뻗었다. 민주혁의 눈꺼풀 위쪽으로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띠링.

동시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민주혁’

치료하기 / 가져오기」

치료하기. 그렇게 생각하자 민주혁의 주위로 푸른색의 빛이 맴돌았다.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선이한. 야, 잠깐만.”

“좀 자. 피곤해 보이는데.”

민주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순간 빛이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민주혁의 몸이 내게 기댄 채 풀썩 무너졌다.

선선한 바람 같은 시원한 향이 스치듯이 났다. 민주혁의 숨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렸다. 맞닿은 민주혁의 몸이 단단했다. 의외로 체격이 큰 편인지 꽤 무거웠다.

그 아래서 열심히 빠져나와 민주혁을 제대로 눕혔다.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민주혁은 고른 숨을 내쉬며 푹 잠들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동안 잠은 제대로 잔 건가? 갑자기 상처를 치료하니 피로가 풀려서 잠든 것 같았다. 다들 내가 깨어나지 않은 동안 얼마나 몸을 험하게 썼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까 보니 치료하기 게이지가 끝까지 차기 전에 미리 비워 내는 방법이 있었다. 자세한 방법은 나중에 읽어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쿨타임 걱정 없이 치료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면 일단 라엔을 찾아가 볼까. 잘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도 말해야 하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띠링 하고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용사님을 찾아라!

수락 / 거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수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돌발! 퀘스트> 용사님을 찾아라!

성공 시: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 획득

실패 시: ‘용사님, 찾아갈게요(1회)’ 획득 실패

찾아갈 용사님이 누구인가요?

아, 이걸 먼저 선택해야 하는구나. 라엔을 찾아가겠다고 선택하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용사 ‘라엔’을 찾아갈 장소를 선택하세요!

1) 화실

2) 연구실

3) 서재

4) 온실 정원

음, 선택지에…. 처음 보는 장소가 포함돼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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