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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3화 (23/150)

023화.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더 잴 것도 없이 선이한의 뒤를 막아섰다.

이게 뭐지? 마물? 지금까지 이런 건 없었는데.

설마, 나무 안으로 스며든 건가? 말도 안 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푸욱.

순식간이었다. 생경한 고통이 느껴졌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삼켰다. 내 허리께를 뚫고 지나간 억센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흐트러진 정신을 애써 다잡고 마법을 썼다.

바닥에서 덩굴이 솟아올라 나무를 칭칭 감았다. 이 정도면 안심이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뒤에서 선이한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내가 제때 막아서서 선이한은 다치지 않았다.

타박.

작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이한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듯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떨려 왔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상당한 듯했다.

“커, 헉….”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비릿한 피가 입가를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타박.

선이한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망설이듯 느린 속도로, 선이한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봤겠지만, 그래도 더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선이한은 전투에 나선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심하게 다친 모습을 본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 순간은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었다.

선이한의 트라우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돌려보내야 했다. 지금이라도.

탁.

발걸음 소리가 바로 내 앞에서 멈췄다.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내 앞으로 선이한의 흰 옷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곧게 서 있는 선이한의 발치로 붉은 피 웅덩이가 번져 나갔다.

벅찬 숨을 애써 가다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한…. 위험, …돌아가요.”

나를 공격한 나무는 묶어 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안전해진 건 아니었다. 내 상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선이한을 지킬 수도 없었다.

선이한에게는 지금 귀환석이 있었다. 그걸로 돌아가서 누구든 불러온다면, 그러면 됐다.

그런데 내가, 그때까지….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가능성을 넘어서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이 정도 부상이면 살아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설령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괜찮았다. 끝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용사 서약을 맺었을 때부터 각오는 되어 있었다. 물론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 보니 다행이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선이한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선이한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가느다랗고 뜨거운 손가락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선이한이 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흐린 시야에 선이한의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내려앉은 붉은 노을이 선이한의 하얀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숨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선이한은, 살았으니까. 그리고 살아갈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았다.

리더 형도, 송하견도, 민주혁도. 다들 나와는 달리 단단한 사람들이니까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터였다.

다행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게 나여서.

그러니까 이한,

‘돌아가.’

어서 돌아가 줬으면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내 숨이 끊어질 때 선이한이 이 앞에 있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 때, 내 입가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선이한의 손이 순간 우뚝 멈췄다.

내 입가에 맺혀 있던 피가 선이한의 하얀 손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핏방울이 바닥에 똑, 하고 원을 그린 그때,

화악.

밝은 빛무리가 나를 감쌌다.

푸른빛이었다. 아침이 밝아 오듯 맑은 빛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고통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는 듯했다. 눈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의 그림자가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쓸려 나가는 게 아니라 그 빛 안에 담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짓누르던 고통이 사라지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푸른빛은, 분명히,

“…이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정도의 큰 부상에도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이걸 치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을 살리는 수준인데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고개를 휙 들었다. 동시에 나를 감싸던 푸른빛이 내게서 훅 멀어졌다.

파악.

그 빛은 선이한에게로 사납게 들어갔다. 거의 처박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은 이곳에 순간 선이한만이 푸르게 반짝였다가 사그라들었다.

선이한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흰옷이 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자리에 무너지기 전, 선이한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떨리는 손을 뻗었다.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 두려웠다. 피가 번져 나가고 있는 저 부근은 분명, 내가 상처 입었던 그곳이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선이한이 치료 마법을 쓸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이건 마치, 내 상처를 그대로 가져간 듯한….

선이한의 어깨를 다급하게 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늘게 떨던 선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이한!”

정신을 잃지 말라고, 의식을 놓으면 안 된다고, 간절하게 외쳤다. 울컥 울음이 차올라 목이 메었다. 선이한은 그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어딘가 비껴간 시선으로 멍하니 있었다.

그 표정이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어딘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순간, 선이한의 시선이 내게로 곧게 향했다. 흐려진 물빛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선이한의 떨리는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선이한은 어딘가 안도한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에 무언가 감춰 둔,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맑은 하늘처럼 환하게 갠, 편안한 웃음이었다.

언젠가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이한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 손에 닿은 마른 어깨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이한은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선이한이 그 안에 잠겨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일렁이는 노을 속에서 선이한의 웃음기 스민 푸른 눈동자만이 빛났다.

나는…. 나는 선이한의 저런 웃음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를 구하고, 내 상처를 대신 감당하고. 그러고 나서 편안하게 웃는 표정 같은 걸…. 그런 걸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 내 숨을 조여 오던 생경한 고통이 떠올랐다. 선이한도 지금 그렇게 고통스럽겠지.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할 것이다. 이렇게 다쳐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흐으, 커헉.”

선이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것이, 진득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선이한은 여전히 말갛게 웃은 채로 흔들리는 시선을 내게 힘겹게 맞춰 왔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뱉었다.

“라엔 형, …믿어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몸이 굳었다. 나의, 무엇을?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무너져 가는 네 앞에서, 너를 세게 안은 채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하질 못했다.

그런데 너는, 나의 무엇을,

“…형도, …저, 를.”

선이한이 힘겨운 듯이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문득, 선이한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나는 아직 살고 싶다고. 그러니까, 구해 달라고. 내가 당신을 살렸으니 당신도 나를 살려 달라고.

그런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휘몰아치는 생각 사이로 선이한의 사그라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믿어,”

믿어 주세요, 하고 흩어지듯 내뱉는 말이 귀에 섬뜩하게 꽂혔다.

말을 마친 선이한은 안심했다는 것처럼 표정을 풀고 눈을 감았다. 나를 담아내던 푸른 눈동자가 밤이 내려앉듯 순식간에 닫혔다.

피가 차게 식었다. 순식간에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나에 대한, 너에 대한,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이.

선이한이 믿어 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내가, 그게 무엇이든, 선이한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놓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잃을 수 없었다.

선이한이 내게 기대듯이 무너져 왔다. 닿아 오는 무게가 흩어질 듯이 가벼웠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흘러내리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매달리듯이 선이한을 감싸 안았다.

‘믿어요, 이한.’

그게 뭐든, 믿을 테니까. 당신에게 꼭 믿는다고 전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됐다.

선이한을 눕히고 다급히 옷자락을 찢어 냈다. 이 정도 크기의 상처를 지혈할 수 있을까? 손끝이 떨렸다.

옷을 찢어 내고 마주한 것은 선명한 색의 빛 알갱이였다. 선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그것이었다. 마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푸른빛.

그 빛이 선이한의 허리에 크게 뚫린 상처 위를 짓누르듯 감싸고 있었다.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며 상처가 점점 아물고 있었다.

화악.

순간, 빛 알갱이가 선이한에게로 흡수되며 사라졌다. 마르고 얇은 허리에 상처가 아물고 난 흉이 커다랗게 져 있었다.

손끝으로 그 부근을 쓸었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을 적셔 왔다. 그 아래로 부드러운 살갗과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선이한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안정된 호흡이었다.

“…이한.”

선이한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고 붉은 태양에 가려져 사그라들었다. 눈앞이 온통 타오르는 노을빛으로 가득 들어찼다.

선이한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피로 물든 옷자락에 파묻히듯 싸여 있었다. 로브를 벗어 그런 선이한을 감싸듯 안아 들었다.

말랑한 온기가 품에 조심스레 닿아 왔다. 이제야 심장이 다시 뛰는 듯했다.

해가 거의 떨어지고 있었다. 텅 빈 하늘에 어두운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요.”

선이한을 힘주어 안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마법을 외웠다.

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눈을 뜨니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선이한과 함께.

쨍그랑.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라엔 형님…? 선이한?”

민주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밤이 내려앉은 무렵이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1층의 커다란 홀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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