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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2화 (22/150)

022화.

천천히 알아 가면 돼

선이한이 서쪽 숲에 같이 가겠다고 말했을 때, 라엔은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 선이한은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일 때문에 걱정이었다. 선이한의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타고 흘러내리던 붉은 선혈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

지혈하며 자세히 살펴봤을 때 깊게 그어진 상처가 여럿 있었고, 이미 아물어 흉이 진 것도 보였다. 쉽사리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아파 보였다.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조심스레 건네 왔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간절해 보이는 투명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선이한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로 선이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선이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평소와 같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금이 간 유리잔을 보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래도 팔을 더 긋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선이한이 한 번이라도 더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건 나 혼자 지켜볼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창백한 팔에 가득 들어찬 깊은 상처, 그리고 흉터. 홀로 견뎌낸 그 시간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긴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내 오는 선이한의 모습이 기특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마음에 오래 담아 두었던, 묵직한 감정이 담긴 말을 꺼내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걸 다 알지 못했다.

그러니 어서 전부 털어놓으라며 재촉하지 말아야 했다.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식당에서 나와서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발을 맞춰 오는 선이한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선이한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에 무언가 감춰 둔,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맑은 하늘처럼 환하게 갠 편안한 웃음을 보고 싶었다.

선이한의 손을 잡고 텔레포트 마법을 외웠다.

공기 중에 퍼진 상쾌한 숲 내음을 맡자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주 본 선이한은 확연히 굳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처음이었으니 아무리 위험하지 않은 장소라고 해도 무척이나 떨릴 터였다. 처음은 원래 그런 법이니까.

괜찮으니 긴장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자, 선이한이 내게로 조심스레 눈을 맞춰 왔다.

푸른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곧게 담겼다. 쏟아지는 붉은 노을빛 속에서 말간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선이한에게서 전해져 오는 떨림이 점차 줄어 갔다.

“네, 라엔 형. 이제 괜찮아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선이한이 이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했다는 듯한 웃음을 띤 채였다.

그 안에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불어왔다. 선이한의 단정한 검은색 머리칼이 슬쩍 흐트러졌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대화가 느긋하게 이어졌다.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선이한은 자신은 무척이나 괜찮다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마음 어딘가가 무거워졌다.

-삶을 그만두고 싶었나요?

그렇게 물었을 때 선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힘들었느냐고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건 깊은 체념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확신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어떤 것이든 그 무게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는, 그런 절망에 가까운 확신이.

그래도 이한,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요.’

여러 번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선이한이 나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을 띤 채로 늘 희었던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지고 있는 노을 때문인지도 몰랐다.

달아오른 듯한 뺨을 손으로 감싸고 싶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선이한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라엔 형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선이한은 자신도 정리되지 않은 듯 드문드문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의 요지는 하나였다.

‘상처를 낸 건, 그게 필요해서였을 뿐이다.’

미래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 말을 변명하듯 이어 나가는 선이한을 바라봤다. 이건 좋지 않았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이한은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것에 수긍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선이한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였다.

‘선이한에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지?’

쉽사리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정면으로 반박해서는 안 됐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아예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상처를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으면서도 속이 썼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따로 말해 줘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무거웠다. 선이한은 지금껏 어떤 시간을 보내 온 걸까.

선이한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손안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감겨 왔다.

여전히 평온한 표정의 선이한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잘 이해하고 있는 건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건지.

단단히 굳어진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선이한이 자신을 좀 더 소중히 대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옆에서 기다릴 테니까.

언젠가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선이한이 깨달을 때까지. 자신에게 상처 입히지 않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이한.’

언제까지고 다시 알려 줄 테니까, 선이한은 천천히 그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분명히 훨씬 괜찮아질 터였다.

어디가 아픈지 알고 나면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알고 나면 아물 수 있을 테니까.

흩날리는 하얀 소매 끝을 힘주어 잡았다. 선이한은 앞을 멍하니 바라본 채 생각에 잠긴 듯했다.

표정이 어딘가 묘해 보였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수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찮았다. 지금은 그렇게 서서히 알아 가면 됐다.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어느새 타오르는 듯한 붉은 태양이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다. 노을의 붉은 빛이 쏟아졌다.

숲의 싱그러운 향기가 공기 중에 스며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었다.

선이한도 지금, 조금은 편안한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멈췄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균열이 열려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분명 걸어 둔 마법에는 마물의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는데.

확인해 봐야 했다. 선이한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선이한이 졸졸 따라왔다. 자기 딴에는 나름 조용히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이한은 자기도 같이 가자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언젠가 민주혁이 선이한의 고집은 이길 수가 없다며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말랑해 보이기만 하는 선이한이 무슨 고집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잘 알겠다.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아무리 그래도 선이한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자 선이한은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이한?”

혹시 우나? 선이한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흐느끼는 것처럼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선이한이 자기 소매를 조그맣게 매만졌다. 그러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엔 형. …사실, 혼자 있는 거. …무서워요.”

같이 가고 싶어요, 하고 선이한이 울먹이듯 말을 이었다. 어딘가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선이한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이건 반칙이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잠깐. 애초에 아예 두고 가려고 했던 적 없는데.

금방 확인만 하고 다시 오려고 했다. 그래도 혼자 있기가 무섭다는데 차마 더 안 된다는 말을 뱉기가 어려웠다.

“같이 갈 테니까, 진정해요.”

내 말을 들은 선이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들었다. 눈가가 약간 붉어져 있었으나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선이한의 어깨를 토닥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허공에 열린 균열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균열 주위로 급하게 마법을 둘렀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여기로 빠져나온 마물을 찾아서 처리해야만 균열을 닫을 수 있었다.

균열이 닫히면 그 자리에 닫힌 흔적만이 남는다. 옷감을 한 번 찢었다가 얼기설기 바느질한 것처럼 엉성한 모양새로. 그래도 그 자리로는 더 이상 마물이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마물을 찾아서 묶어 둬야 했다. 마물을 처리하는 건 선택받은 용사인 리더 형만이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주변에 마물의 기척이 아예 없었다.

“이한. 먼저 돌아가요.”

일단 선이한은 돌려보내야 했다. 상황이 심각했다.

균열을 하나 발견했다는 건 그 주위에 분명 다른 균열이 더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그걸 임시로나마 막아 두고 가야 했다.

그러나 선이한은 굳은 표정으로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선이한의 말은 내가 늘 해 왔던 생각과 같았다. 상황이 언제나 변한다는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무엇도 없다는 것도. 그래서 섣불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선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요, 형. 그러면 괜찮아요.”

가뿐하게 말한 선이한이 걸음을 옮겼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선이한이 금방이라도 녹아 그 안으로 사라질 것 같이 보였다.

서둘러 선이한의 옆으로 발걸음을 맞췄다. 선이한의 백색 옷이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채 바람에 옅게 휘날렸다.

그 소매 끝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열려 있는 균열이 한둘이 아니었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선이한에게 몇 번이고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으나, 선이한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나와 달리 귀환석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 테니까, 마나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해 줘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했다. 혹여나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선이한은 다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긴장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모든 감각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잠깐. 이건 뭐지? 순간 등골에 소름이 오싹하게 끼쳤다.

이질적인 감각이, 등 뒤에서,

“이한!”

검게 물든 굵직한 나뭇가지가 선이한의 등 뒤로 곧장 뻗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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