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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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엔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인하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쩐지 엇나가 버린 대화에 마음이 착잡했다.
라엔이 나에게 시선을 맞춰 왔다. 얼굴이 노을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달아오른 듯한 얼굴을 보니 지난번에 라엔의 눈에서 소리 없이 흘렀던 눈물이 떠올랐다.
결국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라엔이 내 머리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쓰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상처를 내면서까지….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엔의 손길이 미련 없이 떨어졌다. 커다랗고 단정한 손이 멀어져 갔다.
닿아 오던 온기가 문득 아쉬운 것도 같다고 생각할 때, 라엔이 내 왼쪽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바스러지는 낙엽을 쥐듯이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아프지는 않았나요?”
주저하듯 내뱉는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패시브 효과 덕분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껏 모두에게서 아프지 않냐는 물음만 몇 번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다들 어쩐지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라엔도 그랬다.
안 아프고 괜찮다면 오히려 걱정을 덜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들 그런 표정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뭘 더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이한, 말했었죠. 그건 괜찮지 않은 거라고.”
아니. 괜찮은 게 맞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억울했다. 본인이 괜찮다면 그런 거지.
…아, 라엔은 내 상황을 모르는구나.
시스템도 패시브 효과도, 라엔이 알 리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라엔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내가 걱정 끼칠 만한 상황을 최대한 보이지 않을 수밖에.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옆에서 라엔이 덜컥 걸음을 멈췄다.
“…라엔 형?”
라엔의 시선이 왼편 저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미래시로 본 상황이 덧그려지고 있었다.
지금인가? 이제 시작되는 걸까? 너무 빨랐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채 안 됐는데.
“이한, 잠깐만요. 여기 가만히 있어요.”
라엔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뒤를 따라가니 라엔이 걸음을 멈추고는 나를 마주 봤다.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라엔의 표정이 단호했다. 그러나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혼자 있는 게 더 무섭다고까지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와 발걸음을 맞춰 왔다.
물론 나는 혼자 있는 게 무섭지 않다. 라엔과 같이 가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걸음을 멈춘 곳에는 미래시에서 본 것과 같은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허공에 검게 찢어진 흔적이 섬뜩했다. 그 앞에서 라엔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상해요. 균열이 열려 있는데, 감지 마법에는 마물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무 모양을 한 그건 마물이 아닌 건가? 미래시는 상황을 보여 줄 뿐 설명을 해 주지는 않았다. 추측은 나의 몫이었으나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라엔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으니까 일단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 볼까?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지럽게 흘러가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이한. 먼저 돌아가요.”
라엔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어느새 빛무리가 균열 위로 연하게 덮이고 있었다. 라엔이 나를 마주 본 채 내 어깨를 단단하게 잡았다.
“귀환석, 아직 가지고 있죠?”
“라엔 형은요? 같이 안 가요?”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한이 돌아가서 모두에게 얘기를 전해 줘요.”
“…어떤 얘기를요?”
“준비되는 대로 이곳으로 와 달라고요. 그동안은 내가 수습하고 있을 테니까.”
상황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거구나.
새삼 놀랍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에 라엔이 이럴 거라고 짐작했었는지도 모른다.
라엔과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형이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안 돼요. 지금 상황이 다 파악되지 않아서, 내가 대비하지 못한다면 이한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똑같이 위험하잖아요.”
라엔 형도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을 해도 라엔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내가 라엔의 옆에 남아 있을 만한 합당한 이유였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귀환석을 쓰는 것도요. 나는 마나의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다면서요. 귀환석을 썼다가 이상한 데로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귀환석은 마나와 별개로 작동해요. 걱정하지 마요, 이한. 그럴 리 없어요.”
“치료 마법도 있을 리가 없는데, 나는 그걸 쓰잖아요.”
“…….”
“라엔 형, 상황은 언제나 변해요.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반쯤 억지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살아간다는 건 원래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세상에 정해진 대로만 굴러가는 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래야만, 내가 이 미래를 바꿀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해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그냥 여기에 형이랑 있을래요.”
라엔이 입술을 잘근 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라엔이 내 말에서 허점을 찾아내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같이 가요, 형. 그러면 괜찮아요.”
괜찮게 만들 거니까, 그러니까 됐다. 당신이 세상을 포기할 수 없다면 나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노을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명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
초조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곳곳에 빽빽한 나무도, 허공에 벌어진 균열도. 모두 엇비슷하게 생겼다. 라엔이 언제 공격당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지 라엔이 몇 번이고 내 상태를 물어봐 왔다. 지금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닌데.
네 번째로 발견한 균열에 마법을 덧씌운 라엔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한이 지금이라도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라엔 형, 내가 아까….”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귀환석 작동 원리를 생각해 봤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나도 이유 없이 고집부리는 건 아니에요. 라엔 형은 여기 있을 거잖아요.”
“이한, 나는 용사예요. 당연한 일이에요.”
“나는요? 나도 용사 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들에게만 짐을 지우는 건 부당했다. 내가 나눠 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있을 수는 있잖아요.”
“내가 구하고 싶은 세상 안에는 이한도 있으니까요.”
담담하게 내뱉는 라엔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구하고 싶은 건, 당신들이라고.
당신들이 구하는 세상 안에 정작 자기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으니, 나라도 당신들을 구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그럴 능력도 있으니까.’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 등골에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다.
“이한!”
빠드득, 하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옆에 있던 라엔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길게 뻗었던 굵은 나뭇가지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 붉은 방울이 뚝 뚝 선을 그렸다.
차락.
라엔이 떨리는 손을 들어 마법을 썼다. 바닥에서 덩굴이 솟아올랐다.
똑같았다. 망할, 똑같았다는 말이다. 몸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엔이 자리에 풀썩 내려앉고 있었다. 두려움에 움직이지 않는 발을 애써 떼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떠는 라엔의 곁으로 갔다. 라엔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주위로 섬뜩하게 붉은 피 웅덩이가 점차 넓어져 갔다.
“이한…. 위험, …돌아가요.”
라엔은 숨소리처럼, 끊어지듯이 내뱉었다.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귀환석을 써서 라엔과 돌아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라엔의 부상이 낫는 것은 아니었다. 치료하기를 쓸까? 아직 쿨타임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답은 하나뿐이었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꼭 라엔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라엔에게로 손을 뻗었다. 라엔의 얼굴로 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에 닿는 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라엔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라엔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바라봤다.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전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돌아가.’
라엔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동시에,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힐러가 도울게요!> 용사 ‘라엔’
치료하기(잠금) / 가져오기」
웃음이 나왔다. 남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가져오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파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치료하기를 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었다. 그 빛은 라엔의 온몸을 감쌌다.
“…이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곧바로 라엔의 몸을 감싸던 빛이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
무릎이 풀썩 꺾였다. 고통은 없었으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보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의 허리께가 붉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눈앞에 파란 퀘스트 창이 깜빡였다.
「<힐러가 도울게요!> 가져오기, 성공!」
<히든! 퀘스트> ‘첫 번째 가져오기!’ 성공!
성공 보상으로 ‘용사 외 가져오기(1회)’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거슬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퀘스트 창은 스르륵 투명해졌다.
동시에 앞에서 다급하게 나를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흐린 시야에 라엔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무어라고 외치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물론 죽지 않는다. 나에게는 패시브 스킬이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 편리했다.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스템은 대체 왜 내게 이런 능력을 준 걸까.
드문드문 이어지는 생각이 두서없이 흘러갔다. 문득 안도감에 슬쩍 웃음이 새 나왔다. 결국 라엔도 나도 무사했다. 미래는 무사히 바뀌었다.
“…흐으, 커헉.”
입을 뗐으나 피가 쏟아져 나와서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없는 힘까지 쥐어짜 내서 말을 뱉었다. 지금이 이 말을 하기 딱 좋은 때였다.
“라엔 형, …믿어요.”
몸 가누기 힘든 나를 데리고 잘 돌아가 줄 거라고 믿는다. 라엔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아까 구하고 싶은 세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잘 데려가 주겠지? 적어도 무겁다고 두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형도, 이제 저를 믿어 주세요.’
이 정도면 나도 이제 좀 믿을 만한 사람이지 않은가? 라엔의 의심 퀘스트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조금은 안심되는 마음에 표정이 풀어졌다.
어, 그런데 내가 마지막 말을 잘 전했나? 정신이 없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더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칼로 자르듯 정신이 뚝 끊겼다.
뭐, 이제는 꽤 익숙했다.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