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20화 (20/150)
  • 020화.

    나는 나를 믿으니까

    미래시 중급 스킬이 자동으로 사용된 후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리더 형, 오늘 서쪽 숲에 잠깐 다녀올게요.”

    피곤한 얼굴로 느지막한 시간에 점심을 먹던 라엔이 말을 꺼냈다. 앞에 있던 박율이 바로 대화를 이었다.

    “언제쯤? 같이 갈까, 라엔아?”

    “이따 천천히 가 보려고요. 혼자 다녀올게요.”

    조그마한 빵 한 조각을 포크로 쿡 찍은 라엔이 말을 이었다.

    “그냥 걸어 뒀던 마법만 확인해 보려고 하는 거라서요. 괜찮아요, 리더 형.”

    “그래, 서쪽 숲이면 안정된 편이니까 괜찮겠다. 그래도 조심히 다녀와.”

    라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엔이 그릇을 둥둥 띄우고 걸음을 옮겼다. 다 먹었는지 뒷정리를 하는 듯했다.

    창 안으로 들어온 햇살이 라엔의 붉은 머리칼을 비췄다. 천천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이구나.’

    느낌이 왔다. 내가 봤던 미래, 그 일이 오늘 일어나는구나. 갑자기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손끝이 떨렸다.

    아니, 괜찮다. 내가 바꾸면 되니까. 라엔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터였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라엔 형. 나도 같이 가고 싶어요.”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으나 옅게 깔린 긴장을 숨길 수가 없었다.

    며칠간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가 같이 가는 방법밖엔 없었다. 미래를 발설할 수는 없었고, 나가려는 라엔을 갑자기 말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함께 가라고 말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는데 몇 사람이 가든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자칫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 내가 빠르게 대처할 수 있기도 하고.

    “이한아, 갑자기 왜? 형은 이한이가 안 갔으면 좋겠는데.”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하고 덧붙이는 박율을 바라봤다.

    방금은 안정된 장소라고 했으면서. 물론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마법을 못 쓰니까 걱정하는 거겠지.

    그리고 사실 위험한 곳이 맞긴 했다. 정확히는 내가 위험한 게 아니라 라엔이 위험한 거였다.

    미리 준비했던 말을 바로 꺼냈다.

    “라엔 형이 혼자 다녀올 정도로 안 위험한 곳이잖아요. 나도 언제까지고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율이 형.”

    “이한아. 앞으로도 시간은 많아. 형은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제대로 준비하고 나가도 늦지 않아.”

    같이 가겠다고 말을 이으려고 했는데 박율의 태도가 생각보다 완고했다. 게다가 전부 타당한 말이었다.

    내가 안일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는커녕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일이 없으니까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할 줄 알았다.

    생각이 짧았다. 더 신중하게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서 라엔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리가 뒤죽박죽 엉켰다. 이렇게 빠르게 뭔가를 생각해 내야 하는 상황은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라엔도 박율과 같은 의견일 것 같았으나 그래도 설득은 해 봐야 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라엔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라엔과 시선이 딱, 하고 맞았다. 내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한.”

    라엔의 표정이 굳어 보였다. 긴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라엔이 긴장할 이유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나요?”

    그리고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지난번 일.’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라엔이 말하고 있는 일은 그거였다. 지난번에 내가 미래시 스킬을 쓰려고 팔을 그은 걸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달라고 했던 일.

    라엔이 지금 내 행동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더니 라엔이 입을 열었다.

    “리더 형. 같이 다녀올게요.”

    라엔이 내 고집을 받아 줘서 다행이었다.

    박율은 처음에는 말리는 듯했으나 라엔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누더니 결국에는 수긍했다. 아까 서쪽 숲이 안정된 편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창 안으로 노란 햇살이 맑게 쏟아지고 있었다. 저 햇살이 붉게 물들 때 즈음, 라엔은…. 라엔은, 멀쩡히 다시 돌아올 것이다.

    ‘괜찮아.’

    퀘스트는 아직도 성공하지 못한 채였다. 라엔은 마음 한구석으로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나만은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할 수 있어. 주문이라도 되는 양 속으로 되뇌었다.

    라엔은 곧 나를 데리고 자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듯 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꺼낼 말이 없었다.

    “괜찮아요, 이한. 천천히 말해 줘요.”

    고마워요, 하고 작게 덧붙인 라엔이 내 머리로 손을 뻗더니 가만히 토닥였다.

    라엔이 다른 한 손을 허공으로 휘 내저어서 침대 옆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포장되어 있는 조그만 초콜릿이 여러 개 떠올랐다.

    둥실 날아온 초콜릿이 내 바로 옆의 책상에 살포시 쌓였다. 라엔이 그중 하나를 들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포장지를 벗겨 냈다. 그리고 내 입 앞으로 천천히 가져다 댔다.

    “아, 해 봐요.”

    초콜릿의 달콤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라엔이 연하게 웃었다. 라엔이 이런 표정일 때면 조금 날이 서 있는 듯한 분위기가 풀어지면서 훨씬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작게 열었다. 라엔의 손끝이 내 입술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입 안에서 초콜릿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달콤함이 깊숙이 퍼졌다.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라엔이 다시 설핏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우선 지금 가는 곳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요.”

    라엔이 책상 위의 수정구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 안에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작은 지도가 떠올랐다. 라엔이 지도 한쪽 구석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여기예요. 내가 걸어 둔 감지 마법을 보완하기 위해 가는 거예요.”

    “감지 마법이요?”

    “네. 마물이 빠져나와서 움직이게 되면 느낄 수 있어요.”

    그런 마법도 있다니 신기했다. 라엔은 마물이 이지 없이 오로지 공격만을 하므로,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아, 이번에는 마물이 감지돼서 가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냥 잠깐,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서….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요.”

    라엔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가만히 입술을 깨물던 라엔이 갑자기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각진 모양의 푸른 보석이었다.

    “귀환석이에요. 손으로 꾹 쥐고 부수면 돼요.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요.”

    멍한 표정으로 라엔을 올려다봤다. 귀환석의 모양이 익숙했다. 미래시로 봤을 때 라엔이 끝내 손에 쥐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텔레포트 마법도 쓸 수 없을 만큼 큰 부상인 거겠지.

    “이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이 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보석을 꼭 쥐여 줬다. 그러고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싼 채로 허리를 살짝 숙였다.

    라엔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로브가 스륵 내려왔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이제 갈까요.”

    어느새 해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라엔의 뒤쪽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 붉은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노을보다 붉은 머리칼이 반짝이듯이 빛났다. 금색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손안에 쥔 보석이 딱딱했다. 그리고 어쩐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내 손을 단단히 맞잡아 오는 힘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손을 떨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라엔과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눈 감아요.”

    순간 바람이 훅, 불어왔다.

    눈을 뜨니 낯선 곳이었다. 아니, 익숙한 곳이었다. 내가 보았던 미래, 라엔이 홀로 스러져 간 그곳이었다.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바닥은 흙길이었고, 공기 중에는 숲속 특유의 향이 배어 있었다. 눈앞에 생생한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이한.”

    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라엔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손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괜찮아요. 긴장하지 마요.”

    내 뺨에 손바닥을 댄 라엔이 그대로 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라엔의 시선이 나에게로 곧게 향하고 있었다. 뒤로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연한 바람이 불어왔다. 살짝 묶은 라엔의 붉은 머리칼이 슬며시 흘러내렸다. 로브가 얕게 흔들렸다.

    문득, 주위로 단 향이 더 진하게 퍼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의 나무 냄새를 덮을 만큼.

    “네, 라엔 형. 이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아직 멀쩡히 함께 있었으므로.

    라엔은 내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대화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라엔은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참에 오해를 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풀지 못한 오해는 켜켜이 쌓여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있을 테니까. 라엔과 둘이 있는 이 순간이 진실을 말하기 좋은 때였다.

    “라엔 형.”

    떨리는 목소리로 라엔을 불렀다. 막상 말하자니 변명 같았고, 화려한 오해를 하고 있을 라엔에게 조금 미안했다.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그때 그 상황은 다른 게 아니라 미래를 보기 위한 의식이었다,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띄엄띄엄 뱉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라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한. 미래를 보고 싶었던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진작 생각해 뒀다. 망설임 없이 목소리를 냈다.

    “미래를 알아야 대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몇 번을 그렇게 피를 내면서, 보고 싶었던 미래를 봤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신전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게 아니어서 그런가 봐요.”

    이런 걸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굳이 미래를 봤다는 얘기를 솔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말할 수도 없을 테니까.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그냥, 안 그러려고요.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엔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한. 나는 가끔 무서워요.”

    고백하듯이 조용히 내뱉는 목소리였다. 시선을 여전히 앞에 둔 채로 라엔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결국 모든 걸 망치는 건 나일까 봐. 그게 두려워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던 라엔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옅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 미래를 보고 싶었던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무슨… 마음…? 분명히 오해를 풀기 위해서 말을 꺼냈던 것 같은데, 상황이 뭔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