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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9화 (19/150)

019화.

적어도 당신들을 구하는

눈앞의 장면이 생경했다. 라엔의 허리께를 섬뜩하게 꿰뚫은 나뭇가지는 곧 제자리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순식간이었다.

“커, 헉….”

라엔이 자리에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었다. 허리께로 가져다 댄 떨리는 손 아래로 진득한 피가 쉼 없이 떨어졌다. 입에서는 붉은 피를 사정없이 토했다.

라엔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힘겹게 들어 올린 라엔은,

차락.

마법을 외웠다. 바닥에서 덩굴이 솟아올라 그 나무를 칭칭 옭아맸다. 개중에 검게 물든 유난히 굵직한 나뭇가지 하나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안심했다는 것처럼 표정을 살짝 푼 라엔이 곧장 손을 로브 안쪽으로 넣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다급해 보였다.

로브 안쪽에서 각진 모양의 푸른 보석이 툭, 하고 떨어졌다. 라엔의 손에서 미끄러진 보석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라엔이 떨리는 손을 그 보석 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보석에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풀썩.

힘없이 쓰러졌다.

라엔은 눈을 감은 채 밭은 숨을 내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쓰러진 라엔의 주위에 고인 끈적한 피 웅덩이가 점차 면적을 넓혀 갔다.

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라엔의 붉은 머리칼이 노을빛에 반짝였다. 피 웅덩이도 노을에 붉게 반사되며 어둡게 빛났다. 온통 붉었으나 어쩐지 차갑게 식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면이 점점 멀어졌다. 라엔은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화악.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대로 어두운 방 안에 있었다.

굴러떨어졌는지 침대 아래에 쓰러지듯이 기대서 앉아 있는 채였다. 식은땀이 나서 등이 축축했다.

“욱, 허억….”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난번에 치료하기 게이지가 다 차서 피를 뱉었을 때와는 달랐다. 마치 토하는 것처럼 피가 목 끝까지 울컥 차올랐다.

눈앞에 파란 상태 창이 깜빡였다.

「<미래시 중급> 스킬 사용!」

미래시? 그냥 꿈이 아니었나? 나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건가?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럼 라엔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지막에 풀썩 쓰러져 있던 라엔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주위로 뻗어 나가던 피 웅덩이도.

그렇게, 그런 식으로 끝날 수는 없었다.

“…흐, 윽. …싫어.”

그건 싫었다. 그렇게 잃는 건 싫었다.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걸 당신들이 알려 줬으니까. 당신들도 계속 이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렇게 홀로, 차갑게 식어 가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의 치명상보다 마물을 묶어 두는 것을 우선으로 했던 라엔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뭘 위해서.

“선이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송하견이 내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 다급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송하견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송하견의 옷이 내가 토한 피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형.”

송하견에게 팔을 뻗었다.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제대로 있다는 확신이. 내가 본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는 확신이, 절실히 필요했다.

송하견은 자신에게 기대 오는 나를 마주 안았다. 송하견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닿아 오는 온기가 어쩐지 안심됐다. 송하견에게서는 여전히 옅은 풀 향기가 났다.

“윽, 흐으…. 형….”

송하견에게 기댄 어깨로 눈물이 쏟아졌다. 목이 메었다.

깊게 내려앉은 밤이 너무 무거웠다. 보이지 않는 미래도 무서웠지만, 보이는 미래 역시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송하견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온기에 기대어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나는 솔직히, 세상을 구하는 건 잘 모르겠다. 시스템은 내게 세상을 구하라고 말했지만, 애초에 나는 용사도 아니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용사라는 이유 하나로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스러져 가고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마모되어 사그라들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당신들은 구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입에서 쏟아져 나오던 피는 한참 후에야 멈췄다.

아무래도 미래시라는 게 피를 제물로 하는 것이다 보니, 자동으로 스킬을 쓰고 이후에 피를 내는 것 같았다.

아까는 모든 것이 갑작스러워서 두려운 마음이 컸지만, 조금 진정된 후에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바꿀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면 내가 이걸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애초에 말을 꺼내도 되기는 할까?

미래를 발설해서 섭리를 거스르게 됐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섣불리 말을 꺼내서 변수가 생겨 미래가 뒤틀린다면 그게 더 좋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진행되는 게 낫다. 그래야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라엔, 혼자 있었지.’

그 자리에는 라엔 뿐이었다. 순간 노을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라엔의 뒷모습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진정하자.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시간대는 오후 늦게, 노을이 질 무렵. 장소는 나무가 빼곡한 숲길이었다. 그곳에 나는 없었다. 그러니 라엔이 혼자 나갈 때 내가 어떻게든 따라가면 되었다.

‘아직 치료하기 쿨타임이 남긴 했는데.’

최악의 상황은 미리 가정하지 않기로 했다. 라엔이 다치기 전에 막으면 됐다. 주의하라고 미리 말을 해 주거나, 나뭇가지가 뻗어 올 때 라엔을 안전한 곳으로 밀치거나.

사고는 사전에 막는 편이 나았다. 라엔이 언제 나가는지 잘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이한. 지금, 이거….”

송하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많이 놀랐겠구나.

송하견이 세차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하견의 두 손이 내가 토한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닥에 피가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그제야 피 냄새가 훅 올라왔다.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지금 얼굴도 말이 아닐 것 같았다. 눈가도 뜨끈했다. 눈에는 눈물 자국이, 입가에는 핏자국이 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송하견은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내게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클린 마법을 썼다. 반짝 빛이 나더니 바닥에 흥건했던 피가 스르륵 사라졌다.

송하견이 내게 손을 뻗어서 입을 가리고 있는 소매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송하견의 손길이 닿는 동시에 소매를 붉게 물들였던 피가 점차 옅어졌다.

볼 때마다 신기했다. 나도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송하견이 단정한 손으로 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닿아 오는 손이 뜨거웠다. 어쩌면 내 살갗이 차가운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 이 정도야?”

송하견이 그 상태 그대로 내 눈물 자국을 지우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게 조심스럽게 건네 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담담했으나 그 안에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뭐가 이 정도냐는 거지?’

송하견의 말은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알 것 같았다. 지난번에 가끔 피를 토할 때가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걸 말하는 거구나.

“가끔이요.”

결국 그때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송하견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했다. 나라도 누군가 자다가 발작하듯이 피를 토하면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펑펑 울면 당황스러움은 배가 될 터였다.

멋쩍게 웃으며 변명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은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래서 좀 놀랐나 봐요.”

하견 형도 놀랐죠, 하고 작게 웃었다. 그랬다. 안 좋은 꿈일 뿐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미래니까.

그리고 내가 울었던 건 부끄러우니 제발 잊어 줬으면 좋겠다. 놀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정말이다. 송하견은 여전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피를 토하는 이유는, 몰라?”

“어…. 네.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에요.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했어요.”

고통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고 시스템이 말했으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하견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평소보다 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렇잖아요.”

말을 뱉고 나니까 언젠가 송하견과 라엔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라엔에게 송하견이 똑같은 말을 했었다.

라엔을 생각하자마자 몸이 흠칫 떨렸다. 찰나였으나 송하견이 그런 내 기색을 이미 눈치챈 듯했다. 송하견이 내 뺨에서 손을 떼고는 내 손목을 단단히 잡아 왔다.

“추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히 마음이 철렁했다. 라엔에 대해 생각만 해도 이 정도인데, 당장 내일 얼굴을 보고 침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몸이 찬데.”

“가을이고, 새벽이니까요.”

“…….”

어느새 허공에 생겨난 담요가 내 등을 감싸며 내려앉았다. 따뜻했다.

송하견이 내 손목을 덧그리듯 매만졌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를 내 손목에 가져다 댔다.

탁자에 놓인 등에서 하얀 빛이 옅게 새어 나왔다. 송하견의 침착한 얼굴이 그 아래서 말갛게 빛났다.

한참 내 손을 잡고 있던 단단한 힘이 스륵 풀렸다. 텅 빈 손이 어쩐지 조금 허전한 것도 같았다.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송하견이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의 조그만 유리병을 소환했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서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정신을 차릴 새 없이 순식간에 한 모금을 부드럽게 넘겼다. 달큼한 맛이 났다. 몸에 온기가 퍼지는 듯했다.

송하견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손목부터 손끝까지를 찬찬히 주물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견 형. 이건 비밀로 해 줄래요?”

“…왜?”

“다들 걱정할 것 같아서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송하견이 입을 꾹 다물고 내게로 곧장 눈을 맞춰 왔다. 내가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송하견은 결국 심란한 눈빛으로 수긍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

왜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송하견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약,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물론 약이 필요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말하지 않아 준다니 다행이었다. 괜히 알려 봤자 변명할 말만 더 필요했다. 이제 라엔이 언제 혼자서 나가는지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조만간이겠지.’

먼 미래는 아닐 터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밤이 깊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날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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