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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8화 (18/150)

018화.

희생이 필요한 세상이라면

라엔에게 들킨 건 실수였다. 내가 팔을 스스로 그은 일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만둘 일이기도 하고.

“형, 앞으로 정말 안 그럴게요.”

간절한 눈빛으로 라엔을 바라봤다. 라엔이 조금 착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에요, 이한. 힘들 때는 차라리 나한테 말해 줘요.”

내게서 그러겠다는 대답을 받아 낸 라엔이 내 팔에 감긴 붕대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는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민주혁도 붕대 감는 방법이랑 상처 소독하는 방법 같은 걸 알려 줬었다. 물론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치료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민주혁도 라엔도 이런 것에 익숙해 보였다. 용사의 덕목 중에 능숙한 응급 처치, 뭐 그런 것도 있는 걸까? 라엔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며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박율이 민주혁을 부축한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뒤에서 송하견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공기 중으로 연하게 퍼지던 찬 바람이 뚝 끊겼다.

“어, 선이한. 그리고 라엔 형님! 같이 있으셨습니까.”

민주혁이 나와 라엔을 보고는 반가운 듯 한 팔을 흔들며 말했다. 밝은 목소리였다.

지금 다리가 너덜너덜해 보이는데?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민주혁의 앞에 섰다.

민주혁의 손을 잡고 치료하기를 쓰자, 예상대로 푸른빛이 다리 부근을 빙빙 돌더니 내게로 다시 들어왔다. 눈앞에 막대 게이지가 거의 끝까지 채워진 것이 보였다.

“고마워, 선이한. 사실 진짜 아팠는데.”

아팠다는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지만, 민주혁은 눈썹을 올려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원래 이렇게 크게 다치는 일이 많은 걸까. 어쩌면 시스템이 말한 용사들의 희생이라는 게 이런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민주혁이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러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다 잡아 둔 줄 알았는데, 마물이 이상한 데서 튀어나오더라.”

민주혁의 옆에 있던 박율이 바로 말을 받았다.

“그래, 주혁아. 형이 쓴 공격 마법도 잘 안 먹히는 것 같았어. 전략 자체를 좀 보완해야 할 것 같아.”

“하마터면 송하견 형님이 또 크게 다치실 뻔했습니다. 제가 더….”

“민주혁. 저번 일은, 끝난 거 아니었어?”

송하견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율이 민주혁의 등을 힘주어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견이 말이 맞아. 그리고 다 같이 싸우는 거잖아. 혼자서 책임질 필요 없어.”

“그래요. 다들 고생했어요. 주혁,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올라가서 푹 쉬고요.”

민주혁의 표정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보였다. 민주혁은 자기가 제일 많이 다쳐 놓고 왜 그렇게까지 자책하는지 모르겠다. 송하견과 박율은 상태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데.

송하견에게로 손을 뻗어 치료한 후에 박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찮아, 이한아.”

반걸음 물러서며 말하는 박율의 손을 붙잡았다.

「<힐러가 도울게요!> 선택받은 용사 ‘박율’

치료하기 / 가져오기」

속으로 치료하기를 선택했다. 곧 상처가 사라지고 치료가 성공했다는 상태 창이 떴다. 그리고 눈앞의 막대 게이지가 드디어 다 찬 것이 보였다.

“…콜록.”

작게 기침이 나왔다. 손을 입가로 가져가니 소매에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피를 뱉을 때마다 막대 게이지의 붉은 빛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헉.”

순간 울컥 넘어오는 피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소매가 피로 붉게 적셔졌다.

아니, 침착하자. 별일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 당황했을 뿐이다.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흐으…. 하아, 콜록.”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다 보니 숨 쉴 만했다. 피를 뱉는 데에도 요령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모든 배움에는 의미가 있다는데 이것도 언젠가 쓸모가 있을까? 이런 배움이라면 쓸모없는 편이 더 좋겠지만, 아무래도 조만간 또 유용하게 써먹을 듯했다.

허공에 떠 있는 막대 게이지의 붉은 빛이 사 분의 일 정도 줄어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 게이지가 다 차면 피를 뱉으면서 원상태로 돌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치료하기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네.’

어떤 상처든 치료할 수 있다면 피 몇 번 뱉는 것쯤이야 오히려 이득이었다. 심지어 나는 고통도 없고 죽지도 않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상황은 없을 터였다.

나쁘지 않은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데, 등 뒤로 조심히 닿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한?”

라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등을 토닥이듯이 두드리고 있는 채였다. 그제야 상황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한아, 정신 차려 봐.”

앞에서 박율이 내 어깨를 단단히 잡고 내게 눈을 맞춰 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침착해 보였으나 눈동자가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민주혁이 푹신한 의자 하나를 뒤로 끌어와 나를 천천히 앉혔다. 괜찮으냐고 묻는 목소리가 끊어지듯이 들렸다.

나는 정말 멀쩡했다. 멀쩡해 보이지 않을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답답했다. 그때 내 앞에 연한 보랏빛으로 물든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전에도, 이런 적 있어?”

송하견이 입을 막고 있던 내 손을 잡아서 내리고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며 물었다.

안 그래도 소매가 피로 젖어서 축축했는데 훨씬 좋았다. 손수건에서 풀 향이 짙게 올라왔다. 이것도 약초로 뭔가를 한 건가? 어쩐지 기침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막대 게이지의 채워진 부분이 이제 절반도 안 남아 있었다. 곧 피를 뱉는 것도 끝날 듯싶었다.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가끔이요.”

앞으로도 치료하기를 많이 쓰게 되면 피를 뱉을 것 같으니, 차라리 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나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괜찮아요.”

피에 젖어 색이 진해져 가고 있는 손수건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다들 쉽게 수긍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때 눈앞에 띠링, 소리와 함께 상태 창이 떠올랐다.

「다음 치료하기까지 남은 쿨타임: 7일」

나 역시 수긍할 수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쿨타임을 이렇게 정하지? 그러나 시스템 역시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다들 지금 이렇게 좀 어이없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기분인 걸까.

‘그런 거라면 조금 미안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세상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 꽤 있는 법이다.

어느새 해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창 안으로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이후 며칠간 다들 나에게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발이 걸려서 잠깐 비틀거렸을 때였다.

“야, 선이한. 괜찮아?”

“어디 아픈가요, 이한?”

“…업어 줘?”

“이한아, 힘들면 말해.”

다들 손을 뻗으며 이렇게 한 마디씩 보탰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했다. 그리고 송하견은 저번부터 왜 자꾸 업어 주겠다고 물어보는 거지?

내가 무슨 바람 앞의 등불이라도 된 양 불안해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건 조금 억울했다.

‘지금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멀쩡할 텐데.’

아직 쿨타임이 다 돌지 않아 치료하기는 쓸 수 없었고, 가져오기는 너무 티가 날 것 같아서 쓰지 않았다. 내가 치료 마법을 쓴다고 알고 있으니 상처를 그대로 가져오는 건 곤란할 듯싶었다.

그래도 큰 부상이 있으면 가져오기라도 쓸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동안 누군가 크게 다쳐 오는 일은 없었다.

치료하기를 못 쓰니 다들 잔 상처가 몸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게 마음이 쓰이기는 했다. 쿨타임이 다 돌면 당장 치료해야지.

그런데 내가 오기 전에는 어떻게 해 온 걸까? 치료 마법 같은 건 없다고 했고, 송하견이 만드는 약 중에도 큰 부상에 쓰는 약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나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지금껏 그래 온 것이 맞다면 그건 좀 씁쓸했다. 꽤 자주 다쳐서 오는 듯했는데. 그렇게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굴러가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이한아, 잘 자.”

박율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박율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방문 앞이었다.

“형들도 잘 자요. 민주혁 너도.”

다들 바쁜지 지금보다 한참은 늦게 자는 듯했으나, 나는 지금 잘 거니까 미리 인사를 해 뒀다. 오늘은 왠지 평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달칵.

방문을 닫고 침대에 올라갔다.

바로 옆의 탁자에는 송하견이 두고 간 흰색 상자가 아직 놓여 있었다. 한 번 톡 건드리니 은은한 빛이 번져 나왔다. 훨씬 나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곧 정신을 잃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타박, 타박.

발걸음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흙길을 걷는 듯한 소리였다.

‘어? 분명히 방금 잠들었는데?’

로브를 걸친 라엔의 뒷모습이 보였다. 앞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변에 늘어선 굵은 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 있었다.

라엔이 그 가운데 나 있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꼭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꿈인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꿈은 잘 꾸지 않는 편인데. 라엔의 모습은 꿈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없이 자연스러웠다.

순간 라엔이 덜걱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왼편을 빤히 바라보던 라엔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지던 걸음이 멈춘 곳에는 허공에 검게 찢어진 듯한 흔적이 있었다.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이 동떨어진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그 주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균열이구나.’

저번에 라엔이 내게 설명해 준 것이 기억났다.

라엔은 균열 앞에서 입술을 짓씹은 채로 서 있었다.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신중하게 마법을 외웠다.

우웅.

빛무리가 균열을 연하게 감췄다. 균열을 닫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마법을 덧씌우는 듯한 모양새였다. 임시방편일 뿐인지 라엔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라엔은 한참 동안을 돌아다니며 균열을 더 찾아내고 그 위로 마법을 덧씌웠다. 똑같은 행동을 계속 보려니 살짝 지루해지려고 했다. 그때 라엔이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도 균열이 열려 있었다. 라엔이 손을 들어 마법을 외우는 순간, 뒤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굵고 억세 보이는 나뭇가지가 라엔의 뒤로 뻗어 오고 있었다. 끝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라엔은 깊이 집중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빠드득.

나뭇가지를 짓밟아 뭉개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라엔이 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푸욱.

굵은 나뭇가지가 라엔의 허리께를 짓이기며 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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